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 토포는 스스로를 신이라 믿는다. 몰살한 마을을 보고서 주민들의 복수를 하는 그의 본심은 정의로운 용기보단 스스로를 신으로 여겨 인간을 심판하려는 오만함이 먼저였을 것이다. 거칠 것이 없는 엘 토포는 자식의 자리를 사랑하는 여인 '마라'의 자리로 대체한다.
최고의 실력을 가진 엘 토포는 승리의 쾌락과 연인을 위해 4명의 총잡이를 하나 하나 해치워 간다. (연인을 말로 꾀는 마라의 모습, 또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는 그들의 모습은 아담과 하와가 절로 연상되지 않는가.) 성별이 불분명한 장님을 만나 승리하고 (세상에서 가장 기괴한 전투씬이 등장한다. 액션-'마라'의 리액션-장님의 리액션-말에 탄 장님의 인서트 숏. 이어 등장하는 기이한 리듬의 컷들.) 점쟁이 여자와 남편에게 붙잡히지만 꾀를 써 승리하고 예언자를 만나 자신 또한 상대방에 대한 예측을 통해 승리한다.
그러나 마지막 죽음까지도 초연한 현자를 만나 패배하고 굴욕감에 미쳐버린 뒤 사랑하던 연인에게 총을 맞고 배신당하기에 이른다. 손과 발에 총상을 입은 모습이, 자신을 신으로 칭한 탓인지 예수의 형상을 연상케 한다.
난쟁이들이 구해 준 엘 토포는 동굴 속에서 수십 년이 지난 뒤 깨어난다. 이젠 "나는 신이 아니다, 인간이다."라며 스스로를 칭하는 엘 토포는 거듭된 근친상간으로 인해 기형이 된 인간들이 사는 이곳 지하동굴에서 그들을 구원해줄 지도자로 여김받고 있다.
로마 제국의 압제에서 고통받던 이스라엘 민족들이 자신들을 구원할 그리스도를 기다렸고 그 그리스도가 엘 토포 자신이라 생각한 것인지 혹은 자신인 것을 깨달은 것인지, 혹은 마치 승려처럼 승복을 입고 머리를 민 엘 토포가 자신의 업보를 인지한 때문인지, 엘 토포는 그들을 위해 세상으로 올라가 이들을 구원하려 한다.
세상은 지하보다 더욱 추하고 타락한 곳이었다. 흑인의 노예를 제멋대로 부리다 심심풀이로 죽여 버리고 광기에 가까운 종교가 주민들을 잠식한 한 마을로 엘 토포는 향한다. 난쟁이 여성과 결혼하기 위해 간 마을의 교회에서 오래 전 버리고 떠난 아들과 조우한 엘 토포는 분노한 그에게 인간을 구원할 때까지 잠시만 복수를 미뤄달라 청한다. 결국 아들은 아버지를 용서하고 아들은 아버지를 도와 인간들을 위한 통로를 완성한다.
문을 뚫자마자 동굴 속의 이들은 마을로 뛰쳐나간다. 허나 두더지는 햇빛을 보는 순간 눈이 먼다. 그러나 이들은 마을의 주민들에게 모두 학살당한다. 분노한 엘 토포는 마을을 해치우고 분신 자살을 하게 된다. 비슷한 시각 엘 토포의 아내에게서 그의 아들이 태어났고 장성한 엘 토포의 첫째 아들은 그 둘을 데리고 어디론가 길을 떠난다.
두더지 엘 토포는 미숙했다. 사랑에 빠져 아이를 버렸고 인간을 구원하지 못했다. 허나 그의 아들은 아이를 버리지 않았고 신앙으로 끝까지 인간을 구원하려 했다. 피로 물든 세상 속 윤회의 고리처럼도 보이는 수미상관이지만, 보다 나은 주인공으로 시작되는 다음 인생은 보다 나은 세상을 기대해볼 수 있지 않을까.
강렬하고 논쟁적인 표현이 영화를 지배한다. 통념을 전복시키고 모든 기준을 거부한다. 기독교와 불교 등의 관념을 어지러이 뒤섞으면서도 이를 조합한 독창적인 상상력으로 유래 없는 걸작을 만들어냈다. 한 예술가의 야심이 무한대로 뻗어나간다면 이런 작품이 탄생하는 것일까. 나는 이 영화의 결말에 다다르면서 마치 10시간이 넘는 대서사시를 함께 달려온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오늘 거대한 영화를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