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바디의 여정 도중 시작한다. 이미 영화가 시작 시점 전부터, 그는 인물을 계속해서 찾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자살을 도와 줄 인물을 말이다. 그는 차분하다. 홧김에 결정한 선택 같아보지도 않는다. 상식도 충분한 인물처럼 보인다. 관객과 그의 '승객'은 사실상 동일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본다. "신에게 죄를 짓는 것이다", "그래도 자살은 안된다" 같은, 주인공 바디 또한 알고 있을 수준의 미약한 리액션만을 행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절망의 낙인으로 가득한 영화는 아니지만, 우리는 일종의 무력감을 선사받은 채 이 이야기를 바라만 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의 결심을 돌릴 만한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심리의 역전은 찰나의 순간만 모습을 드러내지만 그만큼 강력하다. 세 번째 승객인 노인의 설득은 가장 설득력 있었지만 바디의 마음을 돌리기엔 무언가 부족해 보였다. 그렇게 또 한 명의 승객을 보내는가 싶던 찰나, 문득, 차를 돌려 다시 노인이 있는 곳으로 '달려간다.'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급박한 텐션이 느껴지는 순간. 허겁지겁 달려간 끝에 노인과 재회한 바디는 일견 절박한 심정으로 노인에게 부탁한다. 내일 와서 돌을 던져 달라고. 혹시 내가 자고 있다 못 깰지도 모르니, 옷도 흔들어달라고. 그에겐 죽는 것이 '상식'이었지만, 그 상식에 균열을 일으키는 지점은 역설적이게도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과연 바디가 어떤 선택을 할지, 과연 그는 삶을 선택할지 혹은 다시 원래의 선택을 밀고 나갈지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키아로스타미는 여기에서 매우 극적인 선택을 한다. 이야기의 결말을 보여주지 않은 채 아주 무성의한 화질로 남은 영화의 메이킹필름을 제시하는 것이다. 배우는 태연하게도 걸어다니고, 감독과 스태프들은 촬영 구도를 잡으며, 엑스트라들은 순진하게 뛰어노는. 이제껏 함께 해 온 관객들의 몰입을 일순간에 무너뜨린다.
대범하게도 혹은 과격하리만큼 관객의 세계로 바톤을 넘겨버리는 태도. 키아로스타미는 이 순간의 역접을 위해 90분의 시간을 사용한 것이다. 이것은 영화일 뿐이며, 이 이야기의 해답은 당신들의 각자의 인생에서 찾아가라는 것을. 이것은 혹자는 영화에 대한 오만한 태도라 하겠지만, 나는 이것이 감독이기 전에 한 명의 인간일 뿐인 키아로스타미의 '삶과 죽음'을 대하는 겸손한 자세라고 생각한다.
ps. 필자는 본작을 왓챠를 이용해 약 6년 전 시청했었다. 해당 버전은 본작의 엔딩이 잘려진 버전이었다. 바디가 구덩이에 누워 눈을 감고 어두워진 채 그대로 끝나는 버전이었다. 한동안 그것이 본작의 끝인 줄 알고 있다 이후 버전이 더 있었다는 것을 알고, 또한 그 남은 영상이 본작의 가장 중요한 가치였었다는 것을 알고선 나는 그 ott에 대한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한 영화를 처음 볼 때만큼 그 영화와 관련해 중요한 순간은 없다. 어떤 좋은 환경에서 재차 감상하게 되더라도 그 가치는 처음의 순간을 능가하긴 어렵다. 이제라도 극장이라는 공간에서 그 가치를 온전히 경험하게 되어 다행일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