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크레이그의 마지막 이야기다운 감상주의다. 내가 자주 쓰는 표현으로, 촉촉하다 못해 축축할 정도로 영화는 감정적이고 제임스 본드는 가족주의에 얽매인다. 다니엘 크레이그의 마지막 이야기라 넘어가기엔, 007 시리즈의 핵심처럼 느껴졌던 여유로움과 쿨함이 온통 거세된 이 영화에선 그 외의 장점을 찾아볼 수 없었다. 품격이 사라지고 할리우드 삼류 영화에서 볼 듯한 시퀀스들만이 주를 이룬다.
이 영화는 007이 아니라 제임스 본드의 이야기다. 팀플레이가 아닌 제임스 본드의 개인 플레이가 이 영화의 컨셉이며 본드는 내내 고독하다. 본드만을 조명한 탓일까. (다니엘 크레이그의)시리즈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인물일 마들렌은 고작 15분의 출연에 그치는 팔로마보다 인상적이지 못했다. 그 때문인지 레아 세이두의 연기 또한 어색하고 헛돈다는 느낌을 받았다. 빌런 역시 마찬가지다. 태만하다 느낄 정도로 억지스러운 설정은 차치하고서라도 한심할 정도로 시시해 보이는 빌런의 설명적인 캐릭터는 나름의 호연을 보여준 라미 말렉이 안타까워 보일 뿐이었다.
제임스 본드는 죽은 것이 아니라 죽임당한 것처럼까지 느껴진다. 아버지의 희생으로 가족과 세상을 구원하는, 고루한 할리우드의 가족주의 신화 앞에 제임스 본드마저 무너지는 듯했다. 다니엘 크레이그 판 제임스 본드의 신화를 믿는 팬들에겐 기억에 남는 선물일진 모르겠지만 한 편의 영화로만 이 결과물을 대했을 땐 내 입장에선 만족스럽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