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넷>은 다양한 면모가 있는 작품이다. 연극적인 외피, 모든 배우들의 엄청난 연기가 우선 눈에 띄지만, 이야기적으로도 팔색조 같은 전환이 매력을 뽐내는 작품이다. 전쟁처럼 열렬하고도 애틋한 문명인과 비문명인의 멜로 같다가도 자식을 기르고 집안의 극적인 사건들로 변화하는 구성원들의 처지를 다룬 가족 드라마처럼 보이다가도, 결국 예술가가 (예술을 가지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라는 예술에 대한 이야기로 귀결된다.
<햄릿>만큼이나 <햄넷>도 연극적인 면모가 있다. 이목이 집중되고, 인물은 행동한다. 공간과 인물이 수직과 수평이라는 가상의 선들을 이으며 구도를 만드는 것들은 본작을 묘하게도 연극의 분위기로 이끄는 듯 하다. 특히나 <햄넷>은 실내 뿐 아니라 숲이라는 자연을 무대로 삼는 장면들이 많은데, 감독 클로이 자오는 전작들에서 그랬던 것 같이 세계 혹은 자연과 그 곳에 있는 인간을 눈부시게 포착한다. 롱숏으로 포착하는 대지와 인간의 순간은 인간의 초라함을 나타내기보단 자연의 일부로서의 인간을 형상화하여 비추는 듯 하다.
감독은 본인의 연출력을 숨기지 않지만 '조절'한다. 우리는 이미 클로이 자오가 서정적인 '패닝'과 '클로즈업'에 일가견이 있다는 사실을 그녀의 전작들로 인해 (특히 <노매드랜드>를 통해)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연출'들은 간헐적으로 등장한다. 아무도 없는 공간 숲에서 진통이 심해져 괴로워할 때 카메라는 그 순간의 감정적 농도와 정반대로 먼 롱숏으로 이를 담는다. 온 몸으로 고통스러워하는 그녀이지만 이를 멀리서 잡은 카메라 때문에 자연스레 그녀의 움직임은 적은 듯한 인상을 남긴다. 재차 집을 떠나겠다는 윌리엄을 온몸으로 막는 아그네스의 모습을 보여줄 때조차 카메라는 호들갑 없이 고정된 숏으로 이를 비춘다. 그렇기에 (감독이 그렇게 판단하여 선택한) 진정으로 극적인 순간들의 클로즈업과 패닝은 엄청난 효과들을 불러온다.
두 주연 배우의 연기는 근래 가장 인상적인 앙상블이었다. 아이가 태어나고 정신의 극심한 흔들림을 겪는 윌리엄과, 출산/참척/엔딩의 세 순간을 겪는 아그네스의 모습들은 모두 가공할 만한 수준의 연기였으며, 보는 것만으로도 온 몸이 아픈 기분이 들게 했다. 특히나 아그네스 역의 제시 버클리는 오스카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숨을 쉬지 않은 채 태어난 둘째를 '신을 믿지 않으며' 자신의 힘으로 '살려내는' 아그네스의 순간은 모성을 넘어 어떤 광기를 목도하는 것만 같았다.
어떤 영화는 엔딩이라는 한 시퀀스 안에 영화의 모든 주제와 정서와 (일종의) 미스터리를 모두 해결해버리는 괴력을 보여준다. 이 영화가 그랬다. 사라진 남편이 (자신에게 알리지도 않은) 처음으로 공연하는 연극의 이름이 자신의 죽은 아들의 이름이라는 것을 알고 그곳에 간 아그네스는 분노했다. 감히 내 아들의 이름을 입에 담지 말라고. 이 연극이 내 아들과 무슨 상관이 있는 거냐고. 그녀는 분노하고 의아해 했다. 왜 죽은 내 아들의 이름을 이 작품의 주인공 이름으로 삼았을까 싶었다. 그렇지만 그가 만든 비극의 주인공 이름이 자신의 아들과 같아짐으로 인해, 그 비극의 끝에서 죽음을 맞이한 햄릿을 마주하는 모든 관객은 햄릿 혹은 윌리엄과 아그네스의 아들인 햄넷의 죽음을 슬퍼하게 되는 것임을 아그네스는 깨닫게 된다. 아그네스는 햄넷이 죽어가는 순간 그곳에 있지 못했던 남편을 원망했고, 윌리엄이라는 예술가는 예술의 방식으로 아들을 기억하고 추모한다. 자신은 그 현장에 있지 못했지만, 이렇게 영원히 계속해서 관객 모두를 현장에 남기고 공감하게 하는. 그래서 모두가 슬픔으로 멈췄던 영화의 마지막 순간, 눈 마주친 윌리엄과 아그네스는 웃을 수 있었고, 연옥을 헤메던 햄넷은 이제야 뒤돌아보지 않고 떠날 수 있게 되었다.
참으로 엄청난 밀도로 완성한 본작의 엔딩이다. 이 순간을 위해 달려왔다는 인상을 받을 만큼 다소 작위적인 것인가, 다소 투 머치인가 싶다가도, 그것을 끝끝내 관철시키는 엄청난 돌파력과 뚝심이 그 완성도만큼이나 놀랍다. (한국 기준이지만) 2026년 최고의 엔딩이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