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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능한 사업가 오스카의 하루는 이른 아침, 고급 리무진 홀리 모터스에 오르면서 시작된다. 홀리 모터스는 그와 그의 비서 셀린을 태운 채 새벽부터 해질녘까지 파리 곳곳을 누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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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여 빛이 있으라, 배우여 빛을 비추어라, 영화여 빛을 되찾으라
최근 개인적으로 <퐁네프의 연인들>과 <나쁜 피>를 봤다. 이후 예전에 봤었던 이 영화를 다시금 보게 되었다. 그의 다른 영화들을 본 이후이기에 이 악명 높은 영화를 보다 쉽게 이해했다고 단언할 수는 없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이 영화를 보았을 때 나에게 들어온 영화의 함의와 레이어는 보다 풍부했다.
이 영화는 영화의 원론을 찬미하며, 보다 좁게는 인간의 삶을 다루며, 보다 좁게는 배우의 애환과 자의식을 다루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형식에 있어 생경한 작법이기에 다수가 이 영화를 보며 '난해하다'라는 인상을 받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영화를 보다 보면 장르의 문법이나 관습을 철저히 따라가는 한편 이를 절묘하게 변주하여 새로운 결과물을 창조하는 영화들이 있고, 어떤 영화와도 다른 살면서 처음 보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영화들이 있다. <홀리 모터스>는 나에게 후자의 경우로 다가온 영화다.
<홀리 모터스>는 다분히 린치적이다. 데이빗 린치 맞다. 분절된 이미지, 비논리적 시퀀스, 산문보단 운문에 가까운 리듬. 이 영화는 서사엔 관심이 없다. 서사를 만들지 않았다는 게 보다 적절할 것 같다. 이러한 영화들을 보며 관객들은 온갖 열불을 내며 중간에 도망을 가거나 나름의 해석을 만들 것이며 평론가들과 전문가들은 영화를 온통 해체해가며 정답과도 같은 매끈한 결론을 내리곤 할 것이다.
단언하건대 이 영화는 우리가 지금까지 봤던 많은 영화들의 경우처럼 프레임 안의 모든 것을 놓치지 않겠다는 수동적인 강박에 빠질 이유가 없다. 해석하지 말고 해체하려 하지 말며 레오 까락스가 보여주는 것들을 즐기면 되기 때문이다. 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에선 내가 이 영화를 보며 느낀 바를 세 가지의 목차를 통해 읊어보도록 하겠다.
영화
너무나도 유명한 이 영화의 오프닝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는 상영되지만 관객들은 자고 있다. 극장은 어린아이와 개들의 공원으로 변했다. 지금의 관객은 영화가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내러티브의 정보만을 흡수하며 수동적인 수용만을 보여주고 있다.
레오 까락스는 잠에서 깬다. 엔딩 크레딧에 'Le Dormeur'(잠자는 사람)으로 기입된 그는 13년 만에 영화로 컴백한 감독이다. 잠에서 깬 레오 까락스는 문을 연 뒤 '죽어버린' 관객들이 가득한 극장으로 향한다. 짐짓 한 감독의 자의식 과잉으로까지 느껴지는 이 프롤로그는 예수의 성전 정화 사건이 떠오르기도, 침묵을 깨고 영화계로 돌아온 감독이 던지는 하나의 거대한 선전포고처럼 보이기도, 수동적인 관객들과 영화들이 가득한 작금의 세태에 대한 한 예술가의 탄식으로 보이기도 한다.
레오 까락스는 영화 근본주의자, 영화 원론주의자라는 생각이 든다. 까락스는 <홀리 모터스>에서 자신이 영화라는 예술에 빠지게 될 수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이유와 최근 들어 영화 스스로 그 순수성을 상실한 것으로 보이는 일련의 흐름들에 대한 비탄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또한 <홀리 모터스>를 통해 영화가 그 태동에서부터 가져왔던 순수한 운동성의 감흥을 다시금 회복시키려는 의지를 강력하게 드러내고 있다.
<홀리 모터스>는 모든 경계를 흐리는 영화다. 극과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려는 시도는 예전부터 행해져 왔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클로즈 업>과 <올리브 나무 사이로> 등을 통해 픽션과 논픽션을 넘나드는 황홀한 진경을 보여주었으며 <셜록 2세>와 <카이로의 붉은 장미> 등에선 영화와 '영화 속 영화'라는 구도에서 내내 뛰노는 방법을 제시했다.
<홀리 모터스>에서 극과 현실의 경계는 모호해지며 점차 혼란스러워진다. 오스카가 테오를 죽이는 시퀀스에서, 오스카는 테오의 시체를 두고 그를 자신의 얼굴과 닮게 변장시킨다. 곧이어 오스카는 시체였던(?) 테오에게 공격을 당하며, 두 인물은 외관상 동일하게 보이게 된다. 이후 창고를 나온 인물은 한 명이다. 이 인물이 오스카인지 테오인지 우리는 알 길이 없다. 물론 알 필요도 없다.
또한 <홀리 모터스>에서는 무엇이 연기인지 그 경계가 모호해진다. 영화 후반 죽어가는 노인을 '연기'하는 오스카는 해당 씬이 끝난 직후 자신의 조카에게 묻는다. "너 이름이 어떻게 되니?" 둘은, 두 배우는, 오늘 그 순간 처음 만난 것이다. 영화 후반 우연히 만난 '에바'와의 에피소드에선 오스카는 다른 누구를 연기하는 것이 아닌, 자신 스스로의 모습만을 보여주는 듯하다. 허나 이 또한 알 수 없다.
다분히 자신의 선배들인 누벨바그 감독들의 방식을 연상케 하면서도, 드니 라방이 연기할 뿐인 오스카의 '스케줄'에서 한 꺼풀 벗어난 순간은 우리에게 특별한 감흥을 만들어준다. 이 영화는 무엇이 '극'이며 무엇이 '현실'인지 엄정하게 가르는 행위에 중요성을 두는 것이 아닌, 극과 현실을 뒤섞으며 만들어가는 시네마의 환상적인 순간들을 마음껏 즐기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적이라 생각된다.
<홀리 모터스>에서 리무진은 영화가 상영되는 영사관이자, 영화를 만드는 분장실이 되기도 하며, 파리의 전경을 전사하는 카메라의 역할이 되기도 한다. 의문이 생긴다. 왜 하필이면 리무진일까? 이와 연결 지을 수 있는, 영화 중후반 오스카와 한 남자와의 대화를 잠시 떠올려보자.
"여전히 지금 하는 일에 만족하세요? 이런 말씀드리는 건 저희가 보기에는 요즘 좀 피곤해 보여서요. 이제 못 믿겠다며 불평도 들어오고요. / 카메라 때문이에요. 옛날에는 정말 육중했는데 우리 머리보다 작아지더니 이제 보이지도 않잖아요. 그래서 나도 믿기 힘들 때가 많아요."
리무진은 사치품의 영역이다. 거추장스럽고 비효율적이다. 디지털 시대 이전의 필름 카메라가 그랬다. 스마트폰으로도 영화를 찍을 수 있는 시대가 된 작금의 시점에서, 어깨에 메는 거대한 필름 카메라는 리무진의 거추장스러움과 비슷하다. 영화의 맨 마지막 리무진들이 나누는 대화는 필름 카메라의 종말을 두려워하는 "필름 카메라"들의 대화이자 필름 카메라들로 만들어냈던 초기 영화들의 순수한 운동의 역동성을 그리워하는 레오스 까락스의 생각이 투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레오 까락스는 기술에 잠식될 미래를 두려워한다. 영화라는 틀 아래에선 예술이 기술을 앞서야 한다 생각하는 것만 같다.
인간
영화의 명목상 주인공인 오스카는 매일 다른 스케줄을 부여받는다. 평범한 가장으로, 거리의 노인으로, 모션 캡처의 배우로, 광인으로, 딸아이의 아버지로, 희생자로, 살인자로, 죽어가는 노인으로, 헤어진 연인과 재회하는 남성으로, 다시금 한 가정(?)의 가장으로.
영화의 마지막, 오스카의 스케줄을 안내하던 셀린은 "집에 가야지."라는 말을 하며 가면을 쓴다. (배우의 과거에 대한 레퍼런스이기도 한 이 장면은) 셀린에게는 오스카의 스케줄을 안내하던 이제까지의 모습이 그녀의 본래 모습이며, 집으로 돌아가 다른 누군가를 마주하는 그녀의 '사생활' 속 모습이 가면을 쓴 모습이라는 점을 암시하기에 특별하다. 영화는 이 장면을 통해 이들의 일생을 우리 모두에게로 확장시킨다.
오스카가 여덟 번째로 부여받는 배역인 남성이 겪는 에피소드에서, 그의 옛 연인인 진은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우리는 누구였을까?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
우리네 인간이 그렇다. 매일 여러 공간에서 각자 다른 역할을 기대받고 부여받는다. 어느 순간의 나의 어떤 모습은 생경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어떤 모습이 진정 나의 모습일까? 세상에서의 모습이 나의 정체성을 규정할 수 있을까? 이 모습은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인가, 아니면 '네가 원하는 나의 모습'인가?
레오 까락스의 연인이었던 예카테리나 골루베바에 대한 그리움과 죄책감이 더해져 이 시퀀스의 레이어는 더욱 풍부해진다. 까락스의 전작인 <폴라 X>에도 출연한 적 있는 배우 예카테리나 골루베바는 2011년 경 사망했다. 그래서인지 진이 노래할 때 "죽은 사람은 가고 산 사람은 살지."라는 가사는 레오 까락스가 <홀리 모터스>라는 영화를 통해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보내는 편지처럼 느껴진다.
레오 까락스는 <홀리 모터스>를 통해 한 인간으로서의 죄책감과 그리움을 드러내고 있다.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를 꺼내는 예술가는 언제나 가장 창의적이다.
레오 까락스는 <홀리 모터스>를 통해 자신이 이야기하고 싶은 모든 것을 담았다고 밝혔다. 특히 오스카가 연기하는 인물들을 통해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질 수 있는 보편적인 고민을 드러낸다. '거리의 노인'에선 죽음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모션 캡처의 배우'에선 짐승과도 같은 인간의 본능이, '광인'에선 표면적인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눈먼 자들의 모습을, '딸아이의 아버지'에선 딸에게 조언을 하는 아버지의 에피소드를 통해 타자화에 대한 경계의 시선을, 막간인 아코디언 시퀀스 이후부턴 문명 도시의 이면을, 아름다움은 주관적인 것임을, 부만을 추구하는 삶의 헛됨을, 배우라는 직업의 정체성을 사실상 독립적인 에피소드들을 통해 말하고 있다.
인간이 가질 수밖에 없는 것, 인간이 끝내 놓을 수 없는 것. <홀리 모터스>는 인간이라는 불확실한 존재에 대한 강렬한 통찰을 담고 있는 영화다.
배우
영화가 선사할 수 있는 가장 황홀한 순간처럼 느껴지는 아코디언 시퀀스가 지난 이후 영화는 더욱 제멋대로 돌아간다. 오스카가 맡은 배역들은 점차 그 경계가 흐릿해지며 배역 간의 정체성이 서로 충돌을 일으킨다. 테오를 죽이려던 오스카는 그를 자신과 닮게 변장시키는 도중 그에게 습격을 당한 뒤 그와 외관상 동일해지며, 오스카는 일전에 연기했던 자신을 막무가내로 죽이기에 이른다.
오스카의 모든 스케줄이 끝나고 그가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에선 그가 배역이 아닌 '진실'의 모습으로 느껴지지만 잠시 후 오스카는 난데없이 등장하는 동물들을 가족으로 반긴다. 이 모습을 보고도 이 순간을 오스카가 그 스스로인 '진실'의 모습인 것으로 단언할 수 있겠는가.
촬영이 끝나고 난 후에도 자신이 연기했던 배역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배우들의 후일담이 신화의 형태로 칭송받고 있다. 메소드의 방법론이 과연 정답인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배역에 몰입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방식이라는 생각은 든다. 허나 이러한 방식의 극단은 궁극적으로 배우의 자의식을 무너뜨리는 결과로 끝나지 않을까?
오스카는 영화의 후반, 자신의 전 아내인 진을 만나게 된다. (이 시점에서 오스카는 다른 인물을 연기하는 것이 아닌. 오스카 스스로의 모습으로 보인다.) 이 무렵 진은 배역이 만들어낸 '환상'과 자신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현실'이 뒤섞인지 오래인 혼란의 끝을 달리는 상태이다. 배우들에게 자신을 버리라고 말하지만 그들의 삶에서까지 자신을 버린다면 배우의 형상은 온전하지 못할 것이다. 결코 진실일 수가 없는 배역의 조각들 속에 갇힌 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배우이기 전에 한 인간으로서 대체하지 못할 비극일 것이다. 우리는 누구인가 부르짖는 진의 모습에서, 이제는 편린처럼 남아 있던 그 일말의 자의식마저 사라지게 될 비극이 엿보인다.
배우가 배역에 잠식당하는 삶을 서늘하게 묘사하면서도, <홀리 모터스>는 배우만이 내뿜을 수 있는 역동적인 에너지에 대한 매혹 역시 드러내고 있다. 이에 더해 영화만이 가질 수 있었던 배우의 순수한 이미지의 중요성이 점차 주변으로 밀려나고 있는 듯한 작금의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다.
드니 라방은 현시대 유일한 무성 영화배우 같다는 생각이 든다. 드니 라방은 대사로 하는 연기 역시 훌륭한 배우이지만 (대표적으로 죽어가는 노인을 연기할 때) 그보다 앞서 표정과 몸짓을 드라마틱 하게 활용하는 '액션' 연기에 탁월한 배우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레오 까락스가 드니 라방이 아니었다면 이 배역을 찰리 채플린을 비롯한 무성 영화 시대 배우들에게 맡겼을 거란 농담까지 했던 것은 결코 실없는 소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광인'을 연기하는 드니 라방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저 모습은 세상에서 드니 라방만이 소화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홀리 모터스>에서 가장 처연한 순간은 오스카 혹은 레오 까락스가 리무진 안에서 '배우'들이 설자리가 점점 좁아지는 세태에 대한 아쉬움을 드러내는 장면일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리무진 안 대화의 뒷부분은 다음과 같다. "몇 가지만 물어볼게요. 이 일을 계속하는 이유는 뭔가요? / 처음 시작은 연기의 아름다움이었죠. / 아름다움? 그건 보는 사람의 기준에 따라 다른 거예요. 보는 사람이 없어지면요?"
셀 수 없이 많은 영화에서 푸른빛의 크로마키를 사용해 과학 기술의 성찬을 과시하고 있지만, 결국 영화의 '근본'은 카메라에 담기는 배우의 온전한 얼굴이며 약동하는 인간의 움직임일 것이다. 영화 초반, 과학 기술이 극도로 발전해 완성되는 결과물인 모션 캡처의 움직임들은 그래서 기괴한 이미지다. 누군가의 지시만을 따르며 배우 자체의 생명력이 온전히 사라진 오스카의 모습은 역동적이지만 수동적이다. 레오 까락스는 극도로 발전하는 과학 기술에 대해 마냥 낙천적인 환상만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닌 듯 보인다.
배우는 배우로서 기능해야 한다. 영화는 영화로서 기능해야 한다. 영화는 배우의 생명력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영화는 '활동사진'으로서의 운동성을 소실하지 말아야 한다. 레오 까락스는 가장 진보적인 화법으로 가장 근본적인 가치를 역설한다.
해석이 갈리는 영화다. 해석이 다양한 영화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강력한 메시지로 작동한다, 이 영화를 보는 순간만큼은 다시금 영화라는 매체만의 강렬한 운동성을 관객들이 느끼게끔 하겠다는 레오 까락스의 생각으로. 여느 예술가와 같이 까락스 역시 세상에 대한 염세성을 여실히 드러내지만, 그럼에도 까락스가 보여주는 영화라는 예술에 대한 찬동은 관객들로 하여금 다시금 영화를 순수하게 붙잡을 수 있는 힘을 주는 듯하다.
사실 이 영화는 말이 안 되는 영화다. 한 편의 영화에, 그것도 2시간 남짓한 러닝타임을 가지고 이렇게 수많은 이야기를 펼쳐낼 수 있을까. 모든 순간 가히 '시네마틱'함의 체험으로 가득한 영화이기에, 어찌 이 영화를 21세기의 걸작으로 칭송하지 않을 수 있을까.
감히 영화의 모든 것을 이해했다 말할 자신은 없더라도, 영화를 보는 내내 새로운 세상과의 만남을 경험한 듯한 현묘한 감정을 전달해 주는 영화가 있다. <홀리 모터스>가 나에겐 그렇다.
그런 그가 8년이라는 또 한 번의 긴 공백을 깨고 이번 칸에 돌아왔다. <아네트>, 그의 첫 뮤지컬 영화다. 이번 칸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 나는 레오 까락스가 다시금 보여줄 시네마의 짜릿함이 너무나도 기다려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