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강도, 습격 장면으로 시작하지만 무언가 다르다. 우리가 지금껏 수많은 서부극에서 보아왔던 영웅적인 카리스마나 낭만적인 분위기는 찾아보기 힘들다. 본래 서부극은 본능적으로 '멋'을 지향하는 장르였다. 미국인들의 프론티어 정신을 자극했던 고전 서부극은 물론이고, 소위 수정주의 서부극이라 불리는 작품들에서도 특유의 복장과 정서가 자아내는 멋이 있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의도했든 아니든, 서부극은 멋스러운 장르였던 셈이다. 하지만 <바람 속의 질주>의 오프닝은 이러한 전통에 대한 선언과도 같다. 서부극의 주류를 이루던 멋, 혹은 허세를 단호히 거부하겠다는 선언 말이다. 이 작품은 21세기인 지금 보아도 여전히 희귀한, '멋이 거세된 서부극'의 형태를 보여준다.
몬테 헬만 감독은 서부극의 전통적인 멋이 사라진 자리를 번뜩이는 창의성으로 채운다. 예를 들어, 주인공 일행과 딕 일행을 포위한 치안대의 리더가 총을 발포하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발포와 동시에 왼쪽으로 패닝하며 피어오르는 연기를 따라간다. 그리고 그 연기가 닿은 곳에 잠복해 있는, 리더를 따르는 무장한 동료들의 모습을 비춘다. 이는 단순한 상황 묘사를 넘어, 시적인 방식으로 서사에 팽팽한 서스펜스를 불어넣는 매우 창의적인 연출이다.
반복을 통해 새로운 극적 동력을 부여하는 방식 또한 인상적이다. 영화는 갑작스럽게 새로운 인물인 에반 가족의 평범한 일상을 보여준다. 남편 에반이 나무를 베고, 딸의 말을 듣고 그녀가 준비한 물로 씻고, 식사를 위해 집에 들어가 다 함께 기도를 드린 후 식사하는 모습. 이는 여러 번 반복되었을 법한 지극히 평범하고 안정된 루틴이다. 그러나 다음 날, 주인공 일행이 예고 없이 그들의 집에 들이닥치면서 상황은 급변한다. 낯선 이들의 등장으로 인해, 아내 캐서린과 딸 애비는 이전과 동일한 행동을 반복하지만, 그 행동에는 생존을 위한 필사적인 '연기'의 의미가 더해진다. 이로 인해 평범했던 일상의 공간과 행위는 강력한 서스펜스를 유발하는 무대로 변모한다. 이처럼 <바람 속의 질주>는 서부극의 전통적인 '멋' 대신, 관습을 비트는 감독의 번뜩이는 창의성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영화는 극단적인 허무주의를 관통한다. 선과 악, 강자와 약자 구분 없이 모든 인간은 죽음 앞에서 평등하다는 냉정한 메시지를 던진다. 이 정도로 비정한 서부극은 찾아보기 힘들다. 주인공 일행의 리더처럼 보였던 오티즈는 말에도 제대로 오르지 못하고 허무하게 첫 번째 희생자가 된다. 악랄하고 치밀한 악당 두목처럼 보였던 애꾸눈 리더 딕은 어리석게 저항하다 변변한 유언조차 남기지 못하고 교수형을 당한다. 가정을 지키려던 선량한 가장 에반은 안타깝게도 주인공 일행과의 총격전에서 목숨을 잃는다. 아내 캐서린과 울부짖음과 딸 애비의 멍하니 바라보는 응시를 연달아 배치한 것은 이 장면의 정서를 요약하는 듯하다.
<비겁한 로버트 포드의 제시 제임스 암살>이나 <로스트 인 더스트> 같은 영화들이 허무주의적 서부극으로 꼽히지만, <바람 속의 질주>는 그보다 훨씬 더 건조하고 비정하며, 일말의 낭만조차 허락하지 않는 냉혹함을 보여준다. 주인공 웨스는 결국 치안대의 추격에서 살아남지만, 그의 생존에는 어떤 희망이나 기쁨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의 뒷모습은 위풍당당하기보다는 위태로워 보이며, 그의 앞날에는 꽃길 대신 거친 풍파만이 예상될 뿐이다. 몬테 헬만은 <바람 속의 질주>를 통해 서부극이라는 장르의 변방에서 자신만의 확고한 영역을 구축했다. 그는 서부극의 관습적인 멋과 낭만을 거부하고, 대신 날카로운 연출 감각과 냉정한 허무주의적 시선으로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선보였다.
여담으로, 매우 젊은 시절의 잭 니콜슨이 반가웠다. 처음엔 알아보지 못했을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