영화를 읽으면, 무엇이 달라 보일까요?

연재한 글을 지면으로 옮겼습니다.

21ST CINEMA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디세이>

<오디세이>
<오디세이>

개봉 전부터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디세이>를 둘러싼 가장 뜨거운 논쟁거리 중 하나는 헬레네의 캐스팅이었다.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나에게 있어 이 캐스팅은 '진짜 이유는 다른 것에 있었을 것이다.'라는 뉘앙스를 은밀히 전달하기 위해 이미지를 노골적으로 비튼 기능을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현재 지구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물을 정말로 그 역에 캐스팅했다면, '이 한 미녀 때문에 전쟁이 벌어졌다.'라는 지극히 신화적이고 낭만적인 서술이 은근히 힘을 얻게 될 것이고, 그것은 놀란이 <오디세이> 안에서 펼치려는 서술과 전혀 다른 방향일 것이다. 그렇기에 이 세계에서 최고로 아름답다고는 빈말로도 할 수 없는 존재를 그 자리에 앉혀 놓고, 진짜 이유(트로이의 제해권을 통제하려는)는 따로 있었을 것이라는 암시를 캐스팅으로 한 것이라 나는 해석한다. 장면에서도 드러난다. 메넬라오스는 헬레네의 얼굴을 거칠게 잡으며, '저 얼굴 때문에 수많은 이름이 희생됐지.'라는 말을 마치 조소하듯 뱉는다. '천 척의 배를 띄운 얼굴.'이라 말을 하다 상처로 얼룩진 그녀의 얼굴이 드러나니 '지금은 오백 척 정도겠군.'이라며 말을 바꾸는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다.

이 정도로 신화적 낭만을 걷어내려는 놀란의 의도는 집요했다. 그리고 그 집요함은 영화의 전체를 보고 나서도 고스란히 유효했다. 필자는 본작을 주말 용아맥 중블 i열에서 관람했다. 화면비로 말이 많았던 만큼, 손실 없이 이른바 끝판왕의 포맷으로 보았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영화를 보고 난 후 떠올릴 때마다 그 압도적인 영상들보다 영화의 이야기가 더 기억에 남는다. 『오뒷세이아』가 아니라 <오디세이>의 이야기가 말이다.

<오디세이>의 영상이 기대 이하였다는 뜻이 아니다. <오디세이>의 비주얼은 엄청났다. 우리가 상상해 왔던 문학 속 장면들을 기대했던 대로 (어쩌면 용아맥에선 그 이상의 것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텔레마코스가 여정을 떠날 때의 그 드넓은 바다, 초월적인 존재 폴리페무스와 라이스트리고네스들, 마치 테렌스 맬릭의 <씬 레드 라인>을 연상케 하는 터치로 그려진 신비스러운 공간 키르케의 아이아이에 섬 등. 어떤 공간, 어떤 장면에서도 시시한 영상은 없었다. 고증을 차치하고서라도 디자인한 아가멤논의 비주얼은 흡사 다스 베이더의 카리스마와 필적할 만했다. 그러나 진정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디세이>를 보며 흥미로운 부분은 각색된 이야기를 볼 때에 있다. 헤르메스는 왜 등장하지 않는가, 아테나 여신은 왜 개입하지 않는가 등에 있어, 우리는 놀란이 이 고전을 어떤 시선으로 다시 바라보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오디세이>
<오디세이>

『오뒷세이아』는 신화지만 <오디세이>는 신화가 아니다. <오디세이>에서 신의 존재감은 불분명하다. 고로 신화의 맥락으로 읽을 수 있었던 어떤 낭만적인 서술도 본작에선 최소화되거나 비틀어져 있다. 헬레네의 얼굴을 둘러싼 앞의 장면들이 그 단적인 예다. 놀란은 신화의 맥락 아래서 쓰여진 낭만적인 서술들을 해체하고, 신화가 사라진 역사에서 인간과 문명의 흔적은 어떠했을까에 대한 탐구를 벌인다.

오디세우스만큼이나 존재감이 있는 아가멤논은 오디세우스만큼이나 흥미로운 인물이다. 얼굴이 드러나지도 않을 정도로 크고 깊은 투구로 무장한 그는 갑옷의 껍데기를 입은 순간들에선 대체 불가능한 카리스마를 보인다. 그러나 갑옷을 벗은 맨몸에서는 여느 인간과 다르지 않은, 아니 어쩌면 자신의 수하들보다 못한 헐렁한 몸매에 지극히 평범한 외모의 소유자다. 물론 두 모습 중 어느 하나가 가짜며 어느 하나만이 진짜라고 단언할 수 없다. 아가멤논이 연합군을 지휘한 총사령관이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풍당당한 면의 뒷면은 동시에, 자신의 아내에게 어이없게 살해당하는 비참한 면을 지니고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아가멤논은 말하자면 미리 본 오디세우스의 미래처럼 그려진다.

<오디세이>에서 신을 다루는 방식은 <반지의 제왕>에서의 그것을 떠올리게 한다. <오디세이>에서 신들의 존재는 최소한으로 드러나 있으며, 거의 유일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다시피 하는 아테나 여신 역시 사건에 개입하지 않는다. 오디세우스가 이타카로 돌아간 후 아테나가 도움을 주는 원작의 내용은 <오디세이>에서 생략되어 있다. 다만 그 자리를 오디세우스의 처절하고도 멋과 낭만이 사라진, 피로하고 거친 액션이 홀로 채운다. 오디세우스는 극중 자신의 곁을 찾아온 아테나 여신에게 묻는다. 왜 신들은 항상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말하냐고. 그리고 오디세우스의 그 의심은 영화의 말미에 이르러서도 뒤집어지지 않는다. 아테나 여신과 이름 모를 트로이의 여사제를 젠다야의 1인 2역으로 설정해, 신의 존재가 진정 있는 것인지, 그저 오디세우스가 마음속에서 만들어낸 실체 없는 존재였던 것은 아닌지 의심을 가지게 만든다. 『오뒷세이아』와는 달리 <오디세이>에서, 신과 인간의 영역은 사실상 분리되어 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디세이>는 철저히 인간의 무대이며 철저히 인간의 이야기다.

<오디세이>
<오디세이>

<오디세이>의 오디세우스는 『오뒷세이아』의 오디세우스보다 더 탈신화화된 주인공이다. <오디세이>의 오디세우스에게서 전쟁 영웅으로서의 아우라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오디세우스의 공적은 공적이 아니라 PTSD가 되어 스스로를 괴롭힌다. 일명 트로이 목마 계책을 오디세우스의 죄책감의 근원으로 해석한 것은 이 영화에서 분명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다. 이 해석을 지원하는 설정이 바로 본작에서 내내 언급되는 '제우스의 법'이다. 대접받고 싶은 대로 대접하라는 그 내용은, 인간이 상대방과의 신뢰를 쌓는 방식이고 문명을 일구어내는 토대였다. 그러나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목마를 '선물'이라는 거짓말을 하며 트로이에게 선사했고 승리를 이뤄냈다. 말하자면 오디세우스는 트로이를 멸망시킬 계책으로 이 땅의 규칙과도 같은 제우스의 법을 어긴 것이다.

그러는 중 작게는 한 개인에게도 거짓말을 했다. 시논. 그에게는 이 목마가 정말로 트로이에게 선사하는 선물이라고 말했고, 자신을 포함한 병사들이 목마 안에 숨어 있다는 사실도 그에게는 알려주지 않았다. 그 말만을 믿은 채 시논은 트로이 병사들에게 그것을 알려주는 역할로 소비된 채 죽었다. 오디세우스는 한 개인 앞에서도, 한 나라 앞에서도 거짓말을 했다. 시논은 오디세우스의 거짓말을 위해 죽었고, 트로이는 오디세우스의 거짓말에 의해 멸망했다. '거짓말'이라는 작전 때문에 전쟁에서 승리하였고 영웅이 되었지만, 그 때문에 신의 이름을 빌려 신의를 다졌던 인간들 간의 관행과 화합을 유지하는 것은 영영 불가능하게 되었다. 승리를 위해 인간들 사이의 신성한 약속을 깨뜨린 오디세우스.

인간이 내뱉은 이 거짓말의 도구는 그래서 지극히 현실적인 디자인으로 등장한다. 목마는 '옮기기 용이하게' 바퀴 등이 달려 있지도 않으며, 해변에 비스듬히 처박혀 있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것을 성 안으로 옮기는 순간을 채우는 것은 수많은 장정들과, 그들의 힘겨운 신음소리다. <오디세이>는 신화로 쓰여진 『오뒷세이아』안에서 인간의 피와 땀을 유독 응시한다.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로도 우리의 주인공 오디세우스는 영웅적인 면모와는 거리가 있다.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자존심과 아집 때문에, 쉽게 갈 수 있는 일을 어렵게 돌아간다. 포세이돈의 아들 폴리페무스를 능욕한 것 때문인지 오디세우스 호의 항해에는 파도가 가득하지만, 포세이돈에게 기도로 자비를 청하라는 부하의 말도 듣지 않는다. 오디세우스는 신에게 맞설지언정, 자신의 자존심을 꺾지 않는다. 그러는 한편 철저한 공리주의자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것을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 부하들이 희생될 것이라는 경고에도 그곳으로 향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은 채 되려 (누구를 희생시킬지) 잘 선택하겠다는 말이나 뱉는 자이며, 죽을 위기에 처한 자들을 살리기보단 살릴 수 있는 자들을 늘 선택하는 자였다.

<오디세이>
<오디세이>

다시, 이 영화의 각색에 대해 떠올리자. 왜 <오디세이>의 오디세우스는 스케리아 섬을 경유하지 않고, 칼립소의 오기기아 섬에서 곧장 이타카로 향한 것일까. 그것은 놀란이 오디세우스의 내면에 보다 집중하기 위해, '오기기아 섬에서의 오디세우스'를 '이타카에서의 오디세우스'와 대비를 이루는 요소로 만들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이타카에서의 오디세우스는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명백히 목적 지향적인 인물이다. 반면 오기기아 섬에서의 오디세우스는 모든 것을 망각했으며 어디로 향하겠다는 의지도 없어 보이는 인물이다. 이 이야기의 시작점인 오기기아 섬과, 이 이야기의 끝인 이타카는 이렇게 대비를 이룬다.

그렇다면 왜 <오디세이>의 오디세우스는 오기기아 섬에서 기억을 잃은 상태였을까. 영화는 그것을 정확히 설명하고 있진 않다. 하지만 짐작할 수는 있다. 오디세우스는 목마로 트로이를 점령하던 그날 밤, 불타는 모든 것들을 보며 자신의 손에 의해 문명이 파괴되는 것을 보았다.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는 죄책감은 승전의 기쁨보다 무겁게 다가왔다. 그는 도망치고 싶었고, 기억을 잃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파괴한 문명을 재건하는 것으로 채워질 앞으로의 시간을 차마 마주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무도 있지 않은 곳에 홀로 남아, 역사의 시계가 흐르는 것을 망각할 수 있는 곳에 있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가멤논을 따라 가장 효율적인 항로를 따르지 않고 구태여 빙빙 돌며 고향으로 가지 않은 것은 그의 타고난 고집 때문이었을 수도 있겠으나, 어쩌면 사실 고향에 가고 싶지 않았던 그의 본심에 의한 것이었을 수도 있다. <오디세이>에서 오디세우스가 등장하는 사실상 첫 장면이 그곳인 것은 의도적이다. 돌아가야 하는 곳인 당위의 공간 이타카와 정확히 반대되는, 지금 향하고 싶은 본능의 공간 오기기아.

그렇다면 <오디세이>의 오디세우스가 『오뒷세이아』의 내용과는 달리 모든 복수를 끝낸 후 자신의 왕좌를 아들에게 내려놓은 것도, 그의 죄책감의 맥락에서 이해한다면 납득이 간다. 이 이야기는 목마로 한 문명을 멸망시켰다는 죄책감, 혹은 업보를 가지고 있었던 오디세우스의 결자해지라는 내용으로 흘러가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폭력으로, 자신의 손에 피를 묻혀 문명을 파괴한 자가, 고향으로 돌아와 자신의 손에 다시금 피를 묻혀 모든 과업을 끝내고 군주의 자리에서 스스로 내려오는 것. <오디세이>는 놀란의 <용서받지 못한 자>다.

<오펜하이머>
<오펜하이머>

폭력은 인간의 문명을 무너뜨렸다. <오디세이>는 놀란의 직전 작품인 <오펜하이머>와 2부작으로 읽힌다. 영웅의 이름을 분명 지니고 있지만, 그 스스로는 영웅의 이름을 차마 소유할 자신이 없는 인물. 자신의 지혜로 세상을 파괴한 죽음이 되어, 죄책감에 시달리는 인물. 놀란은 『오뒷세이아』를 가지고서도 자신이 늘 하던 이야기를 했다. 영웅이 아닌,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개인의 기록.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학을 가지고서 야심찬 각색으로 자신이 늘 하는 이야기를 한다는 건 대단한 야심이다.

이 지점에서 <오펜하이머>부터 <오디세이>까지를 훑어보면, 놀란의 또 다른 페이즈가 열린 듯한 느낌마저 든다. <오펜하이머> 이전까지 놀란의 최대 단점은 플롯과 구조, 즉 숲이 중요한 작품을 만들며 그 안의 나무인 인간의 묘사에 있어서는 경직된 서술을 보였다는 것에 있었다. 이미 탄탄한 원작에 더해 한 배우의 길이 남을 명연으로 완성된 <조커>의 경우와, 아예 캐릭터라이징을 지우는 것을 영화의 컨셉으로 가져간 <덩케르크>가 유이한 반례였다. 그러나 <오펜하이머>에선 한 인물을 가지고 넓이와 깊이를 모두 가져간 훌륭한 전기 영화를 만들었고, <오디세이>에 이르러선 (물론 위대한 원작이 뒷받침되었지만) 극중 등장하는 모든 인물을 관객에게 각인시키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었다. 물론 라이스트리고네스들과 맞닥뜨릴 때, 해변을 내달릴 때처럼 '규모'를 다뤄야 하는 순간에도 이 영화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인물과 규모, 둘 중 하나를 잡기 위해 다른 하나를 놓아주던 놀란의 오랜 습관은 이 영화에 이르러 완전히 지워졌다.

이 인간의 무대를 완성시키는 것은 결국 배우들의 앙상블이다. 나무보다 숲이 먼저 보이는 상업영화의 일반적인 특징을 고려했을 때, <오디세이>만큼 배우들의 얼굴이 이 정도로 선명하게 각인되는 블록버스터는 흔치 않다. 맷 데이먼은 그의 화려한 경력에서도 한 손에 꼽힐 만한 연기를 보여준다. 오디세우스 홀로 듣는 세이렌의 노래를 관객에게도 들려주지 않기에 관객이 상상만 할 뿐인 장면에서, 관객의 머릿속을 공포로 채우는 가장 큰 까닭은 두려움에 휩싸인 맷 데이먼의 표정이다. 관객이 이타카에서 오디세우스의 흔적을 가장 진하게 감각하는 것은, 세월의 더께가 쌓이고 한탄이 들어찬 페넬로페를 연기한 앤 해서웨이를 통해서다. 비겁함과 열등감을 감추지 못하는 안티노오스의 로버트 패틴슨, 아가멤논의 갑옷과 맨몸 사이의 그 낙차를 몸으로 살려내는 베니 샤프디, 순박해 보이던 얼굴에서 본색을 드러내는 두 얼굴의 키르케를 연기한 서맨사 모턴, 어필하지 않아도 아우라를 숨길 수 없는 칼립소의 샤를리즈 테론, 소년에서 성년으로 건너가는 텔레마코스의 톰 홀랜드까지. 이 영화가 각인시키는 얼굴은 하나가 아니다.

<인터스텔라>
<인터스텔라>

음악마저 비범하다. 불협화음인 듯하고 생경한 음색인 듯하면서도 그것만의 신비한 분위기가 특별하다.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악기를 재현해 만든 악기들의 연주이기에, 과거의 것이지만 오히려 신선하게 들린다. 지금껏 놀란의 야심이 가장 컸던 작품이 무엇이었을까. 나는 <인터스텔라>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번 <오디세이>는 그것에 필적할 만큼, 놀란의 사상 최대의 야심이 들어간 작품처럼 느껴진다.

<오디세이>
<오디세이>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다. 놀란의 특성이기도 한 모범생적인 면모에서 본작 역시 벗어나지 못했다. 짐승과도 같은 악랄한 구혼자들이 매번 궁전 안에서 질서 있게 만찬만을 즐기는 모습만 비춰진다거나, 영상이 텍스트를 초월하는 순간이 좀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 그렇다. 관람 후에도 영상보다 이야기가 남는다는 첫머리의 고백은 이 지점에 이르면 뒤집어 읽을 수도 있다. <오디세이>의 이미지들은 끝내 이야기를 앞지르지 못한 채, 그 위대한 텍스트에 성실하게 복무하는 삽화로 남는다.

그러나 이 모범생적인 흠은, 크리스토퍼 놀란이 이룩한 것 앞에서는 사소하다.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학을 가져다가 끝내 자신이 늘 하던 이야기를 관철해냈다. 영웅이 아닌, 죄책감에 시달리는 한 인간의 기록 말이다. 신들을 걷어낸 그 빈자리를 인간의 피와 땀으로 가득 채운 이 영화는, 신화에 맞서 인간을 세운다. 그 무모한 야심을 이토록 완결된 형태로 성취해낸 블록버스터를 나는 근래 본 적이 없다. <오디세이>는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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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 The Movie Databa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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