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한 글을 지면으로 옮겼습니다.

어느 영화감독의 인생영화 목록을 건네받았다고 하자. <백 투 더 퓨처>, <로보캅>, <초시공요새 마크로스>, <트루 로맨스>. 시간여행 코미디와 사이보그 액션과 로봇 애니메이션과 폭주하는 로맨스. 이 목록의 주인이 누구일 것 같으냐고 물으면, 아마 <곡성>과 같은 영화를 만든 감독의 이름을 대는 경우란 흔하지 않을 것이다. 오컬트의 축축한 공포와 밀항선의 피비린내를 찍던 그 감독의 취향이라기엔, 이 목록은 지나치게 밝고 지나치게 오락적이다. 이마무라 쇼헤이나 라스 폰 트리에의 작품들로 채워져 있을 것만 같은 자리에, 뜻밖에도 순도 높은 장르물이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어긋남이야말로 오늘의 주인공 나홍진이라는 감독을 여는 열쇠일지 모른다. 그의 영화는 언제나 두 개의 얼굴을 겹쳐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관객의 멱살을 쥐고 끌고 가는 질주하는 오락의 얼굴이고, 다른 하나는 그 질주의 끝에서 인간을 철저히 무력하게 만드는 서늘한 형이상학의 얼굴이다. <호프>에 이르러 전자의 얼굴이 마침내 전면에 드러났을 뿐, 그 두 얼굴은 <추격자> 때부터 늘 함께 있었다.
그렇다면 그 형이상학의 정체는 무엇인가. 나홍진은 메시지를 위한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다. 그의 영화가 거듭 응시하는 것은 단 하나, '이해할 수 없는 것 앞에 선 인간'이다. 인간은 의미를 찾도록 만들어진 존재여서, 이해할 수 없는 것 앞에서도 기어이 이유를 캐내려 든다. 그리고 나홍진의 영화는 그 캐냄이 끝내 인간을 구원하지 못하고 오히려 무력하게 만들거나 파멸시키는 자리를 집요하게 찍는다. 그의 네 편은 이 하나의 명제를 네 번 변주한 것이라 해도 좋다.

이 명제를 몸으로 짊어지는 인물이 매번 등장한다. 나는 그들을 '눈 뜬 장님'이라 부르고 싶다. 두 눈을 멀쩡히 뜨고 있으나 정작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의 정체를 가장 늦게 아는 자, 혹은 끝내 알지 못하는 자. 나홍진 세계의 주인공들이다. <추격자>의 중호가 그렇고, <황해>의 구남이 그렇고, <곡성>의 종구가 그렇고, <호프>의 범석마저 그렇다.
여기서 먼저 짚어둘 것이 있다. 이 눈먼 자는 유난히 자주 경찰이다. 중호는 전직 형사이고, 종구는 현직 형사이며, 범석은 파출소 소장이다. <황해>의 구남은 경찰은 아니지만, 구남을 저지하려다 동료에게 총을 쏴 버리는 경찰이 <황해>에 등장하기도 한다. 사회가 '아는 자', '사건을 풀고 질서를 되돌리는 자'의 역할로 지정해 둔 바로 그 직업이, 나홍진의 영화에서는 매번 가장 눈이 먼 자로 등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경찰은 이해와 해결을 제도적으로 약속하는 존재이고, 나홍진의 명제는 그 약속이 헛되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해를 팔아 사는 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로 세우는 것보다 더 독한 아이러니는 없다. 덧붙이자면, 평소 그토록 냉정하게 세계를 관찰하는 이 감독이 유독 경찰이라는 소재 앞에서만은 서늘함을 잃고 뜨거운 경멸을 흘린다는 인상마저 준다. 그 열기는 주제가 요구하는 것보다 얼마간 과하고, 그래서 확실히 눈에 띈다.
중요한 것은 이 눈먼 자가 네 편을 거치며 한자리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추격자>와 <황해>에서 무지는 아직 한 개인의 결함이다. 중호는 이미 붙잡아 앉혀둔 살인자를 앞에 두고도 그가 살인자인 줄 모른 채, 제 돈을 떼먹은 채무자의 행적이라는 형체 없는 것을 쫓다 미진을 잃는다. 구남은 제가 왜 쫓기는지조차 알려 하지 않은 채, 조선족이자 외부인이라는 열등감을 껴안고 죽는 순간까지 모르는 자로 남는다. 두 사람의 무지에는 대가가 따르고, 그 대가는 죽음이다. <추격자>에선 주인공 중호가 살리려던 존재 미진의 죽음이고, <황해>에 이르러선 주인공인 구남 자신의 죽음이다. 눈이 먼 자는 벌을 받는다. 아직까지 세계는 이해 가능한 곳이고, 다만 이 인물이 그것을 못 읽었을 뿐이라는 듯이.
그 판은 <곡성>에서 처음으로 뒤집힌다. 여기서 무지는 더 이상 종구 개인의 결함과 실패라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세계가 그에게 씌운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영화는 맨 앞에 누가복음 한 구절을 걸고 시작한다. 부활한 예수를 유령인 줄 알고 겁먹은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의심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만져 보라' 이르는 장면이다. 종구는 그 앞에 선 의심하는 도마다. 사람인지 귀신인지부터 알아야 믿겠다며 증거를 요구한다. 그러나 이 세계에서는 증거를 향한 그 충동이야말로 미끼다. 종구가 무너지는 것은 몰랐기 때문이 아니라 알려고 했기 때문이며, 애초에 이 세계는 알 수 없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그리고 <곡성>은 그 피해자를 어쩌면 죽음보다 깊은 곳까지 끌고 내려간다. 종구는 죽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제 손으로 온 가족을 잃고 그 폐허에 남겨진다. 차라리 죽는 편이 나았을 자리다. 이것이 결정적이다. <곡성>은 '당하는 인간', 곧 피해자라는 자리를 갈 수 있는 가장 밑바닥까지 밀어붙였다. 이보다 더 처참한 피해자는 만들 수 없다.

그렇다면 <곡성> 이후로 우리 앞에 나타난 <호프>는 어디로 갈 수 있는가. <곡성>의 종구의 고통보다 더 가는 방식은 불가능이자 무의미한 것처럼 보인다. 남은 방향은 하나, 인간이 선 자리 자체를 뒤집는 것이다. <호프>의 범석 역시 눈 뜬 장님이다. 대낮에, 모두가 괴물을 보는데도, 그는 제 등 뒤의 괴물을 끝내 보지 못하고 왜 나한테 총을 쏘냐고 따지기나 한다. 그러나 이번에 눈먼 자는 살아남는다. 그리고 바로 그 살아남음이 새로운 종류의 지옥이다. 이해하지 못한 채 살아남은 인간은 제가 무엇을 부수는지도 모르는 가해자가 되기 때문이다. <호프>는 극의 도중 외계인들에게 자막까지 달아 대사를 준다. 그 지점부터 외계인은 괴물이 아니라 가족이 있고 사회가 있는, 우리와 그리 다르지 않은 존재라는 지위를 얻는다. 그럼에도 인간은 그런 존재들에게 영문도 모른 채 총구를 겨눈다. <곡성>의 인간이 '왜 하필 나인가'를 묻는 피해자였다면, <호프>의 인간은 자신이 무엇을 파괴하는지조차 모르는 '무단의 가해자'다. 무력한 희생자의 자리에서 벗어난 대신, 이해하지 못하는 파괴자의 자리로 옮겨 앉은 것이다. 저항은 하되 구원받지 못하고, 살아남되 끝내 이해하지 못하는 자리로.
<곡성>과 <호프>는 그래서 한 쌍으로 읽힌다. 두 영화는 같은 형이상학을 공유한다. 이해할 수 없는 것 앞의 인간, 끝내 주어지지 않는 승리와 이해와 구원, 그리고 눈 뜬 장님. 다른 것은 오직 하나, 인간이 선 위치다. <곡성>은 그 몰이해에 파괴되는 피해자의 이야기이고, <호프>는 그 몰이해로 인해 파괴하는 가해자의 이야기다. 하나는 철저히 무너지고, 하나는 그럼에도 저항한다. 같은 어둠을 인간이 설 수 있는 두 자리에서 각각 찍은 것이다. 그래서 둘은 그저 닮은 두 편이 아니라, 한 관념을 반으로 접어 놓은 두 짝이 된다.
이 무력한 행렬의 끝에 한 사람의 예외가 서 있다. <호프>의 성기다. 물렁한 계획과 물렁한 생각으로 <호프>의 모두가 헤맬 때, 오직 그만이 제 분노를 남김없이 쏟아낸다. 경찰도 소총으로 무장한 순경도 백마를 타고 온 자도 판을 뒤집지 못할 때, 성기는 아무것도 이해하려 들지 않고 오직 제 직감과 분노만을 따른다. 영웅 후보들이 차례로 무력화되는 이 판에서 끝내 꺾이지 않는 유일한 변수가 그다. 그리고 그가 하필 이해를 포기한 자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이 세계에서 살아남는 길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를 그만두는 것이라는 듯이. (다만 성기가 정말 살아남은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쿠키영상 속의 그가 진짜 성기인지, 아니면 심장을 꺼내 운명을 바꾸라는 명령을 듣던 마베이요가 성기의 몸을 입고 돌아온 것인지, 영화는 끝내 알려 주지 않는다. 그러니 그의 생존조차 하나의 미결로 남는다.)
나홍진의 서늘함은 인물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는 관객과 눈먼 자 사이의 거리를 하나의 형식적 도구로 다룬다. 그리고 이 거리를 그는 정반대의 두 방식으로 운용해 왔다.

한쪽은 '극적 아이러니'다. 관객이 주인공보다 더 많이 아는 경우다. <추격자>에서 우리는 영민이 진짜 살인범이라는 사실을 일찌감치 안다. 정작 그것을 극중에서 가장 늦게 아는 사람이 주인공 중호다. 그래서 <추격자>가 관객에게 씌우는 것은 눈멂이 아니라 죄책감이다. 우리가 '내 물건 떼먹은 놈을 잡겠다'는 중호의 여정에 올라타는 순간, 미진은 '되찾아야 할 물건'의 자리에 놓이고, 관객 또한 미처 자각하지 못한 채 그녀를 그렇게 바라보게 된다. 눈이 먼 것이 아니라 알면서 공모하는 것이다. <황해> 역시 극적 아이러니의 편이지만, 그 정서는 죄책감이 아니라 연민에 가깝다. 관객에게는 습도와 냄새까지 만져질 만큼 선명한 저 세계가, 정작 그 한복판을 살아가는 구남에게는 끝까지 짙은 안개다. 우리는 그가 못 보는 것을 다 보면서, 그가 안개 속을 헤매는 것을 탄식의 감정으로 지켜본다.
다른 한쪽은 '공유된 눈멂'이다. 관객도 주인공과 똑같이 모르는 경우다. <곡성>에서 우리는 외지인이 정말 악마인지, 무명이 정말 선한 존재인지 끝까지 확정하지 못한다. 종구가 미끼를 물고 인과를 찾아 헤매듯, 관객 또한 기계적으로 인과를 찾는다. 혹 이 모든 일이 저 야생 버섯 탓은 아닐까 하고. 우리는 종구와 나란히 눈이 먼다. <호프>는 이것을 구조로까지 밀어붙인다. 괴물은 러닝타임이 정확히 한 시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우리 눈앞에, 그리고 범석의 눈앞에 등장한다. 그 한 시간 동안 우리는 눈 뜬 장님인 범석과 완전히 동기화된 채 그를 따라간다.
그리고 이 두 방식은 시간 순으로 갈린다. 초기의 두 편에서 나홍진은 우리를 '눈먼 자'보다 높은 자리에 세워 그를 내려다보게 했다. 후기의 두 편에서 그는 그 거리를 무너뜨리고 우리를 눈먼 자 자신으로 만든다. 눈먼 자를 지켜보게 하다가, 마침내 우리를 눈멀게 하는 것이다. 인물이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옮겨 가는 그 진화와, 관객이 구경꾼에서 당사자로 끌려 들어가는 이 진화는 정확히 같은 방향으로 흐른다.
이 모든 것을 실어 나르는 것이 나홍진의 두 번째 얼굴, 곧 질주하는 에너지다. 그의 영화가 관객을 놓아주지 않는 것은 사유의 밀도 이전에 1차원적인 감각의 밀도 때문이다. 차량이 사람을 들이받을 때의 육중한 타격감, 둔기가 살을 파고드는 무게감, 화면 어딘가에 늘 배어 있는 공기의 습도와 냄새. 이만큼 실감 나는 물성을 찍어내는 감독은 흔치 않다. 그러나 바로 이 대목에서 그의 미덕과 결함이 한 몸이라는 사실도 드러난다. 감각을 남김없이 밀어붙이는 그 밀도가 어느 순간에는 '정신없음'으로 기울어, 관객을 압도하는 동시에 지치게 만들기 때문이다. <황해>가 이따금씩 스스로 빚은 아수라장에 함께 휩쓸리는 것이 그 예다.
그런데 이 감각의 밀도가 어디서 오는가를 물으면, 흔히 나홍진의 로케이션을 떠올리게 된다. 망원동의 골목, 황해를 건너는 밀항선, 곡성의 습한 마을. 그는 실제의 공간에 집착하고, 그 물성에서 어마어마한 리얼리티를 길어 올려 관객을 붙들어 온 감독이다. 그러니 <호프> 앞에서 우리는 당황하게 된다. 이 영화는 정반대로 간다. 세월의 흔적 없이 매끈한 건물과 간판, 어느 시대 어느 나라인지 짐작하기 어려운 무국적의 공기, 이 시절의 어느 아저씨가 감탄사로 'holy shit'을 외칠 수 있었겠는가 싶은 어긋남. <호프>의 호포리는 그저 80년대의 스킨을 두른 가상세계에 가깝다. 거기에 외계인과 SF 스펙터클과 마블식 쿠키영상과 3부작의 예고까지 얹힌다. 나홍진에게서 가장 나홍진 같지 않은 외피다.
그러나 바로 이 어긋남이 그의 정수를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가장 유명한 도구였던 하이퍼리얼한 로케이션을 통째로 걷어냈는데도, 핵심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똑같은 눈 뜬 장님이 있고(범석), 똑같은 이해의 무력함이 있고, 승리도 이해도 구원도 끝내 주어지지 않는 결말이 있다. 그러니 나홍진의 상수는 애초에 로케이션이나 리얼리티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정수를 실어 나르던 수레였을 뿐, 정수 자체는 따로 있었다. 하나는 저 '모르는 자'이고, 다른 하나는 '감각의 에너지' 그 자체다. <호프>는 그것들을 실어 나르는 수레를 리얼리티에서 순수 스펙터클로 갈아 끼웠을 뿐이다. 앞의 세 편이 실제 공간의 물성을 통해 압도를 자아냈다면, <호프>는 그 물성 없이도 같은 압도를 만들어 낸다. 2시간 30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텐션을 놓지 않고 끌고 가는 그 뚝심은, 규모와 야심의 면에서 근래 한국영화가 도달한 가장 먼 지점 중 하나다.
게다가 정수는 그저 보존되기만 한 것이 아니다. <호프>에서 그것은 가장 멀리까지 갔다. 인간을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옮겨 앉힌 저 뒤집힘이야말로, 네 편을 통틀어 이 명제가 도달한 최전선이기 때문이다. 외피는 못 알아볼 만큼 바뀌었으나 정수는 그대로일 뿐 아니라 가장 앞까지 나아간 것이다.
물론 그 에너지에도 뒷면은 있다. 특히 <호프> 최후반부의 카체이싱은 시간적으로 지나치게 길고, 공간의 형태가 바뀌지 않는 탓에 이미지로도 같은 그림이 반복된다. 위기와 구원의 구도가 몇 번이고 되풀이되면서 각각의 감흥은 오히려 옅어진다. 위기가 거듭 등장하는데도 그것이 더 이상 변수로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서스펜스의 정수이자 한계는 99도라는 제한선에 있다. 서스펜스는 100도에 닿는 순간 서스펜스이기를 그친다. <황해>의 '정신없음'이 그러했듯, 같은 엔진이 관객을 압도하는 동시에 지치게 만든다. 미덕과 결함은 끝내 한 몸이다.
그러니 나홍진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려는 유혹은 늘 위험하다. 특히 <호프>가 <곡성>의 염세를 뒤집어 마침내 (제목과 같이) 희망을 말한다는 식의 요약은, 지나치게 깔끔하기에 더욱 켕긴다. <호프>의 인간은 여전히 구원받지 못한다. 그는 다만 피해자의 자리에서 벗어나, 자신이 무엇을 부수는지도 모르는 가해자의 자리로 옮겨 앉았을 뿐이다. 그편이 낙관보다 훨씬 얄궂고, 어쩌면 훨씬 서늘하다.
결국 나홍진의 영화가 하는 일은 하나다. 가장 질주하는 오락의 형식을 빌려, 가장 서늘한 형이상학을 관객의 몸에 새기는 것. 우리는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려는 시도가 곧 덫이며, 그 몰이해는 끝내 우리를 파괴자로 만든다. 이것을 그는 설교하지 않는다. 다만 눈 뜬 장님을 앞세워 우리를 그의 곁에 세우고, 마침내 우리마저 눈멀게 함으로써 겪게 한다.
하나의 열린 질문으로 끝내고 싶다. <호프>의 그 서늘한 착상, 인간이 영문도 모른 채 가해자로 강등되는 그 결말은, 이 영화가 단 한 편으로 닫힌 세계일 때에만 온전한 진술로 선다. 그러나 마블식 쿠키영상이 노골적으로 예고하듯 이 영화는 다음 이야기를 예비하고 있고, 감독은 무려 3부작을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다음 이야기가 '인간의 반격'이나 '이해'로 향하는 순간, 완결된 비극은 한낱 막과 막 사이의 전환으로 주저앉을 것이다. 그러니 이 결말의 서늘함이 그대로 지켜질지는, 얄궂게도 이 영화에 관객이 덜 드는 데 달려 있는지도 모른다. <호프>의 표가 팔리고 극장이 차서 2편에 청신호가 켜지는 순간, 인간이 가해자가 되던 그 자리는 다음 편을 위한 밑그림으로 물러앉고 말 테니까. 눈 뜬 장님의 영화가 이번에는 우리에게, 그 결말을 어떻게 지켜볼 것이냐고 되묻고 있는 셈이다. 나홍진의 힘은 처음부터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않는 데 있었다. 그러니 이 완결된 비극을 지키는 마지막 방법은, <호프: Part 2>에서마저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않기를 바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