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텍사스의 황무지를 걷다 쓰러져 동생에게 구조된 이후에도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끊임없이 지평선을 향해 걷는다. 아이와 아내 모두를 찾았지만 그들 모두와 다시 시작하지는 못한다. 트래비스는 정착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말하자면 <파리 텍사스>는 정착하지 못하는 인물이 사랑으로 인해 정착하게 됨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문제를 겪고 튕겨나가다 한 걸음씩 이 문제를 해결해가는 이야기, 제도권 밖에서 살 수밖에 없는 자가 본인에게 지워진 책무를 마치고 다시 황무지로 돌아가는 이야기다.
일견 <파리 텍사스>의 2부는 아이 같은 어른 트래비스와 어른 같은 아이 헌터가 제인을 찾으러 가는 동화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시간 개념이 없다시피 하고, 인간관계도 무(無)에 가까우며 기본적인 인간으로서의 사회성도 부족해 보인다. 심적 쇼크가 지대했을 것임은 알고 있지만서도 한편으론 도를 넘는 수준이다. 반대로 헌터는 가정사로 인함인지 이미 철이 다 들어버린 듯한 모습이다. 의젓한 성품 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동행하며 우주와 은하계의 이야기를 신나게 늘어놓는 모습 등에선 오히려 아버지 트래비스보다 더 든든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4년의 공백이 무색하다고 느껴질 만큼 트래비스와 제인의 냉전은 (공식적인) 첫 만남으로 종전된다. 왜 고작 몇 분의 통화로 둘의 전쟁이 막을 내렸을까. 그들의 단절은 그만큼 보잘 것 없는 원인에서 비롯된 비극이 아니었을까. 헌터가 트래비스에게 "나는 아빠가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었어요" 라 말했듯 여전히 둘은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지 않아서였을까.
빔 벤더스의 <파리 텍사스>는 그의 영화에서 가장 전문적으로 소통의 단절을 다루고 있는 것만 같다. 소통은 근본적으로 한 편이 입을 다물면 성립될 수 없다. 그래서 영화의 초반 형과 동생은 소통하지 못한다. 그래서 자신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 트래비스를 헌터는 반갑게 맞을 수 없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단절의 구도는 트래비스와 제인이다. 너무나 사랑했던 사이였음에도 결국 서로에게 등 돌리고 떠났던 그들. 집을 불태우고 도망치기까지 둘 간의 어떤 진정한 대화가 있었을까. 서로를 이해한 순간에서도, 그들의 소통은 (형태적으로) 불완전하게 실현된다.
황무지의 미래로 나아가는 동시에 낙원의 과거로 돌아간다는 형식의 로드 무비로서 훌륭하며 해리 딘 스탠튼과 나스타샤 킨스키의 모습들, 또한 음악의 사용도 탁월하다 말하고 싶다. 결국 관계의 회복은 (편집과 플롯 등 어떤 영화적인 테크닉이 아니라) 대화라는 것을, 무리하다시피 하나의 씬을 길게 늘이면서까지 이야기를 전하는 빔 벤더스의 정공법이 한편 존경스럽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