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놓을 수 없는 것, 끝내 놓칠 수 없는 것.
이 영화는 주인공 사울의 상태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두 가지 측면으로 접근할 수 있을 것 같다.
만약, 사울이 (실제로 작중 언급했듯) '이미 죽어있는 자'라고 본다면 사울의 행동들은 정신 이상 증세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아들인지 확신할 수도 없는 상황 속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집착'하는 사울의 행동들은 사실 쉽게 납득하기는 어려운 구석이 분명 있다.
조금 다르게, 사울의 행동이 끊임없이 (껍데기만 남은 것 처럼 스스로도 느껴지는) 자신의 인간성을 회복하고 싶은 노력이라면, 다시 말해 인간성이 상실된 지옥 속에 던져진 자신 또한 저들과 같은 괴물은 아님을 증명하고자 하는 노력이라면, 그렇기에 마지막 순간 소년을 바라보며 자신의 행동에 만족하여 웃음짓는 사울을 생각한다면, 그의 행동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영화에서 단연 가장 인상깊은, 극단적인 아웃포커싱과 롱테이크, 핸드헬드를 내세운 촬영은, 왜 이렇게 촬영했을까를 고민하려면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온전히 1944년 저들의 맥락 속에서 영화를 이해할 수 없다. 현재 2021년에 살고 있으며 2차대전의 전말을 모두 알고 있는 우리의 시선에서는 사울이 왜 대의를 위해 나서지 않고 아이에게 집착하는지 공감하기 어렵다. 사울과 주변 인물들이 처한 시대적 상황을 고려한다면 바깥과 앞을 온전히 바라볼 수 없는, 바라보기 어려운 카메라의 움직임이 사울이 처한 그것과 동일시되는 순간이 있다.
비극을 다룰 때, 홀로코스트를 소재로 한 영화에선 더더욱 윤리적인 문제를 진정성 있고 긴장감 있게 다뤄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거대한 비극을 장벽처럼 앞세우고 이에 고통받는 인간들을 마주시켜 영화가 감상적이고 감정적인 이야기로 잘못 흐른다거나, 또는 극단적인 말로 '불행 포르노'로 이어지지 않게, 영화는 다가가야 할 때와 거리를 둬야 할 때를 알아야 한다.
<사울의 아들>은 사울을 마냥 동정하지 않으면서도, 반대로 마냥 비난하지도 않는다.
사울은 '조금이라도 늦게 죽기 위해' 유태인의 시체를 처리하는 존더코만도가 되어 일말의 감정없이 그들을 청소했다. 동시에 사울은 자신의 아들도 아닌(것으로 보임) 한 소년의 장례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편을 들지 않으면서도 이 정도의 몰입감과 감정적인 느낌을 전달하는 영화의 태도는 굉장히 높게 평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