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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이나 파는 조무라기 건달 오티스는 여동생 베키와 살고 있다. 어느날 오티스의 감옥동료이자 떠돌이 노동자인 헨리가 찾아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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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완성은 선의 극복인가
나도 이제 일반인 중에선 영화를 많이 본 축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악명 높은’ 영화들도 구태여 피하거나 하지 않았기에 그러한 강렬한 영화들에 있어서 어느 정도 내성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영화는 내가 지금껏 경험한 영화들과는 또 다르다.
<헨리>는 마치 살인범과 동행한다는 느낌을 주는 전혀 새로운 몰입감을 선사한다. ‘각본이 있는’ 영화는 픽션일 수밖에 없고 가짜일 수밖에 없다. 수많은 방식으로 관객을 끌어들이지만, 마지막까지 넘을 수 없는 어떤 벽 같은 것이 있다. 그러한 한계 속에서 대부분의 영화는 99%의 몰입감에 그친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 벽을 깨뜨리듯, 현실과 픽션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많은 경우, 특히 사이코패스를 다룬 작품에선 그의 광기를 외적으로 폭발시키는 방식으로 공포를 조성한다. 그것은 높은 타율을 가진 표현 방식이긴 하지만, 수많은 캐릭터들이 그러한 방식으로 대중 앞에 선보여졌기에 이제는 개성도 없고 더 이상 궁금하지도 않다. <헨리>는 그들과 완전히 다르다.
본작이 끔찍한 까닭은 단지 잔인한 장면이 등장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물론 시신의 머리를 자르거나, 유혈이 낭자한 처참한 광경이 나온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끔찍한 것은, 이 영화가 관객의 정서를 마비시킨다는 점이다. 자극에 대한 저항력을 깨뜨리는 방식이 다르다.
영화는 화장한 여성의 얼굴로 시작된다. 그녀가 누구일까 궁금증이 일기도 전에, 그 의문은 무의미해진다. 그녀는 이미 죽은 상태이며, 풀숲에 버려진 나체의 시신이다. 주인공 헨리는 식당을 나가고, 차를 타고 이동한다. 그 와중에 영화는 흘리듯 그의 ‘행적’, 곧 살인 현장을 보여준다. 살인의 순간은 보이스오버로만 들려오고, 카메라는 그 끔찍한 순간이 ‘지나간’ 공간만을 뒤늦게 비춘다. 난자된 시신들이 화면을 채울 때, 관객을 덮치는 감정은 공포가 아니라 무력감이다. 헨리가 이미 휩쓸고 간 자리를 ‘뒤늦게’ 바라보는 것밖에 할 수 없다. 본작에서 유난히 침묵하는 존재가 공권력이라면, 감독은 그들의 책임을 은근히 관객에게도 겹쳐 묻는 듯하다.
헨리는 살인의 시작과 끝을 마치 일상 업무처럼 무감정하고도 능숙하게 수행한다. 반복되는 폭력의 순간들이 그려짐에도 관객은 점차 그것에 둔감해진다. 어느 순간 우리는 “그가 또 하나의 ‘업무’를 마쳤구나”라고 받아들이게 된다. 이런 식의 영화가 있었던가.
악성이 어떻게 학습되고 전이되는가에 대한 탐구의 측면에서 본작은 더욱 흥미롭다. 끼리끼리 어울린다고, 오티스 역시 헨리와 감옥에서 만난 사이이며 여동생 베기에게 성적인 욕망을 품는 등 이미 정상적인 범주를 한참 벗어난 인물이다. 하지만 초반의 오티스는 살인에 적응되지 않은 자로 나온다. 두 여성을 차 안으로 유인한 뒤 헨리가 살해했을 때, 오티스는 심하게 동요한다. 그의 반응은 누가 보더라도 ‘살인에 익숙한 자’의 그것이 아니다.
하지만 헨리는 그런 오티스에게 자신만의 얼토당토않은 ‘살인 논리’를 주입한다. 오티스는 점차 설득되고, 마침내 스스로의 살인 욕망을 자각하게 된다. 그의 폭력성은 점차 거침이 없어지고, 반복된 살인을 통해 ‘의도적 살인’의 문턱을 넘는다. 이제 그는 살인을 원한다. 헨리는 그에게 살인의 기술뿐 아니라, 경찰의 의심을 피하는 요령, 근거지를 옮겨야 하는 당위성까지 ‘교육’한다. 과거의 오티스에게 살인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이었겠지만, 몇 차례의 피 묻은 ‘훈련’ 끝에 그는 또 다른 악마로 거듭난다. 인간의 이성과 상식이란 얼마나 쉽게 허물어질 수 있는 것인가. <헨리>는 악성의 선천성과 후천성 모두에 대해 말하고 있다.
어쩌면 통상적인 ‘사이코패스’의 형태에 가까운 자는 오티스일 것이다. 그는 살인에 쾌감을 느끼고, 성적 일탈이 뒤섞인 잔혹한 행동을 거리낌 없이 저지른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영화는 그를 오히려 ‘풋내기’로, ‘일반인’에 가까운 인물로 비춘다. 반대로 헨리는 한 차원 위에 있는 듯, 살인을 무표정하게, 마치 회계 처리를 하듯 실행한다. 이 둘 사이의 갭이야말로, 영화에서 가장 소름끼치는 지점이다. 헨리는 설명되지 않는다. 공감의 실마리조차 제공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영화는 희망의 불씨 하나를 관객에게 남기는 듯하다. 서스펜스 없는 서스펜이자 관객으로 하여금 일말의 기대를 하게 만드는, 바로 베기의 존재다. 오티스의 여동생인 그녀는 영화 초반부터 헨리와 접촉한다. 헨리의 행적을 알고 있는 관객은, 베기도 곧 희생양이 되겠구나 체념하게 되지만, 이상하게도 헨리는 그녀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를 해치려는 오티스를 제지하고, 그녀가 자신의 과거를 고백할 때 조용히 들어주며 공감의 제스처를 보인다. 오티스를 함께 죽인 후, 헨리는 패닉에 빠진 그녀를 데리고 피신하기까지 한다. 베기는 헨리에게 어쩌면 아직 남아 있을 인간성을 깨우는 마지막 트리거처럼 보인다. 관객은 부디 그러길 바라며 둘의 여정을 지켜본다.
하지만 영화는 잔인하게도, 그 마지막 기도를 짓밟는다. 다소 차분해진 장면 속에서 헨리는 거울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는다. 다음 날 아침, 모텔을 나서는 그의 차 안에는 베기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다. 단순히 창이 어두운 탓일까. 유심히 화면을 관찰하게 된 관객을 조롱하듯, 헨리는 도로변에 차를 세우고 트렁크에서 커다란 캐리어를 꺼내 길가에 내려놓는다. 그리고 영화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 캐리어를 줌인한다. 선명하게 묻은 피. 헨리는 결국 자신의 ‘선함’을 ‘극복’했다. 관객은 마지막 순간까지 헨리와 감독에게 유린당한다.
역겨운 걸작이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을 만큼. 마이클 루커는 이 데뷔작으로 배우로서의 자신의 할 역할을 모두 마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