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한 글을 지면으로 옮겼습니다.

어떤 영화가 좋은 영화일까? 좋은 영화란 어떤 영화일까?
비호감적인 엘리트주의로 다분히 비춰질 수도 있는 발언이기에 먼저 우려를 품은 채 말하자면, 나는 영화의 러닝타임이 시종 화려한 CG와 내내 눈을 뗄 수 없는 기술의 성찬으로만 이루어진 영화는 좋은 영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영화 스스로 자신의 특수효과의 화려함을 과시하려 하거나, 크게 영화의 기술적인 파트로 묶일 수 있는 편집, 연기, 촬영 등의 요소만을 내세우며 되려 양두구육에 빠진 많은 영화들을 보면서, 과연 이들을 두고 좋은 영화 혹은 훌륭한 영화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질문을 살짝 틀어 보다 원론적인 질문을 하고자 한다. 영화적인 것이란 무엇일까? 영화만이 가질 수 있는 매력은 무엇일까? 나는 이미지와 이미지의 충돌로서 생겨나는 정서, 혹은 하나의 이미지 안에서 생겨나는 '리듬과 생동감'이라고 생각한다. 영화가 내러티브에 지나치게 의존하게 되면 영화는 결국 문학의 아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영화가 예술 안에서의 독점적인 가치를 가지기 위해선, 내러티브에만 집착하는 태도는 지양해야 하지 않을까.
영화를 뜻하는 Movie(Moving Picture의 준말), 혹은 Motion Picture라는 단어의 정의가 그러하듯 영화는 운동하는 세상의 이미지를 포착하고, 혹은 가공과 편집을 거침으로 탄생한 이미지들의 총합으로 생겨나는 정서를 관객에게 전달하는 매체라고 생각한다. 이는 내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와 테렌스 맬릭,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오즈 야스지로와 같은 감독들의 영화, 그리고 궁극적으로 오늘 이야기에 중점이 될 왕가위의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정서와 태도는 수 십 년 전과 현재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는 영화와 같은 예술을 향유하는 태도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시대적 이념의 한계로 인한 차이는 존재할 것이다. 이를테면 초기 서부극에서 백인과 아메리카 원주민을 선악의 이분법으로 정의한 것은, 현재의 시선에선 윤리적이지 않으며 당연히 문제시될 요소일 것이다. 또한 초기 007 작품들처럼 이성을 물건이나 수단 다루듯 하는 행동들을 멋으로 포장하는 정서는 이제는 구태의연한 요소일 것이다. 이러한 것을 차치한다면 나는 인간의 보편성을 제법 신뢰한다. 시간과 공간을 막론하고 인간은 누구나 멜랑콜리해질 때가 있고, 누구에게나 고독이라는 감정을 가지고 있으며, 누구나 자신만의 영역에서 힙해질 때가 있고 키치해질 때가 있지 않던가.
위와 같은 여담을 한 이유는, 이제는 한때의 사조와 문화로 기억되는 홍콩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해보고 싶기 때문이다. 감정의 용광로 같았던 홍콩 영화에 대해 지금의 많은 이들은 "유치하다.", "오글거린다."라는 평들을 하곤 한다. 그런데 나는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고 싶은데, '힙'하고 '쿨함'이 미덕으로 인정받는 동시에 한편으론 이러한 태도를 취하기를 강요받기도 하는 작금의 흐름 속에서 많은 이들이 자신의 감정과, 이를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 꽤 솔직하지 못한 것은 아쉽게만 느껴진다. 내가 홍콩 영화를 지지하는 이유는 인간이 겪는 사랑, 후회, 우정, 허무 같은 감정들을 때로는 사실적이고 때로는 은유적으로 표현해 낸 시대의 영화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상술했듯이 이러한 감정들이 단지 특정 시기에만 공감하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들이 아닌, 시대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공감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거칠게 이야기하자면 나는 영화의 장르는 크게 판타지와 다큐멘터리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비현실적인 외모의 두 주인공이 운명적인 사랑을 하거나, 지구의 영역을 아득히 초월한 세계에서 전 우주의 운명을 두고 대결을 펼치거나, 모든 것이 호쾌하게 폭발하는 동시에 절대적으로 안전한 주인공의 액션이 즐비한, 영화라는 장르의 큰 축 중 하나는 분명 '판타지'다. 다른 한 편에선 인위적인 설정과 조작을 최대한으로 배제하여 현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거나, 제법 진중한 태도로 관념과 가치를 탐구하며 삶에 대한 성찰을 유도하는 '다큐멘터리적' 영화들이 있다. 어쩌면 왕가위는 가장 판타지적인 작법을 통해 다큐멘터리적 주제를 전달하는 감독일 것이다. 그의 영화를 보면서 숨 막히는 영상미와 연출에 다분히 비현실적인 느낌을 받으면서도, 영화의 중심에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들 혹은 아름다웠던 공간과 순간에 대한 인간적인 그리움의 정서들이 가득 담겨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를 두고는 "스토리가 빈약하다."라는 비판이 주를 이룬다. 왕가위의 팬으로서 거칠게 변호를 하자면 왕가위는 스토리를 못 만드는 게 아니라 안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왕가위는 관객이 영화의 내러티브에 시종 끌려다니는 소극적인 감상을 하게끔 유도하는 감독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의 내러티브가 빽빽할수록 관객은 수동적이 될 가능성이 커진다. 수많은 사건과 수많은 설정들을 기억하고 쫓기에 바쁜 관객에게, 영화의 정서를 음미하고 능동적인 감상을 즐길 여유는 없을 것이다. 왕가위가 진정 원하는 것은 서사가 아닌 서정이다.

물론 상술한 변호가 왕가위의 모든 작품에 이용될 수 있는 면죄부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영광의 20세기를 지나온 뒤 맞이한 21세기의 첫 작품인 <2046>에서 왕가위의 그 서정은 마치 임계점을 넘어버린 듯 했다. 말하자면 왕가위는 그때까지 끓기 직전의 99도의 물과 같은 작품을 만들었다가, 물이 끓는 것을 넘어 넘쳐 버린 듯한 작품을 내놓았다는 것이다. 왕가위의 의의는 절묘함에 있었다. 감정들이 들끓고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은 인물들이 스크린 안에 가득하지만 그럼에도 일정 이상의 폭주로 이어지지 않는. 그렇지만 <2046>에서는 자신이 절묘하게 타던 선을 넘어버린 듯 했다는 것이다.
더욱이 <2046>에서는 마치 20세기에 예술혼을 모두 다 써버린 한 예술가의 매너리즘을 관찰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전작의 자기복제와도 같은 면모가 상당히 엿보였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전작들의 후속작 기능을 하는 <2046>의 역할이 있었음은 인정하지만 계승과 답습에는 큰 차이가 있기에, 시간과 공간과 설정에서 왕가위의 전작들을 내내 떠올리게 만드는 것은 어느 순간 계승이 아니라 답습이고 매너리즘이라 받아들이기 쉬웠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지점을 왕가위라는 한 작가의 일관성이라고 서술하고 싶다. 왕가위는 필생에 걸쳐 같은 질문을 반복해 온 예술가이며, 그렇기에 '못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안 만드는 것'이라는 그의 선택은 단순히 한 편의 영화에서가 아니라 그의 필모그래피를 관통하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나는 왕가위의 영화는 '멜로 영화'가 아닌 '사랑 영화'처럼 보인다. 왕가위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구구절절 풀어내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생략과 암시, 때로는 불친절한 흐름을 통해 사랑의 감정을 오롯이 응시한다. 왕가위는 다큐멘터리가 그러하듯, 기록의 영화를 만들어낸다. 그의 영화에선 현재보다 과거가 중요한 듯 느껴지며, 홍콩의 가장 찬란했던 시절과 가장 혼란스러웠던 시절을 프레임 속에 봉인하는 방법으로 영화를 만들어냈다. 이에 대해선 밑에서 조금 더 이야기해 보자.
영화라는 종합 예술에서 왕가위의 작품 세계의 핵심은 크게 두 가지다, 시간과 공간. 왕가위는 흘러가 버린 시간 속의 침전된 감정을 응시하며 스쳐가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눈부시게 포착하여 순간을 영원히 간직하는 방법을 스크린 안에 구현한 감독이다. 다시는 돌아가지 못하는 것이 과거이며 지나간 순간은 이미 과거에 머무르기에 왕가위는 순간의 강렬한 감정을 늘리고 확장시켰으며, 그렇기에 우리는 그가 사로잡은 시간 속으로 언제든 되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작품들의 소소한 순간이나 사소한 오브제들에서 이러한 태도는 선명하다. <아비정전>의 오프닝에서 장국영은 장만옥에게 시계를 쳐다보며 말한다. "1960년 4월 16일 세 시 일 분 전. 그 순간 당신은 나와 함께 있었어요. 당신 덕분에 난 그 일 분을 영원히 기억하게 되었군요. 지금부터 우린 친구예요. 이건 당신도 부정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죠. 이미 지나간 시간이니까." <중경삼림>의 1부를 담당하는 실연한 사복 경찰 금성무는 만우절에 헤어진 자신의 연인을 기다리며 자신의 생일인 5월 1일까지가 유통기한으로 기입되어 있는 통조림들을 사 모은다. 자신의 사랑의 시간을 통조림이라는 물건으로 환원한 금성무는 5월 1일이 되어서도 그녀에게 연락이 오지 않자 그대로 그 통조림들을 먹어 없애버린다. 2부에서도 왕가위의 이러한 태도를 쉽게 읽을 수 있다. 헤어진 연인에게서 왔다는 편지를 읽어보라며 왕페이가 양조위에게 그것을 건네주지만 양조위는 이 커피를 다 마신 뒤 읽어보겠다며 커피를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마시는데, 스텝프린팅이라는 기법을 통해 물리적으론 찰나인 시간을 영원처럼 늘려 저 편지의 내용을 조금이라도 더 있다가 읽고 싶은 양조위의 마음을 은유한다. 누군가에겐 찰나와도 같은 시간이기에 무심코 지나갈 '순간'들을 왕가위는 한 씬을 할애하여 영원으로 늘려놓는다.
또한 왕가위는 세상에서 공간을 가장 잘 이용하는 감독 중 한 명이다. 놀라운 것은 왕가위의 영화를 보면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공간은 사실상 또 한 명의 인물처럼 기능한다는 것이다. <아비정전>에서는 1960년대 홍콩의 좁고 축축한 공간을 빛과 그림자의 미장센으로 채색하며 고립된 인물의 내면을 그려냈다. <중경삼림>에서의 생뚱맞은 대사들은 그저 양조위의 내면을 은유하는 집에서의 감정일 뿐이다. <동사서독>에선 고비사막으로 건너가 황량하고 망망한 대지를 프레임 안에 가득 담았으며, <춘광사설>과 <화양연화>에선 지극히 '시네마틱'한 압축의 공간 속에 인물들을 가두고 끊임없이 그들을 접촉시켰다.
이 지점에서는 왕가위의 오랜 동반자인 촬영감독 크리스토퍼 도일의 공로를 분명 언급하고 넘어가야 되겠다. 왕가위의 영화 속 공간이 그저 단순한 물리적 배경에만 머무르지 않고 등장인물들과 함께 공존해 있는 또 다른 생명으로 기능할 수 있었던 것은 크리스토퍼 도일이라는 촬영감독의 역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시간을 왜곡해 늘리는 스텝프린팅, 광각 렌즈로 공간을 왜곡하며 인물의 코앞까지 다가가는 핸드헬드, 그리고 비현실적인 채도의 색감으로 도일은 왕가위의 영상을 창조했다. 또한 그는 공간 안의 문틀, 창문, 거울과 유리 너머로 인물을 끊임없이 가두었다. 왕가위의 영화 속 인물들은 늘 무언가에 둘러싸이거나 가려져 있고, 좁은 화면에서 고립된 인물들은 역설적이게도 그곳에서 가장 진한 농도의 감정을 내뿜는다. 앞서 언급한 '시네마틱한 압축의 공간'이라는 것은 아마도 왕가위가 머릿속으로 그린 것이 시작이었겠지만, 그 우주를 구현해내는 것에 있어선 도일의 공로도 왕가위에 버금갔을 것이다.

추가적으로, 왕가위는 선곡 센스가 가장 뛰어난 감독 중 한 명이다. 비단 오리지널 스코어가 아니더라도, 전혀 다른 스타일의 음악을 그의 영화에 끌어들여 독창적인 재해석을 보여주며 관객에게 강력한 각인을 시킨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왕가위의 영화를 본 뒤 "내용은 기억이 하나도 안 나지만 음악은 계속 귀에 맴돈다."라는 식의 후기가 차고 넘친다. <아비정전>에서의 'Always in my heart'나 'Maria Elena', <중경삼림>에서의 'California Dreamin''과 '몽중인', <춘광사설>에서의 'Finale'와 'Happy together', <화양연화>에서의 'Yumeji's Theme'와 'Quizas, quizas, quizas' 같은. 왕가위는 음악만으로도 분위기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센스가 탁월하다. 영화라는 종합 예술에서, 그가 가져온 음악과 그가 선택한 공간은 왕가위라는 거장의 우주에서 재탄생한다. 시간, 공간, 음악이 모여 만드는 왕가위의 정서는 그렇기에 유독 특별하고 독창적이다.
<화양연화>의 유명한 순간을 짚고자 한다. 장만옥이 자신이 머무는 아파트의 좁디좁은 계단을 내려가며 국수를 사러 가는 장면이다. 장만옥은 계단을 내려가다 양조위를 마주치고, 둘은 짧은 눈인사를 주고받은 채 서로의 갈 길을 간다. 원경으로 사라지는 장만옥과 전경으로 다가오다 카메라 옆으로 지나가는 양조위. 카메라는 아무도 없는 복도만을 응시한다. 곧이어 난데없이 소나기가 내리고, 미처 비를 피할 우산을 마련하지 못한 양조위는 그 아무도 없던 복도로 비를 피하기 위해 황급히 다시 달려온다. 맞은편에서 내려오는 장만옥을 받은 카메라는 마찬가지로 소나기에 당황하는 장만옥을 비춘다. 슬로우모션으로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과 인물의 움직임. 둘은 함께 있지 못하고, 마주치더라도 오래 함께 있지 못한다. 그렇지만 자신들의 의도는 아니었다 항변할지 모르겠지만 둘은 거의 필연적이다시피 서로를 되돌아보게 되고, 그 되돌아봄은 3박자로 반복되는 'Yumeji's Theme'에 더해 어긋남에서 기인한 그리움으로 빚어진다. 그들은 서로에게, 또 우리에게 사랑을 직접 말하고 있지 않지만, 왕가위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도 인지하지 못했을 그들 무의식의 한 구석에서 발현된 사랑이자, 어쩌면 거의 운명적인 형태로 서로에게 다가온 사랑임을.
물론 이 모든 해석은 해석하는 자들의 몫이지, 모든 관객에게 강요될 무언가는 아니다. 왕가위의 영화는 이러한 해체와 분석 없이도 관객을 충분히 사로잡기 때문이다. 몇 년 전, 크리스토퍼 놀란의 <테넷>으로 인해, "이해하지 말고 느껴라."라는 문장이 유행했었다. 이 구절을 왕가위의 영화에게도 적용시키고 싶다. 왕가위는 자신의 영화를 의도적으로 어렵게 만들지 않는다. 그는 플롯과 전개를 의도적으로 꼬아놓기를 즐기지 않으며, 엇갈리는 해석을 관객에게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의 영화에서 느닷없이 장국영이 맘보춤을 추면 그저 홀린 듯 즐기면 되고, 난데없이 이과수 폭포가 등장하면 눈앞의 압도적인 이미지를 받아들이면 된다. 우리는 영화가 흘러가는 대로 받아들이며 아련하고 강렬한 감정에 오롯이 몰입하면 된다. 해석은 평단의 몫이다. 혹은 왕가위와 사랑에 빠지게 될 당신의 몫이다.

<택시 드라이버>의 촬영 감독인 마이클 채프먼은, 영화는 가까운 과거의 고고학이며 이를 그려내는 것이 바로 영화가 하는 일이라고 이야기했다. 러시아의 전설적인 거장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자신의 저서 [봉인된 시간]에서 영화라는 것은 시간을 봉인하는 예술이라 이야기한 적 있다. 저마다 표현은 조금씩 다르지만 향하는 곳은 결국 같다. 영화는 흘러가버릴 시간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한때를 스크린 안에 붙잡아 두는 일이라는 것을.
왕가위의 영화가 하는 일 역시 그러하다. 왕가위는 그의 영화에서 홍콩의 가장 찬란했던 시절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홍콩의 화양연화를 가장 영화적으로 스크린에 전시하고 보존한 감독이었다. 나를 포함해 그의 영화를 본 많은 이들이 가 본 적 없었던 도시에 대한 향수를 느끼고, 또한 자신이 존재하지 않았었던 시간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을 느꼈다는 감상은 단지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