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슬란드라는 나라는 묘하게 사람을 집어삼킨다. 한반도 중 남한과 비슷한 면적에 서울 도봉구 인구 수준인 약 40만 명의 사람이 살고 있다. 그러나 그 드문 인구보다도 더 뚜렷하게 다가오는 건 공간의 밀도다. SF 작품의 로케이션으로 자주 쓰이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나는 이 나라를 시규어 로스, 유로 2016의 축구, 그리고 감독 프리드릭 토르 프리드릭슨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접했다. 그리고 그의 영화 <버림받은 천사들>을 보고 나서야 이 나라가 단지 ‘특이한 나라’가 아니라, 어떤 불가항력적인 정서를 품은 압도적인 공간임을 실감하게 되었다.
<버림받은 천사들>은 줄거리를 따라가기보다 어떤 공기에 잠기는 경험에 가깝다. 그 공기란 곧 아이슬란드라는 공간이 내뿜는 감정이다. 극도로 낮은 인구 밀도, 변화무쌍한 자연, 짧은 낮과 긴 밤. 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항우울제 소비율. 이 모든 것들이 한 개인의 정신을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침식시킨다.
폴의 기이한 행동들은 단순한 실연 때문이 아니다. 의사인 닥터 브린욜프의 말처럼, 그의 행동은 이 땅에 존재하게 됨으로써 드러난 어떤 내면의 분열처럼 느껴진다. 영화는 그를 병원에 가둬두지만, 병원의 인물들은 대부분 선하고 평온해 보인다. 오히려 폴이 정상처럼 보이는 지점. 하지만 누구든 ‘트리거’를 만나면, 그들이 그 자리에 있는 이유가 드러난다. 병원 안과 밖의 경계는 모호하다.
폴의 유일한 친구 론발도는 의사이며, 사회적 성공을 이룬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폴보다 먼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의 죽음은 폴이 자살을 결심하는 계기가 된다. 높은 지위조차 이 땅의 중력에서 벗어나게 해주지 못하는 것이다.
그가 마주하는 세상은 무정하고 차갑다. 밥을 먹다 불량배에게 돈을 빼앗기고,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도 돌아오는 건 진심 없는 호응과 신청곡 요청뿐이다. 삶이 너무 무겁게 느껴졌고, 그는 육신에서 해방되고자 한다. 결국 죽음을 통해서만 진정한 자유에 닿는다. 그제야 그의 영혼은 아이슬란드의 공기 속에서 가볍게 떠오른다. 연출은 그 심리를 더욱 강조한다. 잦은 디졸브는 등장인물들을 유령처럼, 혹은 필멸의 존재처럼 흐리게 만든다. 배경과 인간은 분리되지 않고, 그 속에서 부유하며 지워진다. 시각적 기법 자체가 인간의 무력함을 드러내는 장치가 된다.
나는 사이코드라마를 꽤 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이 영화는 유독 힘겹게 다가왔다. 이유는 명확하다. 단지 주인공의 비극 때문만은 아니다. 애매한 CG, 불안정한 카메라, 감정의 설명이 철저히 생략된 스토리텔링. 그 안에서 유일하게 살아 움직이는 건 배우 잉바르 에거트 지거드슨의 경이로운 연기다.
영화를 보며 문득 <택시 드라이버>가 떠올랐다. 길이 너무 많은 도시 뉴욕에서 길을 잃은 트래비스 비클. 그리고 길 자체가 없는 나라에서 방황하는 폴. 둘 다 영화 데이트에 실패하고, 세상과의 단절 속에서 분노를 표출한다. 다만 트래비스가 총을 든 뒤 영웅 서사의 주인공이 되는 반면, 폴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침묵 속에서 조용히 사라진다.
결국 <버림받은 천사들>은 묻는다. 인간의 정신은 어디까지 자기 것으로 남을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정신을 잠식하는 공간의 힘은 얼마나 거셀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