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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바레 가수를 사랑하게 된 카렐은 유부녀인 그녀에게 끊임없이 구애한다. 권태와 고독이 감도는 풍경 속에서 그의 좌절이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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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할 줄 몰랐던 남자의 전락 이야기
사랑은 건조함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다. 사랑은 차라리 습도의 감정일 것이다. 누군가에게 스며들고, 서로에게 달라붙고, 쉽게 증발하지 않는 감정. 그런데 벨라 타르의 <파멸>은 기묘하다. 카메라로 담아낸 세계는 비와 진흙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는 세계인데, 그것을 찍는 카메라는 메마른 톤이며, 그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감정은 이상할 만큼 메말라 있다. 화면에는 끊임없이 물이 흐르지만 사랑은 흐르지 않는다. 사랑이라 불리는 감정조차 누군가에게 진정으로 닿기보다 한 사람의 내부에서 굳어가고, 결국 집착과 파괴의 형태로 남는다.
카렐은 바에서 노래하는 한 여성만을 사랑한다. 아무 여성에게나 추근대거나 여러 사람에게 마음을 흩뿌리는 인물도 아니다. 그는 오직 그녀만을 원한다. 하지만 <파멸>에서는 바로 그 일편단심이 문제이자 파멸의 이유가 된다. 카렐은 끊임없이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그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는 듯 매달리고, 그녀에게 버젓이 남편이 있는데도 접근을 멈추지 않는다. 그의 삶에는 돈도, 직업도, 다른 목표도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오직 그녀와 함께 있을 수 있는가 없는가만이 인생을 사는 유일한 이유처럼 보인다.
그 욕망은 결국 행동으로 옮겨진다. 카렐은 자신에게 들어온 불법적인 일을 그녀의 남편 세베스티엔에게 넘긴다. 겉으로는 빈곤한 그들을 위헤 일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실제로는 세베스티엔이 자리를 비운 틈을 이용해 그녀에게 접근하려는 계산이 깔려 있다. 그렇게 그는 잠시 자신이 그녀를 독점한 것처럼 느낀다. 그러나 세베스티엔은 무사히 돌아오고, 그녀 역시 끝내 카렐의 것이 되지 않는다.
그러자 카렐은 태도를 바꾼다. 그는 경찰을 찾아가 '질서에 대한 존중'을 운운하며 밀수 사실을 고발한다. 그러나 그것을 정말 질서에 대한 존중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자신이 아무리 애써도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분노, 그리고 가질 수 없다면 차라리 그것을 둘러싼 세계 자체를 망가뜨려버리겠다는 복수심에 가깝다. 여기서 특히 흥미로운 것은 카렐이 세베스티엔을 신고한 죄목이 애초에 자신에게 들어왔던 일이었다는 점이다. 카렐은 처음에는 위험한 일을 자기 바깥으로 밀어낸다. 자신의 사랑을 방해하는 존재를 치워버리려, 자신이 맡아야 했던 일을 세베스티엔에게 넘긴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에서 그는 바로 그 일을 다시 끌어와 경찰 앞에 내놓는다. 자신이 타인에게 떠넘겼던 파멸을 스스로 다시 불러들이는 셈이다.
이 때문에 '카렐의 고발'이라는 행동의 형태는 단순한 복수 이상의 것으로 우리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파괴하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이 속해 있던 관계까지 함께 무너뜨린다. 세베스티엔을 제거하려 하고, 자신이 속해 있던 범죄의 연결망을 무너뜨리고, 그녀와의 관계마저 돌이킬 수 없게 만든다. 타인을 자신의 삶에서 하나씩 밀어낼수록 정작 카렐 자신에게 남는 세계는 점점 좁아진다. 결국 그는 단지 사랑에 실패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얻으려는 과정에서 자신이 머물 수 있는 세계 자체를 없애버린다. 카렐은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방식으로 자신을 지키려고 하지만, 그 행동 하나하나가 결국은 오히려 자신을 고립시키는 쪽으로 되돌아온다. 파멸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려고 할수록 파멸은 원을 그리며 다시 카렐에게 돌아온다. 영화 마지막에 그가 진흙 위에서 개와 마주 보고 짖는 모습은 그 순환의 종점이자, 마치 거울을 보는 인간의 모습처럼 보인다. 인간관계를 하나씩 파괴한 끝에 그가 잃어버린 것은 사랑하는 여성이 아니라, 인간의 세계 안에서 자신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인간의 위치에서 가져야 할 것을 모두 잃어버린 존재는, 누군가가 흘린 콩고물이 있나 매일같이 땅을 뒤지듯 바라보는 들개와 다를 것이 없다고.
이런 맥락에서 더욱 흥미로운 것은 영화의 그녀에게 끝내 이름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영화에서 훨씬 작은 비중을 차지하는 세베스티엔이나 바의 주인에게는 이름이 있지만, 카렐의 모든 행동을 움직이는 중심에 있는 그녀에게는 이름이 없다. 그것은 우연이라기보다 영화의 구조와 맞닿아 있는 선택처럼 보인다. 카렐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 그녀라는 특정한 인간이었는지는 의심스럽다. 어쩌면 그는 꼭 그녀가 아니더라도 집착할 누군가가 필요했던 것인지 모른다. 잿빛으로 굳어버린 세계를 버티기 위해 붙잡을 하나의 대상, 자신의 삶에 아직 무언가 남아 있다고 믿게 해줄 하나의 관념 말이다. 카렐이 사랑한 것은 한 사람의 고유한 이름과 삶이 아니라, 그녀에게 투영한 자신의 욕망이었다. 그렇기에 그녀가 자신에게 오지 않는 순간, 카렐은 그녀를 포기하는 대신 세계를 파괴하는 쪽을 선택한다. 사랑이라고 믿었던 감정의 내부엔, 처음부터 상대를 향한 마음보다 자기 자신을 구원하고 싶은 욕망이 더 크게 자리하고 있었던 셈이다.
<파멸>에서 사랑은 그래서 습도의 감정이면서 동시에 가장 건조한 감정이 된다. <파멸>은 그녀를 사랑했기에 파멸한 남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녀를 사랑하는 방식 외에는 세계와 관계 맺는 법을 알지 못했던 남자의 파멸 이야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