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리스 스탈링이란 인물에 조디 포스터가 적임자였던 이유 중 그의 프로필도 있었을 것이다. 조디 포스터는 단신의 여성이다. FBI 사무실에 출근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 잭 크로포드에게 가기까지, 그녀는 자신보다 키가 한참은 큰 사람들을 지나쳐 간다. 이 시점 클라리스는 명백히 약자이며 소수자이다. 클라리스 역에 니콜 키드먼이나 틸다 스윈튼같은 인물이었다면, 분명 어울리지 않았을 테다.
(그의 출연시간은 15분밖에 되지 않았다는 진실이 이제는 너무나 유명하지만서도) 워낙 대단한 임팩트 덕에 본작의 주인공이 한니발 렉터가 아닌가 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겠지만, 명백히 본작의 주인공은 클라리스 스탈링이다. 범죄의 해결, 한니발과의 접점이 본작의 하이라이트임은 부정할 수 없지만 본작의 핵심은 그러한 것들을 통해 궁극적으로 성장해 가는 클라리스 스탈링에 있다.
한니발 렉터의 캐릭터성은 30년이 훌쩍 넘은 현재에도 강렬하다. 마치 본작에서 등장하는 그와 함께 수감된 자들의 모습처럼 여타 작품에서의 빌런들은 자신의 광기를 어필하려 겉으로 과장된 몸짓을 보이지만 본작의 한니발 렉터는 정반대로 꼿꼿한 모습과 차분한 말투를 기반으로 프로필에 관한 질문을 던지며 상대방을 천천히 정복해가는 지략가적인 면모가 돋보인다. 물론 그럼에도 생존을 위해 적들을 처치할 때는 소름 끼칠 만큼의 잔혹성을 보여준다. 자신의 '작품'을 전시해 두는 예술가적 기질을 스스로 어필하기도 한다.
상대방을 잡아먹을 듯한 안소니 홉킨스의 연기는 익히 유명한 대로 대단하지만, 상대방에게 잡아먹히는 연기를 선보여야 했을 조디 포스터 역시 그에 버금갔다. 두 배우의 힘은 클로즈업의 '남용'도 과하게 비춰지지 않았다. 안소니 홉킨스의 얼굴을 극단적으로 클로즈업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그야말로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겠다는 심산인 것일텐데, 마치 그것을 전부 리시브하는 듯한 조디 포스터의 공력 또한 대단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클라리스와 한니발의 첫 대면 장면과 함께 본작의 하이라이트를 담당할 최후반부 시퀀스는 조나단 드미 감독의 연출 트릭이 돋보였다. 납치당한 캐서린이 빌의 개를 유인하고 FBI가 빌을 생포하기 위해 진입하는 장면을 교차하는데, 실내는 시끄러우며 실외는 조용한 것이 역설적으로 두 공간이 같은 공간임을 확인시켜주는 듯 했지만, 이내 FBI의 정보가 허탕을 친 것이 밝혀지며 순간 빌의 집을 찾은 사람은 주변을 수사하던 중 우연히도 그곳을 방문한 클라리스였다는 반전이 강한 임팩트를 준다. 이후 무한히 확장되는 것만 같은 지하실의 공간이 육중한 서스펜스를 제공하며, 예상치 못한 상황엔 대처하지 못한 채 늘 고장이 나던 그녀는 죽음의 위기를 맞고도 이를 극복하는 프로페셔널로서 성장한다.
2025.2.13. 2번째 관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