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편 중 가장 차분하게 느껴진다. 블루 역시 차분했지만 마치 조증의 감정처럼 번뜩이며 틈입하는 감정들이 시각화되었고, 화이트는 차분할 틈이 없이 우스운 순간들이 가득했다. 레드가 강렬한 순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말하자면 셋 중 가장 지적인 영화다. 마지막 편이니만큼 점수를 매긴다면 블루>화이트>레드 순이지만, 그래서인지 오히려 정서의 안정감은 가장 선명하게 남는다.
블루는 전혀 희망적이지 않고, 화이트는 씁쓸하지만, 레드는 희망을 제시한다. 세 편 중 가장 희망적인 엔딩처럼 느껴지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감정의 방향이 갑작스레 솟구치지 않고, 아주 조용하게 삶의 온기를 되돌려주는 쪽에 가깝다.
블루의 줄리엣 비노쉬, 화이트의 줄리 델피, 레드의 이렌느 야곱 중에서는 본작의 이렌느 야곱이 가장 매력적으로 등장한다고 생각한다. 가장 형형히 빛나는 역할이기에 그랬겠지만, 이 배우가 가진 ‘적절한 생기’는 본 이야기의 결과 훌륭히 들어맞는다. 말하자면, 과할 정도로 에너지 넘치는 생기를 가진 배우였다면 되레 어울리지 않았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만드는 대부분의 관계는 실은 우연의 산물이다. ‘전화’(2025년의 현재에선 ‘비대면’을 위시한 모든 것이라 치환해야겠다.)는 상대방을 겉핥기로 이해하는 수단에 가깝고,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의 완벽한 의도대로 이루어진 관계 맺기는 애초에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엔딩의 장면처럼 우리네 삶의 작은 기적 또한 우연처럼 보이는 것들 위에 놓여 있다. 그렇다면 결국 각자의 삶에 ‘우리가 의도하지 않게 찾아왔던’ 관계들을 조금은 더 넓은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