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면적으로 보자면 이 영화는 평범한 가족드라마이다. 허나 그렇게 단순한 의미로 정의하기엔 이 영화는 이상한 점이 많다. 에피소드는 많지만 내러티브의 어떤 논리성은 보이지 않는다. 감정을 자극할 수 있는 사건이 이어지지만 영화의 화법은 놀랍도록 건조하다. 누나의 결혼식 장면은 도중에 끊기고, 이보어와 아버지의 장례식은 의미있게 다뤄지지 않는다.
이 영화가 노인의 회상으로 시작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영화에 등장하는 에피소드들은 휴의 왜곡된 기억일 수도, 자의적인 의도에 의한 기억의 왜곡일 수도 있다. 후자의 경우를 생각해본다면 영화의 어떤 연쇄된 숏들은 섬뜩한 느낌마저 들게 된다.
영화 초반, 어린 휴는 맏형 이보어의 정혼자인 브론윈을 보고 사랑에 빠진다. 이후 이보어가 사고로 죽게 되는 사건에서 영화의 숏들은 휴의 내면을 표현하듯 건조하고 맥없이 이어진다. 맏이가 죽은 비극임에도 가정에 어떤 슬픔의 정서는 느껴지지 않으며 부부의 대화는 이 사건과 관련없이 심드렁한 톤으로 던져진다.
맏형인 이보어가 죽었기에 브론윈의 옆자리는 다시 비워졌다. 휴는 어쩌면 형의 죽음으로 인해 자신이 원하던 것을 성취할 수 있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브론윈과 함께 살겠다며 당돌하게 말하는 휴의 모습은 어린아이가 보여주는 모습이 아니다. 이 섬뜩한 욕망을 암시하는 숏들은, 이 에피소드들이 온전히 휴의 회상에서 작동하고 있는, 휴의 내면에 영향을 받는 영상이기에 가능할 것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가족 드라마에서 등장할 수 있는 순수하고도 환상적인 터치를 빼먹지는 않는다. 사고 이후 회복한 어머니가 주민들의 축하를 받는 장면, 휴가 사고 이후 목사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걷는' 장면, 누나인 앙하라드와 목사의 키스 장면. 간단해 보이고 정직한 연출이지만 그 감정의 파고는 거대하다.
주인공 휴의 외형이 변하지 않는다는 점 역시 짚어볼 만하다. 왜일까. 주인공은 시간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시간에 갇혀 있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액자는 닫히지 않는다. 엔딩에서 다시금 사용되는 플래시백은 휴의 의지를 명확히 보여주는 것만 같다. 휴는 푸르렀던 자신의 과거에, 아니 어쩌면 자신의 희망으로만 만들어진 실존하지 않았던 아름다운 과거에 그 스스로 남는 것을 선택했다.
영화 역사상 최고의 걸작으로 불리는 <시민 케인>이 이 영화로 인해 아카데미에서 고배를 마셨기에, 이 영화의 입장에선 다소 억울할 만큼 지금까지도 많은 비판과 비난의 대상이 되곤 한다.
시대를 초월한 걸작의 경우, 머리로는 이 영화가 만신전에 오른 이유를 알겠지만서도 가슴에 와닿지 않는 케이스가 있는데 나에겐 <시민 케인>이 그렇다. 믿기 어려울 정도로 탁월한 테크닉을 지녔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기에 나에게 어떤 감동은 다소 덜했고, 영화라기보단 연출에 관한 하나의 사전을 보는 듯해 삭막한 느낌마저 받았었다. 말이 길었는데 결론적으로 나는 <시민 케인>보다 이 영화가 좋은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