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엔 두 영웅이 있다, 드러난 영웅과 드러나지 않은 영웅.
<영웅>은 <라쇼몽>의 왕도를 따라간다. 영화는 이미 사건들이 벌어진 '이후'부터 시작하고, 주인공이자 화자는 청자에게 자신의 행적을 이야기한다. 청자이자 진나라의 왕을 위협하던 세 자객을 처치했다는 화자 무명의 이야기가 끝나자, 왕 영정은 무명의 이야기에 대한 오류를 지적하곤 자신이 생각하는 '진실'을 이야기한다. 그렇게 첫 번째 이야기와 조금 다른 이야기가 펼쳐지고, 의기양양해하는 영정에게 무명은 당신이 놓친 진실이 있다며 세 번째 형태의 이야기를 말한다.
규모를 어떻게 다루는가에 있어 <영웅>은 흥미로운 결과물을 제공한다. 수많은 궁수, 수많은 화살, 그것들을 모조리 피하는 비설과 무명. 세 번의 다른 이야기가 진행될 때 각 플래시백은 이미지적으로 레드/블루/화이트라는 세 가지 색을 컨셉으로 한다. 대단히 과장되면서 양식적인 미장센들이지만, 동시에 그 양식적임 자체가 본작의 규모를 만드는 것처럼도 느껴진다.
본작의 모든 액션에서는 '감정'이 들어가 있다. 그래서 본작의 액션 장면들에는 폭력성보다는 서정성이 진하게 느껴진다. 혁명을 처단하고 권력을 지키려는 서슬 퍼런 시대의 한 복판에 있는 이야기임에도 -그래서 얼마든지 더욱 섬뜩하고 강렬한 것들을 충분히 보여줄 수 있었음에도- 영화의 주안점은 선혈이 아니라 서정에 있다. 결투 장면에선 쇳덩이의 냉혹함보단 무형의 에너지가 움직이는 듯한 인상을 남기며, 나뭇잎과 빗방울을 가르는 등의 파동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장예모는 타협하지 않고 그 과장됨을 끝까지 관철시켜 예술의 경지로 이끈다.
영정에 대한 찬가인가 묻는다면 100%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영정의 재능에 대한 고평가가 분명 노골적으로 서술되어 있는 본작이긴 하지만, 한편으론 그 영정은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스스로 세운 규칙으로 인해 그야말로 외통수 격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는 사실을 영화는 부정하지 않는다. 더욱이 영정이 목숨을 보전한 까닭은 그의 지성 덕분이 아니고 무명의 포기 덕분이었으며, 그래서 영화는 영정을 성장통을 겪는 불완전한 인물의 모습으로 묘사한다. (물론 그 인물을 성장 서사의 주인공인 것 마냥 긍정적인 서술을 하는 것이 과연 응당한 것인가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이긴 할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