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한 글을 지면으로 옮겼습니다.

1929년, 자신의 첫 연출작 <안달루시아의 개>를 처음 선보이던 밤, 감독은 주머니를 돌멩이로 가득 채운 채 극장에 들어섰다. 관객이 격분해 스크린으로 달려들면 그에 맞서 던질 작정이었다. 그러나 상영이 끝나고 돌아온 것은 야유가 아니라 박수갈채였고, 그는 자신을 향한 호평 앞에서 오히려 당황했다. 그리고 실망했다.
그가 준비한 돌멩이가 쓸모를 찾은 것은 이듬해 다른 극장에서였다. 1930년 12월 3일, 그의 두 번째 연출작 <황금시대>가 상영되던 '파리 스튜디오 28'에 극우 청년들이 들이닥친 것이다. 스크린엔 보라색 잉크가 끼얹어지고 객석엔 악취탄이 터졌으며, 성난 무리는 로비로 몰려가 벽에 걸린 달리와 미로의 그림을 칼로 그었다. 경찰은 곧 상영을 금지하고 필름을 압수했고, 영화는 이후 반세기 가까이 어둠 속에 묻혔다.
그런데 그날 밤 관객이 보여 준 광포함은, 실은 영화가 맨 처음 장면에서 이미 그려 보인 것이었다. <황금시대>는 전갈을 들여다보는 한 편의 자연 다큐멘터리로 문을 연다. 집게와 감춰진 독을 지닌 채, 제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면 무엇에게든 달려드는 짐승. 카메라가 그 작은 맹수를 한참 응시하는 동안, 화면은 인간의 점잖은 예의 밑에도 저 독이 그대로 잠들어 있음을 넌지시 일러 준다. 그러니 애국과 신앙을 외치며 그림을 찢던 그날의 관객이야말로, 스크린 속 어떤 장면보다도 정확하게 전갈의 정체를 증명한 모양새가 된 셈이다. 영화가 예고한 짐승은 스크린이 아니라 객석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오늘의 주인공 루이스 부뉴엘이 이 영화로 하려던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소동은 그곳에서만의 예외적인 소동이 아니었다. 부뉴엘은 이후 반세기 동안 가는 곳마다 비슷한 파문을 일으켰고, 그럴 때마다 그가 겨눈 표적은 늘 정해져 있었다. 영화의 관습, 신이 아니라 권위와 교조로 쌓아 올린 종교라는 체제, 그리고 부르주아. 스페인에서 초현실주의의 폭탄을 던지고, 멕시코로 건너가 빈민가 아이들의 밑바닥을 찍고, 다시 성자의 우화와 우아한 부르주아 희극을 만드는 동안 나라도 장르도 쉼 없이 바뀌었지만, 그 중심에 놓인 태도만은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평생을 반골로 살았고, 전복과 조롱이야말로 부뉴엘이라는 이름의 정수였다.
그런데 그토록 요란한 조롱을 쏟아 낸 사람의 삶은 정작 놀라우리만치 조용했다. 스페인 시골의 부유한 지주 집안에서 태어나 예수회 학교에서 여덟 해를 보낸 그는, 훗날 가장 집요하게 물어뜯을 바로 그 부르주아와 교회의 산물이기도 했다. 성인이 되어서는 한 여자, 잔 뤼카와 반세기를 해로하며 완고하고 금욕에 가까운 규칙 속에서 늙어 갔다. 화면을 페티시와 신성모독과 살인으로 채운 남자가, 집에서는 누구보다 평범한 가장이었던 것이다. "신께 감사하게도, 나는 무신론자다." 그가 남긴 이 유명한 말은 그 태도를 한 문장에 압축한다. 경건의 언어를 빌려 경건을 비웃는 말이지만, 동시에 신이라는 존재만은 자신조차 간단히 지워 버릴 수 없다고 실토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의 영화 속 난장은 방탕한 자의 고백이라기보다, 오래 억눌린 자의 반동에 가깝게 읽힌다. 하지 말라는 말을 너무 많이 들은 아이가 제 본래 성향보다 더 위악적으로 엇나가듯, 어린 시절 내내 죄와 금기의 언어에 길들여진 그는 예술이라는 허락된 자리에서만 그 억압을 향해 마음껏 소리쳤다. 그의 진심은 어쩌면 '이 억누름이 싫다, 자유롭고 싶다'는 단순한 외침이었고, 영화는 그것을 성(性)으로, 신성모독으로, 뒤엎기로 한껏 과장한 무대였다. 그리고 그 과장을 실어 나르는 도구, 그의 조롱이 번번이 딛고 선 형식은 언제나 하나였다. '무언가를 하려다 끝내 완수하지 못하는 인간.'

그 형상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선명하게 새겨진 것도 <황금시대>다. 다시 그 첫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공격과 탐지를 겸하는 집게, 꼬리 끝에 감춘 독, 어둠을 향한 편애, 제 고독을 침범하는 자를 향한 적의. 이 짧은 자연 관찰이 끝나면 화면은 곧장 인간의 세계로 넘어오는데, 그래서 앞서 나열된 전갈의 목록은 고스란히 그 세계의 초상이 된다. 로마가 서고 제국의 의식이 거행되지만, 그 근엄함은 해골이 된 주교들에게 올리는 우스꽝스러운 인사 위에, 그리고 죽음과 부패의 자리 위에 세워진 것이다. 그 세계에서 영화를 누리는 자들의 모습은 또 어떠했는가. 연회장에서 하녀가 불타 죽어도, 아비가 제 아들을 쏘아 죽여도, 손님들의 표정은 잠깐의 궁금증 이상으로 흔들리지 않는다. '문명'이란 본능 위에 덧씌운 얇고 위태로운 표면이며, 그 표면은 언제나 벗겨질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문명이라는 그 얇은 표면 아래에서, 인간의 행위는 무엇 하나 온전히 완성되지 못한다. 말하자면 이 '완강한 미완'이야말로 부뉴엘의 방법이다. <황금시대>만 해도, 사실 러닝타임 전체에서 완수되는 행위는 '전갈의 침' 하나뿐이다. 연인은 서로에게 닿으려다 번번이 떼어지고, 제국의 의식은 조롱 속에 무너지며, 그 무엇도 온전한 결말에 다다르지 못한다. 인간의 손이 무언가를 완성하는 순간은 오직 그것을 부술 때뿐이어서, 이 영화에서도 폭력만이 제 몫을 온전히 치른다. 그리고 이 방식은 이후 부뉴엘의 영화 인생 반세기 동안 조금도 바뀌지 않는다. 부뉴엘은 늘 표적이 가장 간절히 원하는 행위를 골라, 그것이 끝맺어지지 못하도록 붙든다. 밥을 먹는 일이든, 방을 나가는 일이든, 신에게 다가가는 일이든. 그에게 조롱이란, 무언가를 영영 미완으로 묶어 두는 기술이었다.

부뉴엘이 가장 먼저 엎은 것은 영화 그 자체의 관습이었다. 행위가 좌초되기 이전에, 그는 이야기부터 좌초시켰다. 데뷔작 <안달루시아의 개>에서 그가 한 일이 바로 그것이다. 면도날이 눈알을 가르고, 손바닥에서 개미가 기어 나오고, '8년 후'라거나 '16년 전'이라는 자막이 뜬다. 자막은 관객에게 서사를 약속하지만, 정작 그 앞뒤로는 어떤 인과도 맥락도 없다. 이야기를 따라가려던 사람은 매번 빈손으로 남는다. 흥미로운 것은 그럼에도 이 영화의 이미지들이 여전히 충격적이라는 사실이다. 대개 한 장면이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앞선 숏들이 논리라는 상식 위에 차곡차곡 쌓여 온 결과다. 그런데 <안달루시아의 개>는 그 축적을 통째로 벗어던지고서도 장면 하나하나의 개성만으로 우리를 당혹시킨다. 아무것도 쌓지 않은 이미지들이 어떻게 스크린을 가득 채울 수 있는지, 이 짧은 영화는 증명한다. 관습을 조롱하는 그의 첫 번째 방식은, 이렇게 끝내 완성되기를 거부하는 이야기 그 자체였다.
그가 다음으로 겨눈 것은 종교였다. 그래 '종교'다. '신'이 아니라, 신의 이름으로 세워진 체제. 그리고 조롱의 방식은 여기서도 같았다. 부뉴엘의 인간은 신에게 끝내 도착하지 못한다. <나자린>의 가난한 신부 나자리오는 예수의 길을 그대로 밟는 듯 보인다. 가진 것 없는 그의 옷과 음식을 마을 사람들이 훔쳐 가도 불평하지 않고, 살인을 저지른 여자를 제 본분대로 거두어 주며, 전염병이 창궐한 도시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 손 닿는 곳마다 돕는다. 저항하는 이들을 두고 순순히 체포에 응하는 모습조차 예수를 닮았다. 그러나 나자리오는 예수가 아니다. 그를 구세주라 여기는 자들을 영화는 접신한 광신도의 눈으로 포착하고, 연모를 경외로 착각하는 한 여인의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영화는 부활로 끝나지 않는다. 사슬에 묶여 끌려가는 것까지가 그의 이야기다. 흠 없어 보이는 한 인간조차 신적인 모습으로 비상하지 않고 끝내 인간으로서만 남을 수밖에 없다는 것, 그 자리에서 부뉴엘의 냉정한 성서는 완성된다.
<나자린>으로부터 6년 뒤의 작품인 <사막의 시몬>은 그 반대편에서 같은 말을 한다. 시몬은 6년 6주 6일 동안 기둥 위에 서서 신에게 다가가려는 고행자다. 하필 그 날수가 짐승의 숫자 666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사람들은 그의 발에 입 맞추고 옷자락을 떼어 가며, 그가 잘린 손을 붙이는 기적을 실제로 행하기까지 하자 모두들 놀란다. 그러나 그 놀라운 광경을 다 같이 목격하고도, 사람들은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각자의 일상으로 흩어진다. 하지만 이 시몬이라는 인물은 암송을 이어 가다 어떻게 끝맺는지를 잊고,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해가 지기 전엔 아무것도 먹지 않겠다 다짐하며, 주의 부름을 받을 때까지 한 쪽 다리로만 서 있겠다고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한다. 스스로 짊어진 십자가에 스스로 짓눌리는 이 우스꽝스러움 앞에서, 신에게 닿겠다는 것은 고작 인간의 치기처럼 보인다. 마침내 그를 유혹하는 여인이 시공을 건너뛰어 그를 데려간 곳은 현대의 시끄러운 클럽이고, 기둥 위에서 존경받던 그는 그곳에서 무력한 찌꺼기처럼 앉아 있다. 상승의 끝은 이렇게 추락이다.
Christ shaving in _La Vía Láctea_ by Buñuel.jpg

나자리오와 시몬을 통해 부뉴엘이 응시한 것은 '신이고 싶은 인간'이다. 그리고 <사막의 시몬>으로부터 4년을 또 지난 <은하수>에 이르면 그 실패는 개별 인간의 한계를 넘어 '믿음 그 자체'의 문제로 넓어진다. 산티아고로 향하는 두 순례자가 지나는 길목마다, 부뉴엘은 신앙이 끝내 매듭지어지지 못하는 장면들을 늘어놓는다. 한 식당에서는 동네 반장과 신부가 성체를 두고 논쟁을 벌인다. 빵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이 되느냐는 물음에 신부는 '화체설'로 답하다가, 곧 말이 궁해지자 "그렇게 느껴진다"며 감각의 언어로 달아나고, 급기야 반장의 얼굴에 커피를 끼얹는다. 뒤이어 들이닥친 병원 직원들에 의해, 그가 정신병원을 탈출한 전직 신부였음이 드러난다. 믿음이 이성으로도 감각으로도 끝내 봉합되지 못하는 광경을, 부뉴엘은 이렇게 한 편의 코미디로 펼쳐 보인다. 영화의 마지막에선 예수는 맹인들의 눈을 고쳐 주지만, 정작 그들은 여전히 지팡이로 앞을 더듬는다. 한 사람은 장애물을 넘고, 다른 한 사람은 끝내 넘지 못한다. 기적이 정말 일어났는지를 두고 부뉴엘은 판단을 미룬다. 그가 관심을 두는 것은 오히려 다음과 같다. 설령 신이 기적을 행했더라도,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것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사실. 눈앞에서 벌어진 사건 하나조차 이렇게 해석이 갈리는데, 2000년 동안 끝없이 갈라져 온 교리의 해석이란 대체 무엇을 매듭지을 수 있었겠는가.
바로 여기서 '신께 감사하게도 무신론자'라던 그 농담의 진짜 무게가 드러난다. 실제로 부뉴엘은 훗날 이 유명한 한마디를 두고 그저 우연히 나온 낡은 말이라며 시들해했고, 자신이 벗어나야 할 것은 신이 아니라 죄책감이라고 고쳐 말했다. 신은 인간 안에서 찾아야 한다고도 했다. 그러니 그를 단순한 무신론자로 부르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그가 겨눈 것은 신이 아니라, 신의 이름으로 지어 올린 교조와 권위였기 때문이다. <은하수>에서 검은 옷을 입고 나타나 알 수 없는 말을 흘리고는 사라지는 남자의 문장들은, 실은 성경의 구절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 "더 이상 자비는 없다" 같은 말이 은총이나 믿음이라는 완충재 없이 그대로 던져질 때, 성경의 언어는 비유가 아니라 분배의 법칙이자 소속의 박탈이자 자비의 중단이라는 냉혹한 공식처럼 들리지 않던가. 교리를 두고 벌어진 전직 신부와 백작의 설전이 결투로까지 번졌다가 어느새 어깨동무로 끝나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대립은 치열했으나, 권위의 언어를 쓰는 자들이라는 공통점 속에서 그들은 너무도 쉽게 하나가 된다. 반면 예수는 이 영화에서 근엄한 형상이 아니라 웃고 기침하며 현대적인 속도로 말하는 존재로 등장하는데, 신성함을 걷어 낸 그 자리에서 오히려 이상하리만치 생생해진다. 부뉴엘이 끝내 견디지 못하는 것은 신성 자체가 아니라 '권위에서 출발한 근엄한' 신성이며, 그래서 그의 영화에서 치장을 벗은 기적은 오히려 더 신비롭고 진실하게 다가온다.
<비리디아나>는 '신이고 싶은 인간'의 오만을 가장 잔혹하게 보여준다. 수녀 비리디아나는 속세로 내려와 낮은 자들에게 먹을 것과 일을 주고, 주의 이름으로 그들을 바꾸어 보려 한다. 그러나 그녀가 잠시 자리를 비우자 부랑자들은 저택을 헤집어 놓고, '최후의 만찬'을 그대로 본뜬 구도 속에서 그것과 정반대인 게걸스러운 파티를 벌인다. 모든 낮은 자가 선한 것도, 욕망이 없는 것도 아니다. 한낱 인간이 신의 권능을 대신 행하려는 것은 오만이며, 영화가 겨누는 것도 바로 그 선입견과 오만이다. 면류관은 불 속에 던져지고, 성(聖)을 전하려던 그녀 역시 속(俗)의 한복판으로 떨어진다.
Womens of Luis Bunuel - Stéphane Audran (The Discreet Charm of the Bourgeoisie) http___mubi_com_cast_members_71.jpg

부뉴엘의 세 번째 표적은 부르주아였다. 여기서 그 미완의 형식은 가장 단순한 행위마저 붙든다. 이를테면 방을 나가는 일 말이다. <절멸의 천사>의 부르주아들은 만찬이 끝난 뒤 저택의 한 방을 나가지 못한다. 문은 열려 있고 그들을 붙드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이상하게도 그들은 나가려는 적극적인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지진을 앞두고 먼저 달아나는 짐승들처럼 하인들이 저택을 빠져나간 뒤, 귀족들만 남은 방은 그들의 밑낯을 서서히 드러낸다. 불편한 정장을 벗은 이를 흉보던 사람이 곧 "저이의 무례를 좀 덜어 주자"며 따라 벗는 장면에서, 위선은 더없이 선명해진다. 이 저택의 이름이 '신의 섭리'라는 것은, 감독의 성향을 안다면 명백한 조롱이다. 영화는 끝내 성당에 갇히는 신자들의 모습으로 닫힌다. 나가지 못하는 사람들. 열린 문 앞에서 아무도 걸어 나가지 않는 이 상황이야말로, '완성되지 않는 행위'가 도달한 가장 순수한 형태다.
그리고 부뉴엘은 이 미완의 감각을 하나의 완벽한 희극으로 벼려 낸다. 그의 최고작으로 필자가 꼽는,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의 여섯 사람은 그저 함께 저녁을 먹으려 할 뿐이다. 그러나 그 소박한 행위는 번번이 가로막힌다. 초대받아 간 집의 안주인은 약속을 내일로 알고 있고, 찾아간 레스토랑에서는 한구석에서 사장의 시신을 두고 우는 직원들과 마주치며, 기동훈련을 나온 군인들이 들이닥치고, 마침내 경찰이 그들을 체포해 간다. 재미있는 것은 이 여섯이 끝까지 품위를 잃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은 "우리 식사가 자꾸 방해받는군요" 같은 말조차 하지 않고, 그저 꼿꼿하게 다시 식탁을 향해 걸어간다. 영화 곳곳에서 아무 목적지도 없이 시골길을 나란히 걸어가는 그들의 모습은 쳇바퀴를 도는 햄스터처럼 관성적이고, 그래서 끝내 폭소를 자아낸다.
주목할 것은 부뉴엘이 이들을 끝까지 죽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영화를 분풀이의 수단으로 쓰는 손쉽고 저열한 방식일 테니까. 대신 그는 영화라는 매체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즉 꿈 속에 꿈을 겹치는 초현실의 구조 속에 그들을 가두어 끝까지 조롱의 대상으로 남겨 둔다. 접시에 놓인 고기가 무대의 소품이었다는 꿈, 만찬 자리에서 총에 맞는 꿈, 식탁 밑으로 기어들어 가 고기를 뜯다 발각되는 꿈. 그들이 그토록 원하는 식사는 꿈속에서조차 완성되지 않는다.

그리고 <자유의 환영>에 이르면, 그 미완은 아예 영화의 구조 그 자체가 된다.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지만, 어떤 줄기도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는다. 딸이 받아 온 '음란한' 사진들은 알고 보면 아름다운 랜드마크 엽서이고, 어느 저택에서는 사람들이 변기에 둘러앉아 대화를 나누다 밥은 혼자 골방에서 먹으며, 눈앞에 멀쩡히 있는 딸을 두고 어른들은 '실종된 딸'을 찾아 헤맨다. 무엇이 상식이고 무엇이 외설인지, 무엇이 공적이고 무엇이 사적인지.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던 질서가 이 영화에서는 아무 근거 없이 뒤집힌다. 그리고 영화는 나폴레옹 점령기인 1808년의 총살로 열려, 200년을 건너뛴 동물원의 총살로 닫힌다.

영화의 관습, 교회, 부르주아. 지금까지 그가 겨눈 것들은 모두 그의 바깥에 있는 것, 멀찍이서 겨냥할 수 있는 표적이었다. 그러나 욕망만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그 자신의 것이다. 그래서 욕망 앞에서 부뉴엘이 행위를 끝맺지 못하게 할 때, 그것은 더 이상 누군가를 향한 조롱이 아니라 제 안의 허기를 그대로 드러내는 고백에 가까운 듯 보인다. 앞서 벗겨진 문명의 표면 아래 유일하게 살아 있던 것도 결국 두 연인의 욕망이었다. 여자는 조각상의 발가락을 빨고, 남자는 광고 이미지 앞에서 달아오른다. 사회는 이 욕망에 공포로 응답하여 관료와 성직자와 전화와 교양을 총동원해 둘을 떼어 놓는다. 그러나 부뉴엘의 냉정함은 제도 바깥까지 나아간다. 사랑을 무너뜨리는 것은 바깥의 방해만이 아니다. 여자는 이내 다른 남자에게로 옮겨 가고, 욕망은 대상을 갈아 치우는 변덕스러운 힘이어서 성취되는 순간 스스로이기를 그친다. 그래서 이 사랑이 끝끝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야말로, 이 영화의 유일한 진심이다.
대상을 쥐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빠져나가 버리는 이 욕망의 미끄러짐은, 1967년작 <세브린느>에서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마저 지우는 형태로 제시된다. 세브린느는 아름다운 외모와 잘나가는 의사 남편을 가진, 겉으로는 결핍이라곤 없어 보이는 여자다. 그러나 그녀의 안에는 어린 시절의 상처와 억눌린 충동이 웅크리고 있어, 낮의 매음굴과, 채찍과 진흙이 날아드는 피학적 환상 속에서만 그것은 겨우 제 모습을 드러낸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면 우리는 오프닝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별생각 없이 세브린느의 망상으로 넘겨 버렸던 그 첫 장면이, 실은 그녀의 비밀을 알게 된 남편이 내린 현실의 벌은 아니었을까. 어디까지가 환상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가. 부뉴엘은 끝내 답을 주지 않는데, 사실 그 물음 자체가 요점이 아닐지도 모른다. 욕망이 찾아오는 순간은, 그것이 현실인지 상상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은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뉴엘은 유작 <욕망의 모호한 대상>에서 이 미끄러짐을 아예 캐스팅으로 못 박는다. 마티유가 애타게 원하는 여자 콘치타를, 두 명의 배우가 2인 1역으로 번갈아 연기하는 것이다. 그가 환각처럼 이끌리는 대상은 그 얼굴조차 하나로 정해지지 않는다. 욕망은 언제나 '어떤 것'을 향하지만, 그 '어떤 것'은 손이 닿는 순간 형상을 잃는다. 발가락과 진흙과 두 얼굴의 여자로 이어지는 이 과장된 욕망의 목록은, 죄와 금기의 언어 속에서 자란 한 남자가 스크린 위에서만 허락한 가장 은밀한 반란이었는지도 모른다.

부뉴엘의 세계에서 끝까지 완수되는 행위는 그저 파괴뿐이라고 나는 앞서 적었다. <욕망의 모호한 대상>은 폭발로 끝난다. 끝내 소유할 수 없었던 여자, 그 이야기의 유일한 결말은 절멸이다. <자유의 환영>에서 반복되던 총살도, <비리디아나>와 <절멸의 천사>의 파국도 마찬가지다. 부뉴엘에게 '완성'은 만족의 얼굴이 아니라 소멸의 얼굴로만 찾아온다. <황금시대>의 첫 장면에서 전갈이 감추고 있던 독은, 처음부터 이 마지막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니 부뉴엘의 영화를 보고 나면 이상한 허기가 남는다. 그의 인물들은 밥을 먹지 못하고, 방을 나가지 못하고, 사랑하는 이의 몸에 닿지 못한다. 그러나 그 미완은 무능이 아니라 정직이다. 문명이 본능 위에 덧씌운 얇은 표면인 한, 식욕도 성욕도 신을 향한 갈망도 언제나 마지막 한 입, 마지막 한 걸음을 남긴 채 멈춘다. 예의와 의식과 교리는 그 마지막 한 걸음 앞에서 어김없이 우리를 멈춰 세운다. 폭력을 통하지 않고서는. 제 안의 짐승을 부정하고 스스로를 고결한 존재라고 믿고 싶었던 인류에게, 자유나 이성 같은 숭고한 단어들은 어쩌면 그 폭력을 가리기 위한 그럴듯한 가면이었는지도 모른다. 인간이 쌓아 온 규범과 상식과 문화가 실은 얼마나 위태로운 것인지, 그의 영화들은 조용히 되묻는다.
그러나 부뉴엘은 비관하지도 냉소하지도 않는다. 그는 다만 <황금시대>의 첫 장면에서 전갈을 들여다보았듯, 인간이라는 종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한 사람의 곤충학자에 가깝다. 스크린 안에 그 모든 소란을 풀어놓은 그 자신이 정작 한 여자의 곁에서 조용하고 규칙적으로 늙어 간 완고한 부르주아였다는 사실은, 어쩌면 우연이 아니다. 제 안의 짐승을 우리 밖으로 꺼내지 않는 자만이, 그것을 그토록 오래 그토록 차갑게 응시할 수 있다. 신께 감사하게도 무신론자라던 그의 농담이 끝내 진담처럼 들리는 것도 그래서다. 그는 아무것도 믿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길들인 모든 것을 끝까지 의심하고 조롱함으로써만 겨우 그것들과 마주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