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한 글을 지면으로 옮겼습니다.

어머니는 밤에 집에 들어온, 이제 중년이 된 딸을 "얘야."라며 맞는다. 어디서 늦게까지 뭐 한 거냐며 딸의 행적을 추궁한다. 딸의 얼굴에도 이미 분명한 주름이 보이는데도, 어머니는 딸을 아이 다루듯 한다. 가방을 검사하고 의상을 통제하고 소비에 잔소리하는 어머니에게 화가 난 영화의 주인공 에리카는 순간 화를 참지 못해 어머니의 머리끄덩이를 잡지만, 이내 울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무너진다. 그리곤 한 침대에 나란히 누워 함께 잠이 든다. 이 자리는 명백히 에리카의 아버지의 자리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지금 정신병원에 수감되어 있다. 때문에 에리카가 그 자리를 채우고 있는 형국이다. 당연히 맞지 않는 옷이다. 맞지 않기에 이 장면이 영화에 필요한 것이다. 언뜻 고상한 집안 같지만 무언가 억제되고 뒤틀려 있는.
에리카는 명망 있는 피아노 교수다. 재능이 있어 보이는 한 제자의 이야기를 어머니에게 하지만 어머니는 "아무도 너보다 뛰어나서는 안 돼."라는 말로 대답한다. 그것은 딸에 대한 모성처럼 들리지 않는다. 자신이 소유한 마리오네트에 대한 스스로의 자부심이자 집착처럼 들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후 무성의할 정도로 미니멀한 오프닝 타이틀 하나만이 관객의 눈앞에 던져진다.

정적이지만 적지 않게 충격적이었던 프롤로그 이후의 씬들은 에리카의 대외적인 모습들을 보여준다. 그녀는 창 밖만을 보면서 레슨생의 문제를 세밀하고 깐깐하게 짚어낸다. 하네케는 이 지점에서 숏의 박자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면서 거칠게 오프닝 크레딧들을 사이사이에 삽입한다. 편집의 리듬마저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역설하는 듯. 이어지는 장면인 청음회 파티에 주인공 모녀가 참석하는 장면에서도, 차분한 말투, 도도한 애티튜드, 거기에 부정 못 할 실력까지. 그녀에게 첫눈에 반한 공대생 '발터'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흥분하며 이런저런 말을 거는 발터의 앞에서도 그녀는 차분함을 잃지 않는다. 사회적으로 그리고 대외적으로 에리카는 명백히 '강함'의 인물이다.
여기서 프롤로그의 톤을 되새김질할 필요가 있다. 한번 생각해 보자. '대외적으로는 고고하고도 완벽주의의 예술가로 알려져 있는 인물이 실제로는 억압되어 있고 성도착증을 가진 인물이었다'는 사실이 있다면, 아마도 대다수의 감독은 전자의 면을 먼저 배치하고 후자의 면을 그다음에 배치했을 것이다. 남들이 몰랐던 인물의 비밀은 시간적으로 뒤에 배치하는 것이 상식적일 테니까. 그러나 흥미롭게도 미하엘 하네케는 프롤로그라는 구조를 따로 만들면서까지 후자의 면을 먼저 제시했다. 말하자면 영화가 에리카의 '약함'으로 시작하도록 의도했다는 것이다.
강함 다음으로 등장한 파트는 순서적으로 '약함'이고, 이 지점은 사실상 병증과도 같은 에리카의 면모가 집중적으로 관찰된다. 길을 걷다 행인과 어깨를 부딪힌 에리카는 당황한 듯 뒤돌아본 뒤 자신의 어깨를 한 번, 두 번, 세 번을 턴다. 사실 비슷한 지점은 '강함' 시퀀스에서도 등장했다. 청음회 공간의 엘리베이터를 타려 했을 때, 웬 남자가 헐레벌떡 엘리베이터 앞으로 뛰어오는 것을 보고서도 에리카는 문을 닫아버린다. 이 장면은 에리카가 '무례'한 사람이라기보단, '낯선' '남성'을 경계하는 행동으로 읽혔던 것이다. 단지 가까워지든 아니면 이처럼 실제로 닿든, 에리카는 누군가와의 접촉에 있어 매우 낯설고 미숙한 사람처럼 보인다. 그렇게 걸어서 당도한 곳은 '남성'들이 가득한 성인용품점, 그중에서도 개인용 비디오방이다. 그녀는 포르노를 시청하면서, 아마도 누군가의 체액이 담긴 휴지를 집어 냄새를 맡기까지 한다.

인간은 여러 면모가 있다. 부모에게 억압받는 자식일 수 있고, 사회에서 카리스마 있는 보스일 수 있고, 이상한 성도착을 가진 존재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들이 한 인물에게 순서대로 연이어 나열되며 충돌한다는 것은 하네케의 명백한 의도를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에리카라는 인물이 얼마나 위태로우며 극단적이고 타인과 단절된 인물인지를, 하네케는 '나열성이 강한 편집'으로 설명한다.

약함과 강함이 나열되고, 강함의 순간에서도 그녀의 균열이 관찰되는 이 편집의 논리는 이후로도 이어진다. 다음은 '강함'의 장면이다. (다시 말하자면 여기서의 '강함'은 그녀의 대외적 페르소나가 씬의 중심에 서 있는 장면을 의미한다.) 발터는 에리카의 레슨을 방해하면서까지 그녀의 커리큘럼을 듣고 싶다며 찾아오고, 참가자의 눈물 콧물을 싹 빼놓은 살벌한 오디션 자리에서 야망 넘치는 곡을 선곡한 발터는 훌륭하게 곡을 연주하기에 이른다. 자리에 있는 교수 모두가 그의 연주가 완벽했다는 와중에도 에리카는 자존심을 부리는 듯 심드렁한 말투로 일관하지만, 다른 곳을 바라보며 꼿꼿했던 그녀의 고개가 그의 연주를 들으면서 깜짝 놀라며 흔들렸고, 눈도 손도 혀도 어쩔 줄 몰라 했던 일련의 시간들을 우리는 보았다.
다음은 약함(개인적인 면모가 등장하는 장면)의 장면이다. 에리카는 집의 화장실에서 면도칼을 가지고 자신의 성기에 자해를 한다. 우선 장면 자체로 대단히 잔인하고 기형적인 장면이지만 행위의 속성으로만 본다면 흥미로운 장면이기도 하다. 약함의 장면, 그 중에서도 극단적인 속박의 모티프로 등장하는 집에서 에리카는 스스로 벌이는 자해로 인해 어쩌면 일종의 해방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신체에 주도권을 가진 유일한 순간이니까. 이 장면은 이 영화의 공식적인 첫 혼돈의 순간이다.
그러나 에리카의 다리에서 흐르는 피를 보고 어머니는 그것을 생리혈로 규정한다. 어머니가 딸이 자해한 것을 알아차리고서도 일부러 그렇게 말을 한 것인지, 아니면 진짜 그것이 진짜 생리혈이라고 생각한 것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요지는 그 지점이 아니라, 에리카가 스스로의 주도권을 가지고 벌인 행동이, 자신의 어머니로 인해 "정상적인 현상"으로 덮여버린 것에 있을 것이다. 어머니는 이런 생각이 기저에 놓였을지도 모른다. 내 딸이 그런 더럽고 끔찍한 짓을 할 리가 없다고. 아니, 그런 생각이 아예 선택지에 없었을 수도 있겠다. 어떤 행동을 해도 어머니의 간섭과 테두리 안에 규정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에리카는, 그래서 굳건해 보이지만 속은 썩어 있다.
다음 날 포르노 매장에서 에리카는 레슨생을 만난다. 그 일을 가지고 에리카는 레슨 중 그를 마구잡이로 공격한다. 훈계를 넘어 모욕에 가까울 정도의 말들을 뱉은 뒤, 그 학생의 다음으로는 문제의 인물 발터가 입장한다. 얼음처럼 냉랭한 그녀 앞에서 따박따박 말대답을 하고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는 발터. 그런 발터 앞에서도 에리카는 끄떡이지 않고 그의 고백을 밀어낸다. 이에 풀이 죽어 돌아가는 발터. 그러나 에리카의 그런 태도는 진심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발터가 떠나자 그를 미행하며 어디로 향하는지를 파악하는 에리카의 모습. 발터는 아마도 그녀가 처음으로 신경 쓰는 존재다.
에리카가 다음으로 향한 곳은 매점이다. 밝은 조명, 많은 손님들. 그러나 그곳에서 에리카는 혼자다. 교수라는 맥락이 사라진 공간에서의 에리카는 밝고 북적이는 공간일지언정 쓸모없는 존재이자 외톨이다. 어떤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못하고 우두커니 앉아있는 것 외엔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그 생명의 공간은 에리카와는 어울리지 않는 공간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직후 그녀가 향한 곳은 어두운 야외의 자동차 극장이다. 자동차 안에서 이루어지는 타인의 성관계를 관음하는 비참한 신세처럼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그 순간과 그 공간이 에리카에게는 직전의 공간보다 행복하고 자유로워 보인다. 에리카의 속성은 밝고 타인과 접촉하는 공간보다는 어둡고 습하며 타인과 접촉하지 않은 채 훔쳐보고 관음하는 공간과 더 가까우니까. 마치 이 인물이 왜 이렇게까지 되었을까를 상기시키듯 직후에는 귀가한 에리카의 뺨을 때리며 왜 이렇게 늦었는지 캐묻고 무엇을 입고 갔는지 옷장을 헤집어 놓는 어머니의 장면이 코다로 붙는다.

에리카의 레슨생 중 재능이 가장 좋아 보이는 안나는 연주회를 앞두고 있다. 리허설을 앞두고, 긴장한 탓인지 설사가 나 지각한 안나. 그런 안나를 발터는 웃게도 해 주고, 연주를 도와주기도 한다. 그것을 가만히 보고 있던 에리카는 눈에 눈물이 고인 채로 안나의 외투가 걸려 있는 곳으로 향해 그 코트의 주머니 속에 깨진 유리 병을 넣는다. 이제 그녀의 혼돈을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이제까지는 '도덕적 결함'의 차원으로 용서의 여지가 있는 행동 안에 있었지만,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그는 이제 자진해서 범죄를 저지르기까지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안나는 손을 다쳐 그곳은 아수라장이 되고, 피를 본 에리카는 속이 안 좋다며 화장실로 도망간다. 아마도 죄책감을 느꼈을 테지만, 목표를 완수했다는 기쁨 또한 머릿 속 어딘가에 있었을 것이다. 대척점에 있을 것만 같은 그 두 감정은 동시에 에리카에게 찾아오며 그녀는 이성을 상실한 채 혼자만의 공간을 찾으러 화장실 변기 칸으로 숨어버린다. 발터는 사건의 구체적인 전말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자신이 봤을 땐 한 번도 고고함을 잃지 않았던 그녀의 애티튜드가 균열이 생겼다는 사실은 감지한다. 그것은 발터에게 빈틈처럼 보였으며, 에리카를 화장실까지 따라가 자신의 사랑을 쟁취하려 한다. 어쩌면 지금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그녀와 가장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라고 느꼈으니까.
그렇게 그녀와 키스를 하는 발터. 키스는 더 강한 것을 부르지만 그러한 분위기임에도 에리카는 발터는 격하게 밀어낸다. 그리곤 발터에게 한 마디도 하지 말라며 그의 성기만을 애무한다. 진행했다 멈췄다 하며 절정의 직전에서 멈춰버린 뒤 발터를 통제하려 한다. 자신의 지시를 받게 하고, 자신이 원할 때 만날 수 있는.

다음 날 에리카를 찾아 온 발터는 여느 연인 관계처럼 행동하려 하지만 에리카는 편지는 건네주되 여전히 키스하려는 그를 밀어낸다. 자신은 감정 같은 것은 없으며, 설령 감정이 생긴다 해도 내 이성을 이기게 두지 않을 것이라며 여전히 에리카는 자신의 자존심을 내세운다.
그러나 이후 에리카도 예상하지 못했던 균열이 발생한다. 이번엔 발터가 에리카를 뒤따라 온 것이다. 집의 어머니를 뚫고 들어가 방문도 막은 채 에리카의 방에서 둘은 함께 있게 된다. 지금껏 발터는 늘 에리카의 '강함의 공간'에서만 존재하던 자였다. 그러나 이 미행이라는 예상치 못한 행동으로 인해 두 세계에 비로소 균열이 생겼다. 그리고 균열은 에리카에게도 찾아온다. 아니, 사실은 에리카는 이전부터 그래왔던 것이다. 다만 관객이 균열을 체감하는 것일 뿐. 자신의 성적 취향을 밝힌 편지를 발터는 에리카의 곁에서 읽으며 확인한다. 화장실에서 자신을 대했던 태도와는 전혀 다른, 당황스러울 정도의 마조히즘적인 내용을 고백하는 내용에 어이없어하는 발터. 에리카는 발터의 기분을 풀어 주려 노력하지만 질려버린 발터는 매몰차게 그녀의 집을 떠난다.
발터가 경멸 섞인 반응을 보이며 떠나간 그날 밤, 어머니는 침대의 바로 옆에 누워 있는 에리카를 향해 혀를 차며 아예 창녀촌이라도 차리지 그러냐는 모욕적인 폭언을 쏟아낸다. 에리카는 분노하는 대신 역으로 완벽한 '창녀'의 역할을 기괴하게 연기한다. "엄마, 사랑해요"라고 외치며 어머니에게 다가가 키스하고 성기를 노골적으로 만지는 것이다. 이는 어떤 맥락에서 보더라도 애정의 표현이 아니다. 일평생 자신의 욕망을 억제해 온 어머니를 향해, 당신이 가장 혐오하는 '성'을 무기로 삼아 당신에게 가하는 가장 폭력적인 반항이다. 자신의 해방구였던 발터가 떠나자, 바깥으로 나가야 했던 그녀의 뒤틀린 에너지가 갈 곳을 잃고 결국 그 뒤틀림의 근원이었던 존재로 향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인생을 망친 존재를 향한 복수이자, 자신의 근원을 끝내 벗어날 수 없음을 증명하는 비극적인 회귀다.
에리카의 이 충격적인 발악 직후. 어머니가 내뱉는 대사는 어쩌면 더욱 충격적이다. 그야말로 숨이 막히는 '완벽한 출구 봉쇄'다. 어머니는 경악하거나 분노하는 대신, 그녀의 추후 연주회만을 염두한다. "체력 아껴라, 대타라고 해도, 관객 속에 누가 앉아 있을지 모르잖니."라는 업무적인 통제의 언어로 딸의 처절한 몸부림을 단숨에 무효화한다. 에리카가 자신의 밑바닥을 모두 보이면서까지 던진 공격이 어머니의 기형적인 벽 앞에선 조금의 생채기도 내지 못하고 허무하게 무력화된 것이다. 이 무미건조한 대사 속에는 딸을 독립된 인간이 아닌, 자신의 결핍을 채워 줄 '완벽한 걸작'으로 취급하는 끔찍한 사물화가 기저에 깔려 있음을 우리는 직감할 수 있다. 눈앞에서 딸의 정신이 파괴되어 가는데도, 어머니의 유일한 관심사는 이 물건이 연주회에서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면 어떡하지 라는 걱정 뿐이다. 화장실에서 딸의 자해를 생리혈로 치부해 버렸듯, 이번에도 어머니는 타인의 시선, 사회적 명망이라는 목줄을 다시금, 여전히, 딸의 목에 채운다. 에리카가 어떤 극단적인 기행을 벌이더라도 결코 어머니가 짜놓은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으며, 날이 밝으면 다시 고고한 예술가의 껍데기를 두른 채 영원히 "멋진" 일상으로 복귀해야 함을 확정 짓는 처참한 계명이다.

에리카는 발터의 아이스하키 링크까지 찾아가 발터를 붙잡는다. 뒤늦게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는 것일까. 물론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더 정확하게는, 발터가 영영 자신의 곁을 떠나면 자신은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는 잃어버린 채, 어머니의 기형적인 감옥에 영영 갇힐 것이라는 직감과 공포 때문이었을 테다. 보다 적극적인 구애 끝에 가지는 성관계. 그러나 도중 에리카는 구토를 하고 만다. 육체적 교감을 빌미로 매달렸던 그 순간은 도리어 발터에게 지독한 모멸감만 남긴 채 파국으로 끝장나 버린다. 에리카는 여전히 미숙한 자였다. 겉으로는, 생각으로는, 이론적으로는 타인을 지배하고 자신의 기형적인 성적 취향을 강요할 만큼 대담한 자인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그런 행위들이 실제 육체적으로 이루어졌을 때 그것을 감당하는 법은 배우지 못했고 (아마) 경험한 적도 없다. 늘 자신이 통제 가능한 영역에 있어야만 안심하는 자였지만, 이 물리적인 행위의 영역은 자신의 의지로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다. 아무리 극단적이고 가학적인 환상을 꾸며낸다 한들 현실에서는 타인과 (육체적/정신적) 관계 맺는 법을 전혀 모르는 미숙한 자였던 것이다.
발터는 또다시 상처를 받고 떠난다. 그렇게 정말로 에리카의 곁을 떠난 것인가 생각이 들던 날의 밤, 발터가 그녀의 집을 찾아온다. 그녀의 집으로 쳐들어온 발터는 당신을 떠올리며 자위를 했다는 저열한 고백을 던지고서는 그녀를 통제해 온 절대 권력자인 어머니마저 방에 가두고, 에리카를 폭력적으로 제압하며 묻는다. 당신이 원하던 것이 이런 거 아니었냐고. 행위의 껍데기로만 본다면 발터가 가하는 구타와 통제는 에리카가 편지를 통해 요구했던 마조히즘적 '대본'과 완벽히 일치한다. 하지만 이 씬의 본질은 명백한 강간이다. 발터는 폭력에 기인한 성관계를 하면서도 끊임없이 요구하며 울부짖는다. 날 이렇게 내버려 두지 말라고, 제발 내게 다정하게 굴어 달라고. 에리카가 원했던 것이 감정을 걷어낸 폭력이었다면, 발터는 그 폭력을 빌려 정반대의 것을, 다정함을 갈구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한 가지도 설계하지 않은 이 씬에서, 늘 주체이자 연출자로 있고 싶었던 에리카는 단 하나의 지시도 내리지 못한 채 철저하게 유린당하는 수동적인 개체로 전락한다. 모든 것이 끝난 후 힘겹게 몸을 일으키는 에리카의 참담한 표정은, 단순히 육체적인 모멸감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자신이 평생을 걸쳐 견고하게 구축해 왔다 믿은 자신만의 환상과 통제력이, 무참히 행해지는 현실의 폭력 앞에서 철저히 조롱당하고 짓밟혔음을 깨닫는 절망의 순수한 얼굴이다. 억압의 감옥 안에서 유일한 도피처로 삼았던 자신 머릿 속의 환상마저 무참히 깨져버린 순간, 에리카의 세계는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았고 회복할 수도 없는 완전한 붕괴에 이르렀다.

날이 밝고 연주회 당일, 에리카는 몰래 가방에 칼을 챙긴다. 영화는 이 쇳덩이를 보여줌으로 관객에게 서스펜스를 주입한다. '그녀가 발터를 찌르려는 것인가?' 로비에서 발터를 기다리는 에리카의 모습을 계속해서 보여줌으로 관객의 긴장이 최고조에 다다랐을 무렵, 발터가 일행과 함께 등장한다. 그러나 발터는 에리카를 마치 한 두번 안면만 있는 상대를 대하듯, 너무나 가볍고 건조한 인사만을 건넨 채 쌩하니 스쳐가 버린다. 그의 그러한 행동이 진심이든 아니든 간에, 적어도 공식적인 사회의 영역에선 에리카는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는 '남'으로 선언되고 확정된 것이다.
에리카는 자신이 숨겨 가져 온 칼이 향해야 할 대상과 명분을 동시에 잃어버린다. 갈 곳 잃은 칼끝은 스스로의 어깨로 향한다. 한 번의 찌름. 목을 긋거나 여러 번 찌르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행위는 명백히 자살의 의도가 아니라 자해다. 어쩌면 이는 자신의 신체에 대한 주도권을 쥐려 했던 영화 초반 화장실에서의 자해와 맥락을 같이 하는, 에리카 스스로 주도한 능동적인 행위이기에 일순간 일말의 해방감(+)으로 읽힐 여지도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상처를 부여잡고 연주회장을 빠져나와 어둠 속으로 걸어가는 이 영화의 진짜 마지막 장면을 마주하면, 직전의 장면을 결코 긍정적(+)인 에너지로 읽어낼 수 없을 것 같다. 발터라는 유일한 바깥 세상의 창구가 영원히 닫힌 지금, 갈 곳을 잃은 에리카가 피를 흘리며 당도할 곳은, 결국 자신을 옭아매는 어머니의 집, 그 기형적인 감옥 한 곳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능동적으로 벌인 이 행동조차 스스로의 고립을 확인시켜 주는 방증으로 전락해 버린 이 결말은, 변한 것은 이전과 하나도 없는 에리카의 삶에 남은 것이라곤 회복 불가능한 완전한 절망(-)뿐이라는 사실을 쓸쓸하게 증명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