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그라운드Underground

1995 · 에밀 쿠스트리차 · YU, 체코
🏆 칸 황금종려상
언더그라운드 포스터
170분 · 코미디 · 드라마 · 전쟁 · 15세 이상 · 출연 Мики Манојловић, Lazar Ristovski, Mirjana Joković, Slavko Štimac · 음악 Goran Bregović · 촬영 Vilko Fila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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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관련 묘사형제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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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나치 독일의 침공으로 베오그라드와 세르비아 전체는 혼란에 빠지고 국민들은 전의를 불태우며 저항한다. 블랙키와 마르코는 지하에서 무기를 제조하고 밀매하며 돈을 벌고 있었는데 전쟁으로 지하 생활을 시작한 파르티잔 가족들은 마르코와 블랙키를 전쟁 영웅으로 착각한다.

에디터가 이 영화에 대해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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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3.0을 평가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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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6월,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 핑켈크로트는 르몽드에 <언더그라운드>를 규탄하는 글을 실었다. 칸이 가장 투박하고 기만적인 세르비아 선전물에 황금종려상을 안겼다는 것이다. 다만 그는 그 영화를 아직 보지 않은 채 그 글을 썼다. 그가 규탄한 것은 '자신이 본 영화'가 아니라 '남들이 전한 영화'였다. 공교롭게도 보지 않은 것을 믿는 그 일이야말로, <언더그라운드>가 세 시간에 걸쳐 그리는 바로 그 일이다. 스크린 속 사람들 역시 자신이 사는 세계를 한 번도 제 눈으로 확인하지 못한 채, 주어진 이야기를 현실로 믿으며 살아간다. 그러나 이 촌극을 잠시 접어두더라도, 그가 던진 혐의 자체는 이 영화가 끝내 피할 수 없는 질문으로 남는다. 사라진 조국을 향해 '옛날 옛적에 한 나라가 있었다'라고 말하는 이 영화는, 애도인가 아니면 광고인가.

이 물음에 답하려면 이 영화가 이야기를 다루는 방식부터 보아야 한다. <언더그라운드>를 보면 이상한 점이 감지된다. 분명 주택 안의 작은 지하실이었는데, 잠깐잠깐 보이는 그곳의 공간이 점점 넓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아니, 느낌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 잘 쳐줘도 지상 주택과 크게 차이 나지 않을 공간처럼 보였던 그 지하실이, 샤워실과 화장실 등 사실상 또 다른 주택처럼 보이다가, 낯선 아이들의 모습까지 보이며 어느새 작은 마을의 형태를 띤다. 급기야 지하 밑에 또 하나의 지하가 열리고, 그 안엔 탱크가 있고 사람들은 무기를 만들고 있다. 이제껏 이 영화는 스스로가 판타지라는 어떤 암시도 준 적이 없었다. 그저 조금 우화적인 리얼리즘 영화라며 스스로를 소개하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 능청스럽게 이런 반전을 제시한다. 있을 수 없는 크기의 지하를 화면 안의 누구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이 태연함은 영화가 관객에게 건네는 지시에 가깝다. 나를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 하나의 우화로 읽으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화에는 대상이 필요하다. 이 우화의 대상은 한 나라다.

그 나라의 사람들은 지하에 산다. 그리고 그들을 지하에 붙들어두는 것은 하나의 거짓말이다. 마르코는 나탈리아와의 밀회를 위해 부상당한 친구 블래키를 지하에 가두고, 그날부터 연출자가 되었다. 지상으로 통하는 망원경을 만들어 발밑을 감시하고, 간헐적으로 공습경보를 울린다. 이따금씩 저 "지상의 빌어먹을 파시스트 놈들"에게 당한 듯 부상을 연출해 친히 지하실로 굴러 떨어져 주기도 하면서, 자신은 지상에서 나치의 공격을 자발적으로 감내하는 순교자라는 이미지를 심어 준다. 지배란 그럴 듯한 이야기를 만들어 무대에 올리는 행위다. 발밑의 존재들을 긴장케 하고 단결시키면, 그들은 눈이 멀어 외부의 적만을 향해 분노하게 된다. 정작 내부에도 적이 있음은 깨닫지 못한 채. 그렇게 지하의 사람들은 아직도 전쟁이 진행 중이라고 믿으며 충실히 무기를 만들어 지상으로 올려 보내고, 마르코는 그 바보들의 생산품으로 돈을 번다. 끝난 전쟁을 끝나지 않았다고 믿게 하는 이 거짓, 사람들을 만들어진 현실 안에 가두어 부리는 이 체제야말로 이 우화가 가장 먼저 겨누는 표적이다.

마르코의 무대는 지하실 천장에서 멈추지 않는다. 지상에서 블래키는 나치와 싸우다 전사한 투사가 되어 동상까지 세워졌고, 마르코는 죽은 친구를 기리는 문화센터 개관식에서 자작시를 낭송한다. 나아가 자신의 회고록을 원작으로 한 국가 후원 영화를 촬영한다. 죽은 영웅의 신화를 쓰는 자는 곧 그 영웅을 지하에 가둬 둔 자였다.

거짓이 오래갈수록 비극은 짙어진다. 눈먼 것을 알지 못한 채 사는 누군가를 본다는 것도 비극이지만, 그가 자신의 처지가 뭔가 이상함을 체감하기 시작하는 것을 보는 것 또한 비극적이다. 이반의 원숭이 소니가 탱크에 올라타 지하실의 벽을 뚫자, 블래키와 그의 아들 요반은 드디어 자신의 손으로 전쟁을 끝낼 수 있겠다며 바깥으로 나간다. 우스우면서도 안타까운 것은, 하필 부자가 향한 곳이 마르코가 관여하던 그 선전 영화의 촬영장이었다는 것이다. 20년 만에 오른 지상에서 그들이 처음 마주한 현실이, 하필 마르코가 지은 또 하나의 무대였던 것이다. 여전히 전쟁 중임이 맞다는 것을 그것을 보고 확신한 부자는 현장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기억 속 자신의 적이었던 프란츠(역할의 배우)를 저격해 죽이기까지 한다. 필생의 적을 처치했다는 기쁨에만 도취돼 아들이 익사하는 것을 보지도 못한 블래키는 복수심에 눈이 먼 자였고, 태어나면서부터 지하실에 있었기에 해를 달로 착각하고 사슴을 말로 착각하는 요반 역시 눈이 먼 자였다.

정말로 안타까운 자는 이반일 것이다. 소니를 찾으러 밖으로 나갔던 그는 수십 년이 지난 1992년이 되어서도 여전히 소니를 찾고 있었다. 여전히 소니를 찾는다는 건, 여전히 수십 년 전에 머물러 있다는 의미일 테다. 1992년의 이반은 자신의 형 마르코와 나탈리아가 30년간 수배 대상이었고, 지하실에서 사람들을 죽이고 무기를 거래했다는 사실을 듣는다. 심지어 서류상으론 이미 1946년에 죽은 자 이반은 자신의 기억과는 너무도 다른 지상의 세계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 스스로 다시 맨홀을 열고 지하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만나고, 마침내 소니를 만난다. 사실 말이 되지 않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의미는 분명하다. 그곳은 이반의 현실 도피의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눈먼 채로 사는 편이 낫다는 판단은, 이 영화에서 사기꾼의 것이기 전에 피해자의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마침내, 그 눈멂이 향하는 곳이 드러난다. 마르코는 그 자신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죽는다. 그를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패는 것은 동생 이반이고, 그를 총살하라 명령하는 것은 이제 장군이 된 그의 친구 블래키다. 형제를 죽이는 것보다 더 잔인한 것은 없다며 마르코는 울부짖는다. 이반은 형을 (사실상) 죽인 뒤 목매달아 죽는다. 이반의 죽음은 처음이 아니다. 영화의 앞머리에서 그는 이미 한 번 목을 매려 했고, 그 줄을 끊은 것이 형 마르코였다. 그러나 마르코가 끊은 것은 죽음이 아니라 죽음의 시기였을 뿐이다. 그는 동생의 목숨을 구한 것이 아니라 압류했다. 되돌려준 삶이 지하의 거짓이었기 때문이다. 형이 동생에게서 죽음을 빼앗아 그 자리에 가짜 삶을 쥐여준 그 순간부터, 마르코가 부를 쌓아 올린 수십 년이 시작된다. 형의 재산은 동생의 삶을 원료로 삼은 것이었다. 그러니 1992년에 이반이 되찾는 것은 복수가 아니라 반납이다. 형이 끊었던 줄을 동생이 다시 묶는다.

더 잔인한 것은, 이반을 끝내 죽게 만든 것이 거짓이 아니라 그 거짓의 폭로라는 사실이다. 그는 거짓 안에서는 살 수 있었다. 살 수 없었던 것은 진실 쪽이다. 자신의 30년이 통째로 형이 지어낸 허구였음을 아는 것은, 지켜야 할 자기 자신이 애초에 없었음을 아는 것이다. 형을 부정하는 순간 그가 딛고 선 세계 전체가 무너지는데, 그 세계를 지은 자가 다름 아닌 형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형을 때려죽이는 일과 스스로 목을 매는 일은 이반에게 하나의 동작이 된다. 형이 곧 그의 세계였으므로, 형을 죽이는 것은 자신을 죽이는 것과 동격이다.

친구가 친구를 쏘라 명하고 동생이 형을 때려죽이는 이 연쇄가, 이 영화가 말하는 눈멂의 정체다. 지하의 사람들을 처음 눈멀게 한 것은 마르코의 거짓이었으나, 그들을 끝내 파멸시킨 것은 밖의 적이 아니라 서로였다. 집이 이미 불타는 와중에 그들은 불이 아니라 서로를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 이것이 곧 유고슬라비아가 제 손으로 자신에게 한 일이라며 쿠스투리차는 말한다.

여기까지가 규탄이다. 쿠스투리차는 자신의 조국을 남에게 속고 저희끼리 죽인 눈먼 자들의 나라로 그렸다. 만약 영화가 여기서 끝났다면 그것은 경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심판이 아니라 포옹으로 끝난다. <언더그라운드>는 또 한 번의 마술을 보인다. 페데리코 펠리니의 <8과 1/2>을 명백히 오마주한 구도. 어느 섬에서 모두가 모인 잔치가 열리고, 모두가 깨끗한 모습으로 살아 있는 채 춤춘다. 서로가 서로를 용서한다. 방금까지 서로를 죽이던 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술잔을 나눈다. 그러나 <8과 1/2>의 그 엔딩이 희망과 축복이었다면, 어딘가 모르게 <언더그라운드>의 엔딩에선 절망의 감정이 함께 배어난다. 육지였던 그 대지는 떨어져 나가 바다로 흘러간다. 이 현실의 영역이 아닌 것처럼.

바로 여기서 첫 장면의 그 마술, 지하실을 마을만 하게 부풀리던 그 능청이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드러난다. 쿠스투리차는 실재했던 역사를 우화로, 나아가 동화로 옮기고 있었던 것이다. '옛날 옛적에 한 나라가 있었다'는 동화의 문법이다. 역사는 잊히지만 동화는 창작과 예술의 이름으로 남는다. 사실의 기록으로는 세월과 함께 바래고 마는 것을, 신화의 형식에 담으면 후대의 입에서 입으로 이어진다. 떨어져 나가 흘러가는 저 땅은 그러니 상실의 이미지인 동시에 보존의 이미지다. 사라지는 조국을 붙잡아 동화로 바꾸어, 잊히지 않도록 후대에 넘기려는 마지막 몸짓인 것이다.

핑켈크로트의 혐의가 빗나가는 지점이 여기다. 선전은 자기편을 치켜세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자기편을 그리고 있음에도 바보로, 겁쟁이로, 형제를 죽이는 자로 그렸다. 미화가 아니라 자기 고발이다. 선전은 이성적인 계산의 산물이지만, 이 영화의 마지막에 있는 것은 계산이 아니라 슬픔이다. 물론 이 영화가 감정에 호소한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냉정하게 정치적 이해를 따지는 눈에는, 모두들 똑같이 눈멀었고 모두들 똑같이 유죄라는 이 시선이 다소 나이브하거나 편향적으로 비칠 수도 있다. 누구의 책임이 더 무거웠는가를 이 영화는 묻지 않고 지워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지움은 전략이 아니라, 그 나라 전체를 사랑한 자가 그것이 제 손으로 찢어지는 것을 지켜본 슬픔에 가깝다. 감정에 호소한다는 사실이 이 영화의 진정성을 훼손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호소야말로 이 영화의 진정성이다.

거친 진심으로 과거를 봉인한,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유고슬라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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