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끔찍한 정서로 인해 그만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 실로 오랜만이다. 연락이 끊겼던 남편이 살아 돌아오지만 얼굴의 반이 함몰된 채 괴물로서 돌아와 괴물이자 광대로서 서커스에서나 소비되고, 재봉 공장 국장의 아이까지 임신하며 아름다운 앞길을 꿈꿨던 카롤리네의 일순간은 국장의 어머니로 대변되는 신분 앞에 철저하게 무너진다. 직장과 사랑 모두를 잃은 카롤리네는, 그녀의 처지가 더해져 마치 가스실을 연상케 하는 목욕탕에서 홀로 낙태를 시도하려 하고, 그 ‘저주받은’ 아이를 버린 곳에서 일하게 된 그녀는 ‘저주받은 아이’가 아닌 ‘아이에게 저주를 내리는 자’의 모습을 목도한다.
물론 이 감정이 사건 자체만으로 인함은 아니었을 것이다. 영화는 인물의 비극을 과잉으로 밀어붙이지 않는다. 오히려 차갑게 거리를 유지한 채, 그 비극이 하나의 예외가 아니라 시대의 일부였음을 끈질기게 상기시킨다. 관객은 응원한다. 그래도 살기를. 살아내기를.
이 영화의 성취는 비극만 계속되는 이야기임에도 작위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단조로운 듯 반복되는 음악과 절제된 촬영은 감정을 선동하지 않으면서도 인물의 상태를 정확히 포착한다. 그래서 영화는 울부짖지 않고, 대신 오래 남는다. 이러한 태도는 형식에서도 드러난다. 현대의 흑백영화들, 그러니까 컬러를 충분히 쓸 수 있는 환경임에도 굳이 흑백 포맷을 선택한 영화들은 대개 고전적인 맛을 입히기 위한 요량으로 보이곤 한다. 그 선택은 종종 구태의연한 냄새를 필연적으로 동반한다. 그런데 이 영화의 흑백은 고전적인 향취라기보다는, 마치 색이라는 요소가 도려내진 컬러영화처럼 느껴진다. 이는 과거를 흉내 내려는 선택이 아니라, 희망이 제거된 시대의 감각을 재현하기 위한 방식처럼 보인다.
그 인상은 때로 미하엘 칼라토조프, 특히 <학이 난다>를 떠올리게 하고, 또 한편으로는 대지와 밀착된 구소련 영화들, 더 멀리는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들을 연상시키는 지점들로 이어진다. 인간이 자연과, 그리고 시대와 분리되지 않은 채 짓눌려 있던 영화들의 기억이다. 연기 또한 이 세계를 단단히 떠받친다. 카롤리네 역의 빅토리아 카르멘 손네의 연기도 충분히 훌륭하지만, 다그마르 역의 트린 디어홈은 올해 최고의 연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녀는 메릴 스트립을 연상케 할 만큼, 인물의 내면과 논리를 차분하게 설득한다.
다그마르는 분명한 악인이다. 영화도 그것을 부정하지 않고, 감독 역시 그녀를 옹호하지 않는다. 그녀의 변론은 자기 자신만을 위한 변호이자 궤변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말이 100퍼센트 엉터리로만은 들리지 않는 지점이 있다면, 그것은 이 엄혹했던 세상 때문일 것이다. 악인의 궤변이 궤변으로만 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이 1퍼센트라도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 세계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뜻일 테다. 그리고 이 영화가 끝내 도달하는 불편한 진실도, 바로 그 지점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