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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동안 은행에서 일하다 실직한 서민기는 실직의 불안정함과 오랜만에 맛보는 일상의 여유 사이를 오간다. 어린이 영어학원 원장인 서민기의 아내 최보라는 대학 시절 연인이었던 김일범과 은밀한 만남을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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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말과 IMF의 불안이 산재한 여전히 세련된 수작
긴 복도. 아파트의 저편에서 누군가 걸어온다. 영화의 주인공 보라는 이쪽에서 저쪽으로 걸어가는 한 여자를 지나친다. 보라는 그녀를 의식하더니 어느 집에 들어가 집 안의 남자에게 묻는다. “누구 왔었어?” 남자는 대답한다. “아니.” 보라는 의심했을 것이다. 그리고 관객은 확신했을 것이다. 남자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사실 그 익명의 여성이 남자의 집에서 나왔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작은 의심은 씨앗이 되어 불안이 되고,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아직까지 그들의 관계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관객은 의심한다. 남자가 바람을 피우고 있는 것인가. 어쩌면 감독은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무엇보다 1999년이라는 시대에서는 그렇게 먼저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테다. 그리고 훗날 이 장면을 되돌아보면, 정반대의 이야기였다는 사실이야말로 <해피 엔드>가 파격적이면서도 여전히 기억되는 이유가 된다.
<해피 엔드>의 오프닝이 제시하는 것은 의심 그 자체가 아니다. 의심이 어떻게 불안이 되고, 그 불안이 어떻게 사람 사이를 떠돌며, 마침내 스크린 너머의 관객에게까지 전염되는가에 대한 과정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관객에게 하나의 사실을 알려주는 대신 하나의 감정을 심는다. 그 감정은 이후 우리가 보는 모든 장면을 의심하게 만든다.
그렇게 영화의 다음 장면이자 사실상 첫 장면은 지금의 시선에서도 여전히 파격적인 남녀의 베드신이다. 모르긴 몰라도 관객들은 저마다 보고 싶은 곳을 보겠지만, 감독이 이 장면에 명백하게 넣어둔 소재는 반지다. 반지는 사랑의 영역에서 비공식적인 도구 중 가장 공식적인 도구다. 내가 누군가와 이어져 있음을 타인에게 설명하는 물건이다. 그래서 카메라는 보라의 왼손을 집요하게 포착하고, 일범의 왼손 역시 스쳐 지나가는 듯하면서도 총 세 번 등장시킨다. 무엇보다 베드신 내내 일범의 왼손보다 보라의 왼손이 포착되기 쉬운 방향에서 촬영하고 있다는 것은 다분히 의도적으로 보인다.
관객은 두 사람의 왼손을 바라보며 우선 하나의 사실을 파악한다. 보라는 누군가의 연인이거나 배우자라는 것이다. 일범과 커플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다른 사람과의 반지는 아닐까 하는 의심이 피어난다. 관객 스스로도 예상하지 못한 이 의심은 직전의 오프닝이 뿌려놓은 씨앗에서 자라난다. 영화는 아직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았는데도 관객은 이미 무언가를 의심하고 있다. <해피 엔드>는 불안의 역사다.
그리고 전혀 쌩뚱맞은 남성이 등장한다. 정장을 차려입은 채 책방에서 한가로이 책을 읽는 남성, 민기다. 그의 손에도 반지가 끼워져 있다. 뉴페이스의 등장은 관객으로 하여금 막연했던 의심의 형태를 구체화시킨다. 그의 행적은 지극히 일상적이다. 책방에 갔다가 딸을 픽업해 집으로 향한다. 그런데 그 일상에는 이상한 균열이 있다. 저 남자는 왜 하루 종일 정장 차림으로 돌아다니는가. 왜 집에는 아이의 엄마가 보이지 않는가. 왜 한참 동안 확인하지 않은 듯 아이의 분유에는 벌레가 들어가 있는가. 영화는 관객에게 설명하지 않은 채 이 어긋난 단서들을 쌓아 올린다.
곧이어 혼란스러웠던 순간들이 1차적으로 정리된다. 보라가 새벽에 돌아온 곳은 민기가 있던 집이었다. 그제야 하나의 팩트가 밝혀진다. 보라는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고 나면 오히려 그 이전에 보았던 장면들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다. 영화는 정보를 하나 추가하는 것만으로 이미 지나간 장면의 의미를 바꿔버린다. 관객은 이제 보라의 모든 행동을 다른 눈으로 바라본다.
혼자 옷을 사러 간 보라는 그 옷을 입고 일범에게 향한다. 그러나 무언가 죄책감을 느낀 탓인지 그를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다가 돌아간다. 그리고 그 옷을 입고 향한 곳은 집이다. 불륜을 위해 준비한 옷을 입고 아이를 돌본다. 불륜의 껍데기를 가지고 가정의 일상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맞지 않는 옷이다. 보라는 언뜻 낮이든 밤이든 가리지 않고 용감하게 불륜을 즐기는 인물처럼 보이지만, 그녀 역시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불안을 가지고 있다.
그 불안이 다시 관객에게 전염되는 장면이 있다. 오프닝을 절로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다. 영화는 인물이 불안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기보다, 관객이 그 인물과 함께 불안해하도록 만든다. 앞서 관객에게 심어놓았던 의심의 씨앗은 이제 인물의 감정과 결합한다. 처음에는 관객이 보라를 의심했다면, 어느 순간부터는 보라가 무엇을 의심하는지까지 함께 바라보게 된다. 영화가 만들어낸 불안은 인물과 관객 사이의 경계를 넘어선다.
민기는 은행원답게 알뜰하고 꼼꼼한 사람이다. 책방에서 여러 책을 읽지만 정작 구매는 한 권만 한다거나, 다 쓴 우유갑을 모으는 행동에서도 그의 성격이 드러난다. 그는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막연한 환상을 꿈꾸는 몽상가이기도 하다. 늘 로맨스 소설을 읽는 취미를 가지고 있는 그가 우연히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과거의 친구 미영을 이후로도 다시 만나는 것은, 그 우연한 재회의 순간을 운명이라고 믿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공교롭게도 보라와 민기는 같은 형태의 불안을 공유한다. 집에 전화가 올 때 둘은 서로 자기가 전화를 받겠다고 나선다. 둘 모두에게 상대방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 다른 이유로 같은 행동을 한다. 서로에게 숨기는 것이 있는 사람들은 결국 같은 방식으로 불안해진다.
그런 민기의 변화가 더욱 흥미롭다. 꼼꼼한 성격 덕에 보라의 외도를 감지한 그는 이제 책방에 가서도 로맨스 소설을 읽지 않고 추리 소설을 읽는다. 로맨스 소설에 탐닉할 때의 민기는 세상을 낭만적으로, 아니 순진하게 바라보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읽는 장르를 바꾸어 추리 소설을 보기 시작했다는 것은 단순한 취향의 변화가 아니다. 드디어 민기가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신호다. 사랑과 우연과 운명을 믿던 사람이 이제 세상을 단서와 알리바이와 범죄의 인과관계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보라는 참지 못하기도 한다. 일범이 거듭 전화하자 직접 전화를 받아 너무하다며 소리친다. 그러나 기어이 자신의 집 앞까지 찾아온 일범을 뿌리치지 못한다. 눈물을 흘리며 아이에게 수면제의 반의 반을 먹여 재운 뒤 그를 만나러 밖으로 향한다. 이 장면에서 보라의 불륜은 더 이상 자유로운 욕망처럼 보이지 않는다. 욕망은 이미 불안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그녀는 일범을 만나고 싶어서 움직이는 동시에, 일범을 만나지 않을 수 없어서 움직인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잡힌다. 꼬리가 너무 길면 꼬리뿐만 아니라 전체가 잡힌다. 병원에 입원했던 딸을 데리고 밤늦게 집으로 돌아온 민기는 문 앞에서 일범과 보라의 애정행각을 목격한다. 그는 일범이 떠나기만을 기다리며 숨어 있다가, 드디어 그가 간 것 같아 집의 문을 연다. 그러나 그가 본 것은 떠나기는커녕 보라와 더욱 진한 애정행각을 벌이고 있는 일범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영화가 이 순간을 영리하게 처리하는 방식이 중요하다. 관객에게는 그 장면을 보여주지 않는다. 오직 민기 한 사람의 눈에만 담기게 한다. 카메라는 민기가 무엇을 보았는지를 보여주지 않고, 민기의 표정과 그가 그 장면을 받아들이는 시간을 보여준다. 화면에 담기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그 잔인함은 배가된다. 관객은 민기가 보았을 것을 상상해야 한다. 그리고 그 상상은 영화가 직접 보여주는 이미지보다 더욱 잔인한 이미지가 된다. 영화가 관객에게 처음부터 심어놓은 의심과 불안은 여기서 마침내 민기의 시선과 겹친다.
그리고 민기는 자신이 읽었던 추리소설의 내용을 현실에 옮긴다.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들고, 보라를 죽이고, 그 죄를 일범에게 뒤집어씌우는 것까지 성공한다. 민기의 범죄는 여지없이 완벽했다. 그렇다면 민기가 해피 엔드를 맞은 것인가. 우선 보라는 남편에게 죽었으니 아닐 것이다. 일범 역시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죄를 뒤집어쓴 채 감옥에 갇혔으니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최후의 승리자가 된 민기에게라도 해피 엔드가 남아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에서 민기는 혼자 집을 치운다. 도와주는 사람은 없다. 정리할 줄도 모르는 냉장고 안의 물건들을 바라보며 막막해하고, 식사도 궁상맞게 컵라면으로 때운다.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가정의 자리를 차지했지만, 그곳에는 더 이상 그가 꿈꾸었던 가정이 없다. 결국 <해피 엔드>에는 해피 엔드를 맞은 인물이 없다.
놀랍도록 모던한 영화다. 시대의 한계를 차치하고 보면 이 영화는 여전히 세련되어 보인다. 허투루 쓰지 않는 매 컷과 빽빽한 논리로 가득 차 있는 각본은 1999년이라는 시간을 넘어선다. 특히 전도연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시간의 간극이 더욱 무색해진다. 2026년 현재 당시 전도연의 나이와 비슷한 1999년에서 2001년생 배우 가운데 누가 이때의 전도연처럼 할 수 있을까 묻는다면, 선뜻 한 명의 이름도 댈 수 없을 것 같다. 그만큼 <해피 엔드>에서의 전도연은 엄청나다. 1999년에도, 2026년에도 그녀 전도연은 여전히 대체 불가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