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감 있게 해변이라는 무대를 띄운 뒤 관객을 수없이 속이고 공포를 축조한다. 숏의 사용은 장르의 맥락 아래 거의 완벽한 수준이다. 서른도 채 되지 않은 젊은 감독이 모든 관객을 쥐락펴락하는 패기를 보여준다는 것 자체로도 <죠스>의 의의는 충분하다.
안전을 위해 해변을 폐쇄하고자 하는 측과, 해변에서 터전을 잡고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대립한다. 어찌할 수 없었던 비극이 벌어졌음에도 서장은 피해자의 가족에게 비난을 받는다. 재난 영화는 보통 겉으로 보여지는 재난보다 그것을 마주한 인간들의 발버둥과 술수를 목도하는 것에 더욱 관심을 둔다. 좀비 장르와 마찬가지로, 재난 영화 역시 정치적 장르다. 히치콕의 <새>가 저절로 떠오른다.
죠스가 등장한 이후는 50년 가깝게 흐른 지금의 시선에서 조악한 이미지가 못내 아쉽지만, 그 등장까지의 서스펜스는 온전히 감독의 능력이자 여전히 형형한 생명력을 가진다.
<죠스>의 후반부는 한편 대단히 이상적인 메시지를 머금고 있다. 이론만 빠삭한 채 실전엔 한없이 약했던 후퍼는 완벽한 실전을 경험하고, 물을 무서워하는 브로디는 쏟아지는 물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며, 독고다이 퀸트는 팀플레이를 깨닫는다. 스필버그의 영화에서 드러나는 '이상주의'의 원형 같이도 느껴진다. 다만 팽창하는 사회 이야기의 흐름에서 단순한 전투로 귀결되는 듯한 '흐름'이 아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뻔한 흐름을 스스로 비웃듯 퀸트를 잔인하게 죽여버리기까지 한다. 어이 없음의 카타르시스랄까. 스필버그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는 이 영화를 통해 출세할 자격이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