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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에서 출국금지 당한 영화 감독 자파르 파나히. 그는 한 국경 마을에 머물며 원격으로 영화 촬영을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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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엔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너무나도 많다, 그럼에도
길가의 남녀를 찍는 듯 하다가도, 머리에 물건을 인 사람을 찍는 듯 하다가도, 상인을 찍는 듯 하다가도, 반대편의 악사를 찍다가도, 다시 처음의 남녀에게로 돌아가고, 이어 카페의 종업원에게로 향하는 카메라. 이민을 가고자 하는 남녀의 이야기를 담는 도중, "컷"하는 소리와 함께 지금까지 장면이 '영화 촬영 장면'이었음을 선언하는 스태프. 카메라는 서서히 뒤로 빠지더니 급기야는 공간을 넘어 누군가가 노트북 스크린으로 이를 지켜보고 있는 순간을 담는다. 말하자면 <노 베어스>의 오프닝은 주인공을 익명으로 설정하는 셈이다. 마치 거리에 있는 '아무나'를 잡아 주인공으로 설정했다는 느낌이 들 만큼.
화상통화로 디렉팅하는 영화의 감독. 허나 물론 이 장면도 <노 베어스>라는 영화의 한 장면일 뿐이다. <노 베어스>는 '영화'와 '영화 속 영화'라는 기본적 구조에, 감독 자신의 삶을 투영해 예술가는 어떻게 행동하고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 것인지 이야기하고 있다. 자파르 파나히라는 이란의 감독은 네나 솔탄이라는, 이란 민주화 투쟁의 도화선이 된 여대생의 사망 추모식 현장에 참여한 것을 이유로 체포되어 출국 금지, 이후 징역형과 영화 활동 금지 등의 처벌을 받았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자파르 파나히의 석방을 요구하는 탄원을 보내 오래지 않아 자택 구금은 풀려났지만 이후 시위에 참여했다 또다시 자택 구금을 당하는 등의 고난을 겪는다. 그러한 와중에도 케이크 속에 usb를 숨겨 영화를 출품하는 등 창작 활동을 멈추지 않았고, 그가 만든 영화들은 이란의 사회 현실을 고발하고 탄압에 저항하는 사회파 영화의 대표가 되었다.
그러나 분명 <노 베어스>는 자파르 파나히 현재의 처지. 무력하고 제약된 현실에서 비롯되는 한계가 담겨 있다. 극중의 자파르 파나히, 혹은 자파르 파나히의 카메라는 현실 앞에서 철저히 무력하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사실을 담을 수 있을지언정 진실을 모두 담을 수는 없다. 카메라는 '모든 진실의 순간' 앞에 서 있을 수는 없다. 사실을 담은 카메라가 특정 의도를 가진 자의 손에 들어간다면 그 '사실'은 조작되어 '거짓'으로 둔갑될 수도 있다. 이러한 면에서 극중 자파르 파나히의 카메라는 극중 현실의 문제를 해결치 못한채 철저하게 소시민적인 방관자의 시선으로 남을 뿐이다. 이 시점 (물론 <노 베어스>라는 영화 속 이야기이지만) 현실에선 솔두즈라는 남성과 구잘이라는 여성이 과연 예정된 혼약 대신 진정한 사랑을 찾아 도망했는가의 진실을 두고 갈등이 벌어진다. (극중) 자파르 파나히의 카메라는 사실을 포착하는 데 성공했는가, 혹은 거짓으로 조작될 위기에 처했는가.
(극중) 자파르 파나히가 촬영하던 프로젝트에도 문제가 터진다. 감독은 배우들의 실제 이야기(이민을 준비하는 커플의 이야기)로 영화를 만들려 했다. 그러나 실제 삶에 영화라는 허구가 개입된 이후, 그 배우들의 인생은 정말 '가짜'가 되었다. 결국 영화는 태생적으로 '가짜'라는 사실에서 벗어날 수 없는가. 무엇이든 영화가 개입한 이상은 결국 '가짜'일 수밖에 없는가.
현실에서 사건이 벌어졌다. 솔두즈와 고잘이 기어코 도망하여 국경을 넘으려 하다 총에 맞아 숨지게 된 것. 진실을 밝혀낼 수 없고 조작의 위기에 상시 놓여있는 카메라는 그 사건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가. 극중 자파르 파나히는 그럼에도 그 현장의 진실 앞에서 도망치지 않으려 한다. 결국 예술가는 전복할 수 없는 난제 앞에서도 카메라로 대항하고 응답해야 한다.
자파르 파나히의 영화에는 키아로스타미가 흐른다. 보이스오버, 메타 영화적인 특성, 이란의 현실을 냉정히 응시하는 태도, 그러나 동시에 인간을 바라보는 온정 어린 시선. 키아로스타미는 우리 곁을 떠났지만 우리에겐 아직 자파르 파나히가 있다.
요즈음 세상의 호흡은 점점 짧아지고 있다. (자신보다 긴 러닝타임을 가진) 시리즈와 대결했던 영화는 이제 (자신보다 짧은 러닝타임을 가진) 숏폼과도 싸워야 한다. 틱톡과 유튜브를 위시한 숏폼 컨텐츠는 대중들에게 최단 시간 최다 도파민을 제공하고 있다. 21세기 감각의 제국에서 영화는 숏폼을 이길 수 없다. 영화는 무엇으로 살아남아야 할까. 결국 영화는 카메라다. 말하자면 예술가들에게 한 대씩 부여된 카메라. 그 카메라에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을 담아 화두를 던지고 담론을 제공해야 한다. 숏폼은 폭죽이지만 영화는 횃불이다. 화려하게 빛나지만 인간의 손을 떠난 이상 곧 사라지는 폭죽과 달리 우리의 관심이 닿는 한 횃불은 영원히 살아남는다. 그래도 이런 영화들이 있다면 영화는 존속할 가치가 있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