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1부는 이란의 한 중산층 가정의 시선을 따라가는 사회 영화다. 혁명재판소의 수사 판사로 임명된 아버지 이만. 그로 인해 이제 가족들은 일거수일투족을 조심해야 하며, 이만에게는 호신용으로 총 한 자루가 지급되기까지 한다. 지금의 상황은 이란에서 대규모의 시위가 벌어진 까닭에 매우 혼란스러운 정세이기 때문이다.
가장 이만은 지금껏 성실하고 진실하게 살아왔다. 그러나 지금의 자리는 사무실이 도청되어 있기에 정직하게 일하기 어려우며, 사형 기소장이 올라오면 군소리 없이 서명해야 하는 등 명령을 받는 일에 따라야만 하는, 어쩌면 권력의 하수인 노릇만을 반복하는 자리다. 소신과는 어긋나는 일들을 매일 맞닥뜨리지만, 임명되기 어려운 좋은 자리에 세워진 것이기에 잘 버티기만 하면 가족의 미래에 대한 고민은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이란의 전통적이고도 보수적인 가치를 대변하는 이만과는 달리 가정의 두 딸은 부모의 세대와는 사뭇 다르다. 교복을 줄여 입고 싶고, 불효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염색'을 하고 싶어 한다. tv에 보도된 내용만을 믿는 어머니와는 다르게 sns의 능숙한 사용으로 언론에 검열되지 않은 '진짜 영상'들을 본다.
마흐사 아미니의 의문사를 두고 뇌졸중이라고 보도하는 언론과는 달리, 히잡을 쓰지 않은 것으로 종교경찰에 의해 구타를 당해 사망했다는 이야기를 보도하는 sns. 자매는 tv를 믿지 않으며, 어머니는 시위대를 깡패라고 칭하며, 이만은 딸들의 행동들을 '다 한 때'라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영화는 본격적으로 다큐멘터리적인 시선으로 접어들며, 2022년 이란 시위 당시의 실제 자료화면들이 더는 '자료화면'이 아닌 극 중 상황으로 자리잡는다. 영화의 1부는 실제 사건을 가지고 어느 한 가족의 시선으로, 이란 구세대와 신세대의 갈등을 말한다. 자매의 언행들이 대한민국에선 이상한 것들이 아니지만, 이란에선 그렇지 않다. 세대 갈등은 대한민국을 포함한 어떤 나라에서도 일어나는 일이지만, 극도로 경직되어 있는 이란이라는 나라는 그만큼 구세대와 신세대 간의 갈등도 더 첨예하리라.
영화의 중반, 이만의 총이 분실되는 사건이 일어나며 이만 가정의 갈등은 더욱 악화된다. 아내와 딸들을 알리레자라는 '전문 심문가'에게 맡겨야 하는 일까지 발생하고, 가족 간의 신뢰는 점점 무너져 간다. 영화는 이 즈음부터 2부로 전환된다. 이만의 신상이 노출되기에 이르고, 그는 자신과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정보를 차단한 채 외딴 고향으로 향한다.
2부를 보며 명확히, 또 노골적으로 떠오르는 영화는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샤이닝>이다. 영화의 플롯은 <샤이닝>과 아주 유사하다. 가족 모두를 데리고 외진 거처로 이동한 아버지가, 그곳에서 이성을 잃고 미쳐 모두를 옥죄고, 아내와 자식(특히 자식)은 탈출해 미로 안에서 필사적으로 도망치다 결국 아버지가 죽는 이야기. 창문을 깨고 탈출하는 아이의 모습과 같은 깨알같은 유사점도 있다.
플롯뿐만 아니라 영화 내적인 주제 역시 두 작품은 유사하다. 가정을 부양해야 하는 아버지의 불안. 불안이 잠식한 영혼. 가장으로서의 압박감이 전환된 듯한 광기. 다른 점은 <샤이닝>이 가장의 불안을 호러라는 장르 안에 녹여냈다면 <신나씨>는 그것을 사회/드라마의 흐름 안에 녹여냈다는 점일 것이다.
다만 2부에서 말하고자 하는 '전통과 인습의 몰락'이라는 테마를, 왜 2부의 톤을 1부에 비해 급작스럽게 '장르&상업영화'적인 톤으로 전환하면서까지 한 것인가에 대해 의문이 있다. 1부의 그 엄정한 톤으로도 충분히 말할 수 있지 않았을까? 왜 '카체이싱' 장면이나, 최후반부 '술래잡기' 장면에서 느껴지는 그 낯익은 오락적인 톤을 본작은 선택한 것일까. 물론, '흥미'의 관점에서 보면 1부와 2부 모두 흥미진진했다.
결국 이만은 땅이 꺼지며 추락해, 손과 총만 진흙 밖으로 간신히 보이는 끔찍한 죽음을 당한다. 사나가 쏜 총알은 이만의 머리를 향하지도, 심장을 향하지도 않았고 그가 디디고 있는 땅을 향했다. 이것은 이란의 앞으로의 모습을 암시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전통과 역사라는 이름으로 행해져 왔던 이란의 폐단은, 외부의 것(sns)을 통해 총의 사용법을 배운 여자아이의 행동들로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오프닝에서 말했고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신성한 나무의 씨앗'은 아마도 이란의 '어른'들이나 이란의 '남성'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평가의 영역과는 다르게, 이란의 현실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기에 이런 영화가 세상에 공개된 것만으로도 이미 기적과 같은 일이다. 검열과 통제에 예술의 이름으로 맞서 저항하는 지구의 모든 예술인들에게 존경을 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