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 여성을 모델로 한 조각이 전시된 곳을 찾아 조각을 음흉하게 만져대는 한 남자는 기어이 출장 마사지사를 부른 그녀의 집으로 향해 동료이자 어머니인 여성과 함께 그녀를 납치해 온다. 그러나 그들의 납치에는 무언가 '생존형'의 기운이 느껴진다.
<눈먼 짐승>은 관객의 통념을 산산히 찢어버린다. 아키가 납치된 이후 이야기는 전혀 다른 국면으로 접어든다. 감옥을 탈출하기 위해 아키는 미치오를 속여 그를 사랑하는 척 하지만 미치오는 그녀의 거짓을 진심으로 받아들인다. 거기에 아키는 미치오와 그의 어머니 사이를 갈라놓으려 하고, 모함과 조롱으로 한 가정을 박살내기에 이른다. 가해자는 순진하고, 피해자는 영악하다. 단순한 이상성욕 변태인 줄 알았던 미치오가 실은 성에 눈을 뜨지도 못한 아이이자 (그렇기에 아키와 키스를 나누던 와중 어머니가 작업장에 들어온 것을 보면서도 어떤 부끄러움 없이 행동을 '지속'하는 것이 마치 헐벗고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아이'이자 '아담' 같다) 진심으로 촉각의 예술을 숭상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관객들은 서서히 받아들이게 되지만, 그렇다고 가해자를 응원하기엔 죄의식이 생긴다. 범죄를 방종하는 뒤틀린 모성애를 보여주는 미치오의 어머니도 한편으론 진심으로 아들이 잘못된 사랑을 배울까 걱정하는 마음에 그들의 관계를 온몸으로 막는 진정한 모성애를 보여주기도 한다. 인간은 누구나 양면적이지만, 본작의 인물들은 극단적으로 양면적이다. 결국 관객은 (심정적인) 거처를 찾지 못하고 떠돌게 된다.
<눈먼 짐승>은 이제껏 당신이 본 영화 중 손꼽히게 충격적인 영화가 될 것이다. 카메라에 직접적으로 표현되는 수위가 높았던 영화는 이보다 많이 있었다. 그러나 이 영화보다 정서적으로/소재적으로 충격적이며 혼란스런 영화가 몇이나 있던가? 마조히즘, 가스라이팅, 스톡홀름 증후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이오카스테 콤플렉스, 존속살인의 소재가 등장한다. 의외로 표현의 수위는 높지 않지만 그럼에도 풍기는 정서가 지독한 수준이다. 마스무라 야스조는 무엇을 먹기에 이런 상상을 한 걸까. 항상 느끼지만, 일본 영화의 이쪽 면과 저쪽 면에는 극단적인 차이가 있다.
예술의 관점에서 촉각이라는 감각을 탐구하는 것이 흥미롭다. 인간의 오감 중 시각과 청각은 사진, 소리, 영상으로 기록이 가능하고 나중에 다시 느낄 수 있다. 후각과 미각도 어떤 향이나 맛을 기억 속에서 떠올릴 수 있고, 일부는 다시 재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촉각, 즉 어떤 물건을 만졌을 때의 감각은 그 순간의 피부 자극, 온도, 압력의 조합이기 때문에 기록이 불가능하며 재현도 매우 어렵다. 촉각은 직접 경험할 때만 존재하고, 그 순간이 지나면 사라져버리는 감각이다. 다만, 어떤 사람들은 촉각의 기억—예컨대 누군가의 손길, 따뜻한 포옹, 차가운 물의 감촉 같은 걸 감정이나 상황과 함께 마음속에 강하게 간직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촉각 자체를 영원히 느끼는 것이 아닌, 감정이나 기억의 영역일 수도 있다. 결국, 촉각은 가장 현재적인 감각일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만 느껴지고 사라지기 때문이다.
<눈먼 짐승>은 매우 재미있는 영화다. 짧은 러닝타임에, 전개도 매우 스피디하다. 지루함을 느낄 틈이 없다. 지루함을 느끼기도 전에 영화가 끝난다. 더불어 위와 같은 흥미로운 담론을 제공하기도 하지만, 촉각에 집착한 자는 죽음만이 있다는 식의 결말은 다소 급작스럽고 교조적이며 뻔한 감이 있다. 결말이 그렇기에, 촉각과 미치오에게 사랑에 빠진 아키의 '변절'과 촉각을 멀리하게 된 미치오의 '변절'이 완벽히 설득되진 않는다. 그럼에도 조각이 무너지며 '이상'이 무너지는 연출은 참 맘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