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샌가 '영화 같은'이란 단어가 관용어로 쓰이고 있다. 말뜻을 해석하자면 '현실에선 자주 보기 어려운' 정도의 의미가 될 듯하다. 그 말인즉슨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영화'를 '일상에서 일어나기 어려운 사건이 등장하는 영상물'로 이해하고 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렇기에 영화라는 매체에서 '현실적임'을 표방한 영화는 모순일지도 모르겠다. 영화라는 매체는 본디 '연출'을 통한 '재가공'이자 '재해석'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흑사회>가 감탄스러운 지점은 바로 그 모순 속에서 출발한다. 이 영화의 폭력의 순간에는 (다수의 영화들이 무의식적일 정도로 행하는) '꾸밈'이 없다. 그들의 폭력에는 멋이 없다. 주인공이자 보스인 록마저도 자신의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해 휘청거리며 살인을 행한다. 그러나 동시에, 어쩌면 암묵적으로 합의되었을 범죄영화들의 '폭력의 선'을 넘나든다. 화려하지 않지만 비정하고 현실적인 잔혹함에서 비롯된 장면들은, 피가 분수처럼 튀는 여타의 액션 영화들과는 비교를 불허하는 차가운 잔인함을 전한다. 이미 대상이 죽었음이 확실함에도 수 차례 더 바위로 머리를 내려치는 록의 모습은 '장르의 왕도를 따르지 않음'에서 비롯된 이상한 불균질함이며, 바로 그 점에서 섬뜩한 공포가 발생한다. 살인의 순간 능청스럽게 병치된 원숭이들의 울음소리는 피해자의 비명과 섞여 기괴한 울림을 낳는다. 인간과 원숭이, 모두 같은 동물. 아니, 짐승의 본능에 새겨진 권력 다툼의 비정한 면모가 투영된 듯하다.
한 영화의 주인공이 누구냐는 질문에, 러닝타임 동안 '변화'하는 인물이 그 영화의 주인공이라는 말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흑사회>는 록이야말로 주인공임을 매우 성실히 증명해가는 영화다.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록은 거만한 스탠스로 정장을 맞추는 따이디와 달리 소박하게 동네 정육점을 드나든다. 김칫국부터 마시며 호화로운 레스토랑을 예약하는 따이디와 달리 록은 아들과의 식사 자리 도중 회장 선출 소식을 전해 듣는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따이디는 명백히 악이고 록은 선이다. 그 장면들에는 어떤 '조짐'도 없다. 훗날 록이 타락할 것이라는 암시조차 보이지 않는다. 단순한 대비를 위한 장치라기보다는, 당시의 록의 모습이 곧 그의 실제 모습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는 흑사회의 일원이지만, 인간적이고 선한 면모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토록 선했던 록이, 영화의 후반부에서 따이디 부부를 끔찍할 정도로 살해하기까지의 과정을 영화는 급작스럽지 않고 어떤 필연적인 뉘앙스 없이 차분하게 관객에게 하나 둘 제시해 나간다. 관객은 그 변화를 설명하기 어려운 채로 목격하게 된다. 따이디를 살해하는 최후반부의 장면은 더 말할 필요가 없고, 용두곤을 손에 쥔 순간 마치 꺼져 있던 그의 '욕망의 스위치'가 켜지듯 섬뜩한 표정을 짓는 록의 얼굴은 오래도록 남는다. 그것은 단순한 인물의 변화라기보다, 권력과 폭력이라는 굴레 속에서 서서히 드러나는 인간의 또 다른 얼굴에 대한 냉혹한 기록처럼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