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시작 전 등장하는 '복원 과정'에 관한 멘트들을 읽고 나니 더욱 더 그들에게 감사함을 느낀다.
오프닝과 엔딩 모두, 마르첼로는 상대방과 대화하지 못한다. '말'은 서로 나누지만, 무언가로 인해 방해받아 상대방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채 '대화'에는 실패한다. 이 수미상관적인 구조는 우리네 세상이 얼마나 가장된 가면들에 파묻혀, 타인과 유리된 소외된 사회인지에 대한 은유로 다가온다. 1960년이나, 2025년 지금에도.
본작에 마르첼로와 함께 '시선'을 상징하는 존재가 있다면 바로 파파라초다. 파파라치라는 단어의 어원이 되기도 한 그의 행적은, 인간들의 인생 중 편린들만을 포착하고 심지어 그것을 왜곡된 방식으로 보도하기도 한다. 우리는 화려한 인물들이 즐기는 화려한 순간들을 보고 싶어 한다. 그것이 정말로 화려하고 아름다운 순간일 때도 있지만, 때로는 그것을 포착한 사람의 개입된 의도로 인해 '그렇게 보이는' 것일 수도 있을 테다.
마르첼로는 정말 다양한 사교계에 가지만 즐거워 보이진 않는다. 그는 겉으로는 화려한 세계에 속한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은 점점 더 공허해진다. 그러니 스타이너의 자살도, 그저 놀랄 일만은 아니다. 멋진 가정이 있었고 멋진 집이 있었던, 누가 보더라도 달콤해 보일 그의 인생. 그렇지만 정작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걸까.
세상엔 다양한 희가 있다. 사교, 성, 결혼, 구원 등. 그러나 그것들을 찾는 여정은 구질구질하다. 희와 희망을 찾는 과정을 들여다보면 비극덩어리다. 한 장면, 아마도 본작에서 가장 화려하고도 가장 '볼륨이 크며' 가장 축축한 장면일 '성모를 본 아이들' 시퀀스를 떠올리자.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 하여 각지에서 모여든 저마다의 인물들로 아이들의 집 앞은 인산인해를 이룬다. 미친 광기로 느껴지는 그들의 집착이기도 하나, 희망의 한 동아줄이 될까 하여 모인 중환자들의 모습을 두곤 차마 조롱을 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렇기에 순간의 '희'를 즐기는 순간은 어쩌면 이제껏 구질구질했던 인생 여정에 대한 보상심리이자, 지긋지긋한 현실에 대한 도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인생에 있어 쓰디쓴 시간은 너무 길고, 달콤한 시간은 너무 짧다. 우리는 인생의 그러한 달콤한 무언가를 얻기 위해 애쓰지만, 정작 그것을 가졌다고 해서 인생이 달콤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또한 그렇게 '달콤한 것들'이 과연 자신에게 진정 달콤한 것이었는지 물을 수 있겠다. 우리는 사회가 정의해 놓은, 그러니까 진정 내가 달콤한 것이라고 느끼지는 않은, 그러한 것들을 위해 달려온 것은 아닐까? 남에게 보여지는 것을 위해?
영화에 정말로 아름다운 순간들이 있다. 우선 주인공들의 외모가 매우 아름답다는 것도 언급은 해야겠으며, 실비아와 마르첼로가 분수 안에서 즐기는 찰나와도 같은 자유로운 순간은 그야말로 아름답다. 그러나 그런 짧은 아름다운 순간들은 신기루처럼 휘발된다. 마치 마르첼로의 삶처럼, 눈부신 순간은 한순간이고, 그 뒤엔 다시 허무가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