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자린>에 첫 등장하는 공간은 낙후된 마을이며, 이제야 전기 설비 등 문명의 손이 닿으려는 공간이다. 그 낙후된 마을에 영화의 주인공 나자리오 신부가 살고 있다. 가난한 마을의 주민들 중에서도 더 가난해 보이는 그의 삶. 모두가 가난한 공간에서도 남보다 더 가지려는 본성이 인간에게 있는 것일까. 주민들은 특별한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까닭에 재물을 쌓아두지 않는 신부의 특성을 알면서도 그의 옷이며 그의 음식을 훔쳐가곤 한다. 그럼에도 불평이나 신고를 하지 않는 신부는 허름한 여관을 자신의 거처로 삼으면서도 이것이 자신의 사명이라 믿는 듯 자신의 동형반복의 삶을 이어나간다. 그러던 그의 삶에 변수처럼 침입한 (사람을 죽인) 한 화류계의 여성을 자신의 '본분'대로 대해주면서 그의 삶은 예상치 못한 사건들을 겪는다.
상수와도 같은 나자리오 신부의 인생에 인간, 사건 등의 변수들이 개입한다. 살인의 죄를 옹호하지 않지만 거처를 구하는 한 인간은 보호해 주는 나자리오 신부는 판사에겐 그 여성과의 부적절한 관계를 의심받는다. 공사 현장을 보고서 스스로 노동을 자원하지만 한 입이라도 줄이려는 그곳의 '박힌 돌'들의 텃세로 인해 쫓겨나기도 한다. 전염병이 창궐한 도시에 제발로 들어가 손이 닿아야 할 곳엔 어디든 도움을 주려 하지만, 사경을 헤메는 여성에겐 쫓겨나고 나자리오를 따라 온 마을의 여인 베아트리스의 연인 핀토는 그를 자신의 연인을 빼앗은 '신성한 체 하는' 위선자로 여기며 증오한다.
나자리오는 겸손한 자세로 세상을 섬기려 하지만, 한편에선 그를 위선자로 여기며, 또 한편에선 그를 '구세주'라 여긴다. 말하자면 전자의 내용까지는 예수의 일생과 같지만, 근본적으로 이 영화의 핵심은 후자에 있다. <나자린>은 예수의 생애를 따라간다. 주위의 인물이 저항하지만 자신은 순순히 체포를 따르는 모습조차 예수를 연상케 한다. 그렇지만 나자리오는 예수가 아니다. 나자리오가 예수였다면 그를 구세주라 여기는 자들을 '접신한 광신도'의 시선으로 포착하지 않았을 것이며, 또한 연모를 경외로 착각하는 베아트리스의 순간을 담지 않았을 것이다. 부뉴엘은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없는 흠 없는 자를 주인공으로 만들었지만, 신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그의 한계가 있음을 명백히 나타내고 있다. 그 한계가 그의 의도가 아니었음에도 말이다. 그렇기에 <나자린>은 나자리오의 부활로 끝나지 않는다. 체포되어 끌려가는 것까지가 이 영화의 이야기다.
<나자린>은 신실한 인간의 이상을 담아내는 동시에 신이 아닌 인간의 한계를 담아낸 영화이자, 사랑과 복종의 정신을 위배했다며 나자리오 신부를 되려 꾸짖는 행태를 보이는 가톨릭 신부와 집단의 무지함을 폭로하는 영화이기도 한다. 집단에 속하는 것이 천국으로 향하는 길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