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히 집중력을 요하는 영화다. 연대나 목차를 나누는 자막 하나 없이 네 개의 시점이 관성적인 순서 없이 이지러리 섞인 채 제시된다. 괴상하기까지 한 이 영화의 플롯은 관객에게 친절함을 거의 제공하지 않는다. 카메라워크 역시 우아하기보다는 섬짓해 보이고, 그 선택은 이 영화가 만들어내는 정서와 정확히 맞물린다. 본작은 말하자면 ‘싸해지는 분위기’를 너무나도 잘 만들어낸다. 기능적으론 정적으로 일관하는 본작에 텐션을 제공하는 것이겠지만 주제적으론 이 해괴한 플롯과 파편적인 이야기들에 대한 미스터리의 역할이다. 저들이 대체 무엇으로 연결되어 있는지.
<사운드 오브 폴링>은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려 하는 영화이자,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려 하는 영화다.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은 표면적으로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인다. 각자는 각자의 시공간에서 인생을 산다. 그리고 그 인생은 하나같이 평탄하지 않다. 어린 알마는 이해할 수 없는 세계의 단면들에 노출되기 시작하고, 타지로 떠나기 싫었던 리아는 마차에서 투신해 사망한다. 시녀로 들어온 트루디는 다리가 망가진 프리츠의 성욕을 해소하는 ‘잡일’을 떠맡게 되고, 한 세대가 지나 에리카는 억압적인 삶의 형식 속에서 욕망을 표현하지 못한 채 사그라진다. 또 한 세대가 지난 앙겔리카는 자신의 욕망을 굳이 억누르지는 않지만 세상의 시선으로 인해 매도당하고, 다시 시간이 흘러 렌카는 타인의 부정한 시선을 감각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저마다 다른 삶을 살지만, 관객은 그들의 인생이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로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받게 된다. 그것은 아마도 세월이 흐르며 형태만 달라졌을 뿐, 근본적으로 같은 종류의 고통일 것이다. 이 영화가 이룬 가장 놀라운 성취는 조금의 관계도 없어 보이는 별개의 시점들을 가지고 분명히 하나의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통일성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마치 서로를 감싸며 나선형으로 올라가는 담쟁이덩굴들처럼, 각각의 서사는 독립되어 있으면서도 동일한 축을 따라 상승한다.
사진이라는 모티프는 이러한 연결을 시각적으로 강화하는 핵심 장치로 기능한다. 20세기 초의 사진은 지금보다 노출 시간이 길었고, 그 결과 죽은 이는 선명하게, 살아 있는 이는 흔들리며 찍히는 경우가 있었다. 1910년대의 알마가 바라본 사진 속에서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는 바로 그 ‘흔들림’으로 갈라져 있다. 약 70년의 시간을 건너뛴 앙겔리카의 에피소드에 이 모티프는 흥미롭게 변주된다. 사람들과 함께 사진을 찍지만, 그 자리에 도무지 있고 싶지 않아 촬영 직전 뛰쳐나간 앙겔리카는 결국 실종되고, 노출 시간이 짧아진 시대의 카메라 앞에서도 유령처럼 흐릿하게 남는다. 이번에는 ‘죽음에 가까운 사람’이 흐릿하게 찍혔다는 점에서 개념은 도치되지만, 카메라를 매개로 선명한 것과 흐릿한 것이 한 공간에 공존한다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는다.
이렇듯 <사운드 오브 폴링>은 스스로 부여한 한계 안에서 독창적인 형태를 끝까지 밀어붙이며, 결국 독자적인 지점에 도달한 영화다. 매우 비타협적인 방식이지만, 그 외의 다른 선택지는 없었음을 끝내 관철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