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하고도 더 지난 과거에 한 번 본 영화였고, 이번에 에무시네마에서 다시 보게 되었다. 마치 동방에서 영화를 보는 듯한 관람 환경은 누군가에겐 매력일 수도, 누군가에겐 곤욕일 수도 있겠지만 나처럼 불안이 가득한 사람에겐 일면식도 없는 양옆의 사람들과 좁디좁은 좌석에 끼어 조용히 있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키아로스타미의 기획전이었으니, 다녀온 것에 대해 후회는 없었다.
영화의 소재는 매혹적이다. 복제품에 대해 신선하고도 긍정적인 시각을 제시하는 책을 집필한 남성 제임스, 그리고 골동품을 판매하며 그의 사상에 매료된 팬 엘르. 두 사람이 하루 동안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이 영화는 표면적으로는 팬미팅이자 데이트에 가깝다. 영화의 초반만 놓고 보면 두 사람은 분명 처음 만난 사이다. 엘르는 그저 그의 사상에 감화된 팬일 뿐이고, 제임스 또한 그녀를 그렇게 대한다.
그러나 카페에서 벌어지는 장면을 기점으로 이 상식은 흔들린다. 카페 주인이 제임스를 엘르의 남편으로 오인하고, 엘르는 이를 굳이 정정하지 않은 채 그 역할을 받아들인다. 그 순간은 가벼운 역할극처럼 보이지만, 엘르의 태도와 감정은 지나치게 자연스럽고 능숙하다. 관객은 이내 지금까지 믿어왔던 전제를 의심하게 된다. 카페를 벗어난 이후 두 사람이 이어가는 대화와 태도는 점점 더 사실적인 관계의 온도를 띠고, 그 의심은 장난스러움에서 진지함으로 옮겨간다.
거리 데이트 형식으로 이어지는 대화 또한 인상적이다. <비포 선셋>을 연상케 하는 산책 속에서 제임스는 미술 작품의 원본과 모조에 대해 시니컬하면서도 일관된 태도를 보인다. 원본이라 불리는 것조차 결국 어떤 아름다움을 모방한 결과물이라면, 무엇이 원본이고 무엇이 복제인지가 그렇게 중요한 문제인가. 복제품을 통해서도 원본에 도달할 수 있다면, 그 또한 충분히 가치 있는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영화 전반에 깔린 논리처럼 작동한다.
이후 영화는 두 사람의 감정이 부딪히는 국면으로 진입한다. 그저 역할극이었을 수도 있지만, 관객은 이내 그들의 싸움과 분노에 자연스럽게 몰입하게 된다. 감정은 점점 거칠어지고, 관계는 피로해진다. 이 감정의 흐름이 실제의 것이든 연기의 연장선이든, 영화는 그 구분을 명확히 밝히려 들지 않는다. 이 둘의 관계가 실제로 무엇이었는지는 이 영화의 핵심이 아니다. 영화가 집중하는 것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관계의 전제가 무너진 이후에도 여전히 지속되는 감정의 움직임이다. 상식이 해체된 자리에서 남는 것은 설명 가능한 진실이 아니라, 부정할 수 없는 감정의 흔적에 가깝다.
장르적으로도 흥미로운 시도를 품은 작품이지만, 최근 키아로스타미의 다른 영화들을 연이어 본 상태에서 본작은 그의 필모그래피 중 가장 치열하거나 번뜩이는 지점에 놓여 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완성도 자체는 분명 높다. 이미 영화적 언어에 완전히 숙달된 거장이 비교적 자유롭게 완성한 작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만큼 다소 쉽게 만들어졌다는 인상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늘 새로운 질문으로 경계를 밀어붙이던 감독의 행보를 떠올리면, 이 영화는 약간의 정체 혹은 후퇴처럼 보이기도 한다.
재감상 후 평이 내려간 경험은 드물었다. 이것이 단순히 내 컨디션의 문제였는지, 아니면 시간이 만든 거리감 때문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언젠가 다시 이 영화를 보게 된다면, 그때는 또 다른 감각으로 다가올지도 모른다. 지금으로선 그 가능성을 남겨둔 채 다음을 기약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