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인공 엘리자베스 스파클.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입성해 시민들이 그 플레이트를 밟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권세를 가졌지만 이내 그 세가 힘을 잃는다. 시민들과 쓰레기차는 스스럼 없이 그곳을 밟고 지나가고 누군가가 흘린 음식물에 의해 더럽혀지기도 한다.
<서브스턴스>는 야망과 패기로 가득 찬 영화 같다. 다소 직접적이지만 강력한 은유들이 망설임 없이 제시된다. 우선 수많은 걸작들을 적극적으로 오마주한다. 복도의 벽지나 붉은 화장실. 방송국의 디자인은 <샤이닝>의 그것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후반부 등장하는 괴물 엘리자수의 디자인은 데이빗 린치의 <엘리펀트 맨>을 떠올리게 한다. 기괴한 크리처임에도 역설적인 감정이 들 정도로 그 인물에게 연민을 느끼게 되는 순간은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플라이>를 정신적으로 계승하는 듯한 순간이고, 최후반부 무대에서의 익스트림한 순간은 명백히 <캐리>의 오마주다.
<서브스턴스>는 다양한 즐길거리로 가득한 영화다. 편집과 카메라로 선보이는 날선 연출은 비슷한 기승전결을 가진 <레퀴엠>을 연상케 한다. 편집의 리듬에 주저함이 없고, 익스트림 클로즈업의 적극적인 사용, 왜곡된 렌즈의 의도적인 사용, 마치 모든 숏이 긴장되어 있는 듯한 강박적인 리듬. 20여년 만에 등장한 <레퀴엠>의 후속작 같다.
두 주연배우, 특히 데미 무어의 그야말로 온 몸을 불사른 연기를 짚지 않을 수 없다. 배우 자체의 인생이 영화의 배역의 현실과 겹쳐 보이며, 배우 스스로도 영화를 촬영하면서 다른 작품들과는 사뭇 다른 마음가짐이 생기지 않았을까 하는 경우가 있다. <버드맨>의 마이클 키튼이 그랬다. 데미 무어의 경우도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아마도 그의 경력 최고의 연기였을 것이다.
직원은 언제나 절대적으로 이성적인 답변을 한다. "균형을 지켜라", "모체는 당신이다". 서브스턴스의 규칙은 엄격하다. 조금의 영화를 얻고 나선 반드시 반대편에서 대가를 치른다. 반면 영화의 규칙이 깨지는 첫 번째 순간은 스파클이 수에게 You switch를 주입하는 순간이다. 두 성체가 동시에 숨 쉬고 있는 순간이니 말이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강렬한 표현이 바디호러로서의 장르를 제대로 보여준다. 또한, 제법 영화의 이야기가 많이 진행된 상황에서, 새로운 국면을 보여주는 순간으로서 기능마저 효과적이다. 두 번째 순간은 수가 스스로 ACTIVATOR를 주입하는 순간인데, 스파클이 ACTIVATOR를 주입해 수를 만들어냈다면, 그 수가 ACTIVATOR를 주입하면 어떻게 될까라는, 다시 새로운 국면을 제공하기에 흥미롭다.
<서브스턴스>는 자아에 관한 흥미로운 논의다. 그녀의 (외적) 아름다움에 찬사를 보내는 인물들은 모두 남성들이다. 그녀를 동경하는 여성들의 모습은 등장하지 않는다. 자신이 알고 있던 인물과는 다른 젊은 여성이 문을 열고 나오니 옆집 올리버의 태도는 달라진다. 유일하게 스파클을 좋아해주는 프레드에게 스파클은 본연의 껍데기를 부끄러워한다. 상승과 하강에서 상승은 너무나도 짜릿하고 하강은 너무나도 처절하다. 날이 지날수록 기쁨과 우울함은 점점 더 극단으로 멀어진다. 극단적인 두 자아의 존재는 결국 자아의 분열을 만든다. 극에 달한 자기혐오가 자기파괴에 이르러 육체가 완전히 파괴되고 나서야 비로소 스스로의 평화를 찾고 건강한 자아를 되찾음은 관객에게 강력한 아이러니를 역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