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날>에서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는 건 날카롭다시피 한 극적인 조명의 사용이다. 드레이어 특유의 실내 공간과 묵직한 조명은 관객에게 자연스레 폐쇄감을 안겨주며, 단순한 카메라워크와 절제된 조명만으로 강렬한 공간감과 입체감을 구현해내는 솜씨는 고전 걸작의 우아함을 온전히 느끼게 한다. 이러한 작품을 접하면 기술의 발전이 반드시 영화의 예술적 깊이를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드레이어는 이 영화를 통해 당시부터 지금까지 이어질 법한 기독교의 허례허식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누군가의 믿음을 위해 왜 늘 제물이 필요한지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을 던진다. 전통적 기독교를 상징하는 압사론은 그 위선의 화신이다. 그는 안나를 소유하기 위해 그녀의 어머니를 구해주는 척하며 결국 그녀를 차지했지만, 자신의 사회적 위신만을 좇아 '점잖은' 결혼 생활에만 집착한다. 압사론이 진정으로 괴로워하는 순간은 죄 없는 헤르로프스를 처형한 죄책감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고발을 듣고도 침묵했던 '자신'의 행동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라는 점은 그가 자기 의로움에 얼마나 도취된 인물인지를 보여준다.
마녀사냥의 희생양이 된 헤르로프스는 노쇠한 몸으로 극심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거짓 자백을 하는데, 이 장면의 카메라워크는 극도로 효과적이다. 처음에는 고문실 한쪽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만으로 긴장감을 조성하다가, 천천히 좌패닝하는 카메라가 공간 전체를 훑으며 쓰러진 그녀의 모습에 도달할 때, 그곳에 그녀의 편은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과 일대다 구도에서 비롯되는 권력의 비대칭성은 한 숏만으로도 숨 막히는 압도감을 선사한다. 고문실에서 자신을 냉혹하게 내려다보던 목사에게 헤르로프스가 내린 저주는, 후에 그 목사가 사경을 헤매는 장면에서 압살론이 찾아왔을 때 고문실 장면과 동일한 카메라 무빙으로 방구석에 누워있는 목사를 비추며 시각적 반복을 통해 저주의 효력이 실제로 나타났음을 암시한다.
안나와 마틴이 자작나무 아래서 은밀한 시간을 보내는 장면은 어두운 밤임에도 이상하게 밝은 낮처럼 그려지는 반면, 집 안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압사론의 공간은 어둠에 잠겨 실내외의 대비를 통해 영화 전체의 주제를 시각적으로 강화한다. 순진해 보이던 안나는 어머니의 진실을 듣는 순간부터 섬뜩하게 변모한다. "죽이고 싶은 자를 죽일 수 있는 능력이 정말 어머니에게 있었나요?"라고 물으며 자신에게도 그런 능력이 있을지 모른다는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내는 장면은 소름 돋는 공포를 자아낸다. 시어머니의 제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집안을 소란스럽게 만들며, 목사의 가정에 시집와 강요받던 조용하고 엄숙한 생활에 대한 반발심을 드러낸다. 시어머니에게 거짓말을 하고 압사론을 맞이하는 뻔뻔함, 불륜을 당당히 인정하고 압사론에게 저주를 퍼부어 죽음에 이르게 한 뒤 마틴 앞에서 '우리의 사랑'을 지키려 했다고 역설하는 그녀의 폭주는 연기인지 진심인지 구분할 수 없어 더욱 불안감을 증폭시킨다.
헤르로프스와 안나를 마녀로 볼 정황은 분명 존재하며, 압사론의 어머니가 마녀로 고발하자 안나는 자포자기하듯 자신이 마녀임을 시인한다. 하지만 헤르로프스의 경우는 모호한 반면, 안나는 남편의 아들이라는 사실조차 중요하지 않을 만큼 '진정한 사랑'에 목말랐던 희생양으로 보인다. 압사론이 진정한 사랑을 주었다면 그녀는 파멸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마녀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마녀로 만들어진 것이다. 할머니가 안나를 고발하자마자 태도를 바꿔 지지를 거두는 마틴의 모습은 안나를 더욱 절망으로 밀어 넣으며, 결국 그녀를 마녀로 만든 것은 그녀를 둘러싼 세상 그 자체였음을 영화는 명확히 보여준다.
이 영화에는 역사에 길이 남을 두 배우의 명연기가 빛난다. 헤르로프스 역의 안나 스비에르키에르(Anna Svierkier)와 안나 역의 리스베트 모빈(Lisbeth Movin)이 그들이다. 1872년생인 안나 스비에르키에르는 눈물로 자비를 구하는 모습과 압사론에게 분노를 터뜨리는 상반된 연기를 투혼에 가깝게 소화해냈다. 순진한 피해자에서 점차 광기를 드러내는 안나를 탁월하게 연기한 리스베트 모빈은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받기에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