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선화 캐릭터가 너무나도 아쉽다. 여성이어서가 아니라, 그녀의 캐릭터가 너무나 평면적이고 소모적이다. 둘 사이에 놓인 인물이자 사실상 유일한 이성인데도 불구하고, 판을 쥐고 흔들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인물이라는 잠재력이 거의 활용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극을 움직이기 위한 장치처럼 소비되고 만다. 그녀가 여성이기 때문에 이 문제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캐릭터가 가진 서사적 가능성에 비해 지나치게 도구화되었다는 점이 아쉬울 뿐이다.
멜로영화인 것은 괜찮다. ‘첩보영화의 탈을 쓴 멜로영화’인 것도 그 자체로 비판받을 거리는 아니다. 실제로 영화의 감정선은 대부분 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다만 문제는 그 이후다. 본작은 어느 순간 ‘첩보영화의 탈을 쓴 멜로영화의 그림’이 완성된 뒤에도 여전히 자신을 첩보영화로 주장하려는 듯한 인상을 남긴다. 그 결과 뒤늦게 삽입된 액션 장면들이 어딘가 거추장스럽게 느껴진다. 이미 중심이 '감정'으로 기울어진 이후에 기능적으로 끼워 넣은 듯한 액션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장면에서의 연출은 분명 인상적이다. 방탄으로 된 빛나는 투명 정육면체가 있고 그 안에 인간들이 들어 있다. 그것들을 은폐·엄폐물로 활용하며 벌어지는 액션 장면은 분명 눈길을 사로잡고 신선하다. 시각적으로도 강렬한 아이디어다. 하지만 동시에 그 장면은 정서적으로 대단히 폭력적으로 보인다. 밝고/어두운, 여성들/남성들, 피해자/구원자 같은 대비를 만들어내기 위해 피해자들을 그런 방식으로 전시해 두는 것이 과연 적절한가 하는 생각이 잠시 멈추게 만든다. 그 대비의 임팩트를 위해 감독이 인물들을 그 공간으로 몰아넣은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게 된다. 자신이 창조한 캐릭터들이라 하더라도 그들을 감독 마음대로만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로케이션 촬영의 힘은 분명 빛났다. 액션과 감정이 굉장히 뜨거운 영화인데, 그와 대비되는 서늘한 기운의 공간들이 인상적인 균형을 만든다. 영화의 온도가 한쪽으로 치솟으면 다른 한쪽이 자연스럽게 존재감을 드러내며 균형을 잡아준다. 후반으로 갈수록 어느 한쪽으로 기울기는 하지만, 영화 전반에 걸쳐 공간이 감정의 온도를 조절하는 방식은 꽤 인상적이었다.
장면들의 오마주는 반갑다. 다만 감독이 자신이 사랑했던 어떤 시대의 정서까지 함께 끌어온 탓인지, 몇몇 지점에서는 그것이 다소 구태의연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단순한 인용을 넘어 그 시절의 감각까지 그대로 재현하려는 태도는 때로는 향수로 작동하지만 때로는 현재의 영화 속에서 어딘가 낡은 리듬처럼 보이기도 한다.
박정민의 연기는 꽤 설득력이 있다. 특히 지난 청룡영화제 이후 박정민의 멜로를 기다리던 이들에게는 어느 정도 해소가 되는 순간들이 있었을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멜로가 작품의 공식적인 중심이 아닌 이 영화 같은 작품에서 오히려 그가 더 자연스럽게 보인다는 점이다.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사실상 사랑한다고 말해버린 인물 박건이라는 캐릭터는, 시니컬한 표정 아래에 은근한 따뜻함이 숨어 있는 배우 박정민의 이미지와 꽤 잘 맞아떨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멜로는 완전히 실패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그 감정이 영화 전체의 장르적 방향과 끝내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는 점이 결국 이 작품을 조금은 어정쩡한 위치에 남겨 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