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읽으면, 무엇이 달라 보일까요?

연재한 글을 지면으로 옮겼습니다.

21ST CINEMA

영화는 뺄셈의 예술 (1)

<덩케르크>
<덩케르크>

2017년, 21세기 상업영화의 최고 거장인 크리스토퍼 놀란은 분명한 블록버스터이지만 이제까지 우리가 접해 왔던 전쟁영화와는 사뭇 다른 전쟁영화를 들고 나왔다. <덩케르크>. 관객의 반응이 엇갈렸다. 그의 이전작들이 <다크 나이트>, <인터스텔라>와 같이 상대적으로 호불호가 적은 작품들이었기에 그의 작품이 이토록 강한 호불호를 보여주는 결과물일 것이라 예상한 이는 없었을 것이다. 혹자는 놀란의 최근작 중 최악이라는 평을 할 정도였다. 반면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는 의견들도 있었다. 대중들의 지지도 충분했고, 평단의 관심도 주목할 만한 수준이었다. 그 중 김혜리 평론가는 공식적으로 놀란의 최고작이라는 뜻을 밝혔고, 이동진 평론가는 "플롯의 마술사, 야심찬 뺄셈으로 특별한 전쟁영화를 조각하다."라는 한줄평을 남기기도 했다.

나는 이동진 평론가의 한줄평에 주목해보고 싶었다. 이 영화가 가치 있는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나의 감상으로도 <덩케르크>에는 다른 여타의 전쟁영화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없었고', 일견 의도적으로 장르의 스테레오타입들을 모조리 제거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흥행과 관습을 위한 장치가 공(空)에 가까웠던 <덩케르크>는 그럼에도 역설적이게 나에게 걸작으로 다가왔다. 고민해보게 되었다.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선 덧셈보다 뺄셈이 중요한 것일까.

이처럼 영화의 역사에서 크거나 작은 분기점을 만들었던 영화들에는 기존의 것들과의 차별점이 존재했었다. 나는 지금부터 그 진화의 성취들을 탐구해 보고자 한다.

그 성취들을 살피기 전에 한 가지 짚어둘 것이 있다. 영화는 시간의 제약을 안고 태어난 예술이라는 사실이다. 무성영화 시절 10분 안팎이던 러닝타임은 유성영화의 시대를 거치며 늘어나, 2시간 안팎이라는 사뭇 정석적인 규격으로 정착했다. 다만 이 정착은 순수하게 미학적인 사건이 아니었다. 극장의 회전율과 비디오라는 이차 시장의 포맷, 요컨대 자본의 논리가 그 정착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한 편의 영화가 5시간이고 7시간이고 되는 것이 반칙은 아니지만, 산업으로서의 영화는 오래전부터 그것을 지양해왔다. 말하자면 영화는 애초에 덜어낼 수밖에 없도록 태어난 매체다.

규격이 정해지자 편집의 문법이 발달했다. 마틴 스콜세지는 영화란 무엇이 프레임 안에 있고 무엇이 프레임 밖에 있는가의 사투라 말했는데, 이는 사실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다. 보통의 한국 영화가 하루를 꼬박 찍어 실제 러닝타임의 1분 남짓을 건진다고 한다. 그렇게 100회차를 찍으니 촬영된 물리적 분량은 어마어마할 것이고, 완성된 영화란 그 방대한 소스에서 극히 일부를 골라내고 나머지를 전부 버린 결과물이다. 영화 제작은 처음부터 끝까지 덜어내는 과정, 곧 계속되는 뺄셈의 과정인 것이다.

<도굴>
<도굴>

문제는 이 뺄셈에 실패할 때 벌어진다. <도굴>이라는 영화를 예시로 들고 싶다. 이 영화에는 '주인공들의 로맨스'가 있고, '높으신 분들의 추악함'이 있고, '깡패'가 있고 '칼잡이'가 있고 '배신'이 있고 '주인공의 숨겨진 비밀'이 있다. 길지도 않은 러닝타임 안에 이 모든 소재가 제각기 산발되어 있어서, 얼마든지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었을 요소들이 하나같이 얇고 피상적으로만 스쳐 지나간다. 더 넣을수록 저마다는 옅어진 것이다. 용의 그림에 눈동자를 찍으려면 먼저 용이 그려져 있어야 한다. 근본을 세운 뒤에야 그 위에 무언가를 더할 수 있고, 더할 때조차 되도록 적게 더해야 한다. 그러므로 좋은 영화의 관건은 무엇을 더 담을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담지 않을 것인가에 있으며, 그 뺄셈이 가장 첨예해지는 지점이 바로 '무엇을 보여주지 않을 것인가'다.

가장 급진적인 뺄셈은 사건 그 자체를 보여주지 않는 것이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클로즈 업>은 한 사기꾼의 재판을 다루면서도 정작 그가 체포되는 결정적 순간을 오프닝에서 비워둔다. 그러고는 영화가 흐르는 내내 우리에게 사건을 단 한 번도 직접 보여주지 않는다. (물론 중반 이후 당시의 장면이 보여지지만, 그것은 극중 인물의 플래시백, 즉 주관적인 기억을 통과한 결과물이다.) 우리는 언제나 사건의 곁, 사건의 이후, 사건을 이야기하는 입들만을 마주할 뿐이다. 그런데 이 부재는 결핍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보여주지 않은 것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스크린 대신 관객의 의식 속에서 상영된다.

올리버 히르비겔의 <다운폴>이 히틀러의 최후를 다루는 방식도 다르지 않다. 많은 관객이 마지막 장면이리라 기대했을 그 '자살의 순간'은 실제로는 영화의 중반부 도중에, 그것도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도 유혈이 낭자했을 시신도 보여주지 않은 채 지나간다. 관객이 가장 보고 싶어 할 이미지를 정확히 겨냥해 거두어들임으로써, 영화는 그 죽음을 구경거리의 자리에서 끌어내린다. 마스무라 야스조의 <세이사쿠의 아내>에 이르면 뺄셈은 아예 장르의 근간을 건드린다. 이 영화는 전장을 한 차례도 보여주지 않는 전쟁영화다. 포화도 참호도 없이, 오직 후방에 남겨진 한 여인의 극한만을 응시함으로써 전쟁이 인간에게 무엇을 하는지를 말한다.

<매스>
<매스>

프랑 크란츠의 <매스>는 이 원리를 한층 극단으로 밀어붙인다. 학교 총기난사를 다루는 이 영화는 정작 그 총격을 단 한 컷도 보여주지 않는다. 영화의 전부는 사건이 한참 지난 뒤 가해자와 피해자의 부모 네 사람이 교회의 한 방에 마주 앉아 나누는 대화이며, 참극 그 자체는 끝내 스크린 밖에 남는다. 우리는 오직 그것이 남긴 폐허를 통해서만 사건과 마주한다.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이 원리를 관객의 정서를 정면으로 거스르며 밀어붙인다. 두 시간 가까이 마음을 붙인 주인공을 태연히 화면 밖에서 처치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의 죽음이 아니라 그의 시신을 발견한다. 그토록 많은 덫을 헤쳐 나온 인물이 정작 결정적 순간에 화면 밖에서 제거될 때, 관객이 느끼는 배신감에 가까운 감정이야말로 죽음이 '서사의 정점'에 오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찾아오는 이 세계의 무심함을 정확히 체험시키는 장치다. 보아야 할 것을 치우자 보이지 않던 것이 드러나는 것이다.

영화는 관객에게 다가올 것을 미리 일러주는 여러 '안전망'을 마련해둔다. 그리고 뺄셈의 대담함은 종종 그 안전망을 걷어내는 데서 온다. 엘렘 클리모프의 <컴 앤 씨>에는 어느새 전쟁영화의 덕목처럼 굳어버린 서스펜스가 없다. 다가올 것을 미리 알려 관객을 준비시키는 그 장치를 거부하고, 대신 충격적인 이미지를 예고 없이 던져 넣는 것이다. 안전장치가 걷힌 탓에 관객은 인물과 함께 초토화의 한복판에 던져진 채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된다. 그러나 그 안전망 중에 가장 강력한 장치는 아마도 음악일 것이다.

지금 무엇을 느껴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일러주는 그 손길을 가장 대담하게 거둔 사례가 다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다. 두 시간 반에 이르는 이 영화에 음악은 엔딩 크레딧까지 합쳐 고작 16분뿐이며, 오프닝과 마지막을 제외하면 사실상 스코어가 부재한다.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바람 소리와 발소리와 견디기 힘든 침묵이다. 이 침묵은 태만이 아니라 계산이다. 바이올린이든 피아노든 귀에 익은 악기가 울리는 순간 관객은 문득 자신이 지금 영화(만들어진 픽션)를 보고 있음을 깨닫고 마는데, 본작의 음악 작곡가 '카터 버웰'은 그 각성이 화면의 생생함을 깨뜨린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아예 악기를 버리고, 냉장고가 웅웅대는 저주파에 맞춘 금속 그릇 소리를 바람과 엔진음 밑에 몰래 깔아두는 것을 택했다. 들리되 음악으로는 들리지 않는 소리를 만든 것이다. 안내자를 잃은 관객은 그렇게 공포 그 자체와 맨몸으로 마주선다.

<듄>
<듄>

정적, 혹은 침묵. 그것은 그리하여 소리의 부재가 아니라 소리의 한 형식이 된다. 드니 빌뇌브가 블록버스터인 <듄>에서조차 음악과 정적을 팽팽히 대비시켜 긴장을 조율하는 것도, 파스빈더의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가 영화 역사상 정적을 가장 무시무시하게 사용한 작품으로 남은 것도 같은 이치에서다. 후자에서 카메라는 감정적인 접근을 취하지 않고도, 능청스럽다 싶을 만큼 명백하게 인물들을 화면 안에 가두어 우리가 그들을 끝내 외면할 수 없게 만든다.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의 <분노의 날>은 이 정적의 힘을 고전의 시대에 이미 증명하기도 했다. 마녀사냥의 고문 장면에서 그는 음악을 일절 쓰지 않은 채 어둠 속의 신음 소리만으로 긴장을 조성하다가, 카메라를 천천히 좌로 흘려 쓰러진 여인에게 도달시킨다. 절제된 조명과 단순한 카메라워크, 그 한 번의 패닝만으로 그는 권력의 비대칭과 숨 막히는 압도감을 완성한다. 기술의 진보가 곧 영화의 깊이를 보장하지 않음을, 덜어낸 화면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담아냄을 이 1943년의 영화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허우 샤오시엔의 <해상화>는 이 정적을 아예 영화의 목적으로 삼기도 한다. 감독이 롱테이크를 쓰는 이유는 저마다 다르지만, 이 영화의 롱테이크는 오직 대화와 대화 사이에 고이는 정적을 포착하기 위해 존재한다. 말해진 것이 아니라 말과 말 사이에 흐르는 것, 거기에 이 영화의 핵심이 있다. 에드워드 베르거의 <서부 전선 이상 없다> 또한 전투가 없는 정적의 시간을, 시의 행간과도 같은 그 '죽은 시간'을 깊이 들여다본다. 소란이 아니라 소란의 부재가 전쟁의 실체를 말하는 것이다.

뺄셈은 무엇을 보여주지 않느냐의 문제를 넘어, 무엇을 보여주지 '말아야' 하느냐의 문제로도 이어진다. 톰 맥카시의 <스포트라이트>는 가톨릭 사제들의 아동 성범죄를 파헤치면서도 그 학대의 장면을 단 한 컷도 담지 않는다. 작정했다면 얼마든지 자극적인 순간을 박제할 수 있었음에도 그 쉬운 길을 택하지 않은 것이다. 만약 그 장면을 노골적으로 담았다면 영화에 대한 모든 관심은 그리로 쏠렸을 것이고, 주객이 전도되어 관객에게 남는 단 하나의 순간은 진실이 아니라 자극이 되었을 것이다. 이 영화는 한 자 한 자 진실을 향해 걸어가는 영화이지 순간의 자극으로 뛰어가는 영화가 아니었기에, 의도적으로 먼 길을 돌아갔다. 스티브 맥퀸의 <헝거> 또한 배설물과 나체라는, 얼마든지 도색적으로 소비될 수 있는 소재를 다루면서도 그것을 흥분의 도구가 아니라 오직 투쟁을 부각하는 목적으로만 쓴다. 아론 슈나이더의 <그레이하운드>가 전쟁영화에 으레 끼어드는 하극상의 순간이나 지시를 잘못 알아들어 벌어지는 값싸고 자극적인 변수를 걷어내고 오직 프로페셔널한 긴장만을 남길 때에도 다르지 않다. 자극이란 관객을 사로잡는 가장 손쉬운 미끼이지만, 그 미끼를 거두어들일 때 영화는 자신이 진짜 말하려던 것을 지켜낼 수 있다.

<네 멋대로 해라>
<네 멋대로 해라>

뺄셈은 내용에만 있지 않다. 형식 그 자체가 뺄셈일 수 있다. 장 뤽 고다르는 <네 멋대로 해라>에서 장면과 장면 사이에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무의미한 순간, 곧 행간을 과감히 제거하는 '점프컷'을 통해 순간들을 더욱 밀착시켜 강렬하게 충돌하게 했다. 점프컷이란 문자 그대로 프레임을 덜어내는 기법이며, 놀랍게도 그 덜어냄이 한 시대의 새로운 문법이 되었다. 영화사의 가장 유명한 혁명 가운데 하나가 사실은 뺄셈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셈이다. 짐 자무쉬의 <패터슨>이 극적 사건이라 할 만한 것을 거의 전부 덜어내고 한 버스 운전사의 반복되는 일상만을 남길 때, 우리는 드라마가 사라진 자리에서 오히려 삶의 결을 본다. 토마스 알프레드손의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가 잡담을 배제한 각본으로 장 피에르 멜빌의 침묵을 불러내며 첩보의 세계를 그 어떤 총성보다 서늘하게 그려낼 때에도 그렇다. 플로리안 젤러의 <더 파더>는 아예 안정된 현실 그 자체를 덜어낸다. 알츠하이머를 앓는 노인의 시점에서 같은 인물을 다른 배우가 연기하고 공간의 배치가 소리 없이 내내 뒤바뀌는 이 영화는, 관객에게서 지금 무엇이 진짜인가라는 발판을 빼앗는다. 병을 바깥에서 관조하는 대신, '좌표'를 지워 관객을 환자의 혼란 그 안에 세우는 것이다.

뺄셈이 한 장르 전체를 다시 세우기도 한다. 2006년의 제임스 본드가 그러했다. 반세기 동안 쌓인 개그와 인습과 자기 패러디를 걷어내고, <카지노 로얄>은 본드를 다시 맨몸의 인간으로 되돌려 세웠다. 더는 만능 장비가 위기를 해결해주지 않고, 상처 입는 육체와 감정이 그 자리에 들어섰다. 이 뺄셈의 논리는 <스카이폴>의 마지막에 이르러 하나의 선언이 된다. 첨단으로 무장한 적 앞에서 본드는 그 모든 장비를 버리고 자신이 태어난 땅의 외딴 저택으로 물러나, 사냥총과 급조한 함정 같은 재래식 수단만으로 최후의 방어에 나선다. 때로는 옛 방식이 최선이라는 이 영화의 대사는, 실은 리부트된 이 시리즈 전체가 뺄셈을 통해 스스로를 갱신해왔음을 요약하는 말이다.

그러나 뺄셈이 가장 깊이 파고드는 곳은 결국 감정이다. 많은 영화가 인물의 죽음 앞에서 감정적인 음악과 감정적인 연기로 관객을 흔들려 하지만, 잉마르 베리만의 <화니와 알렉산더>는 한 인간의 죽음을 미화 없이, 냉정하다 싶을 만큼 담담하게 묘사한다. 눈물을 대신 흘려주지 않기에, 어린 알렉산더의 시선에서 길어 올려지는 죽음의 감각은 도리어 관객의 내부로 깊이 스며든다. 매그너스 본 혼의 <바늘을 든 소녀> 역시 인물의 비극을 과잉으로 밀어붙이지 않는다. 단조로운 듯 반복되는 음악과 절제된 촬영은 감정을 선동하지 않으면서도 인물의 상태를 정확히 포착한다.

<로제타>
<로제타>

기타노 다케시가 자신의 필모그래피에서 내내 폭력을 예고 없이 툭 던져놓고는 그것이 마땅히 불러와야 할 카타르시스를 거두어 버릴 때, 그 무감각한 여백은 관객으로 하여금 폭력을 소비하는 대신 응시하게 만든다. 다르덴 형제의 <로제타>가 음악도 사연도 없이 오직 흔들리는 카메라로 한 소녀의 등을 좇을 때에도 마찬가지다. 그 중 이 태도를 극단까지 밀어붙인 이를 꼽자면 로베르 브레송일 것이다. 그는 아예 연기 자체를 덜어냈다. 표정과 억양으로 감정을 연기하는 배우 대신, 표현이 다 씻겨 나갈 때까지 반복시킨 '비직업 연기자'를 세워 심리라는 표면을 걷어낸 것이다. 그에게 관객의 감정을 대신 결정하지 않는다는 원칙은 거의 신념이었다. 손에 쥐여준 카타르시스는 값싸다. 브레송은 거두어들인 카타르시스는 관객의 내부에서 스스로 발생해야 하고, 그것이 더 참되다 믿었다.

이 비움을 가장 고요하게 벼려낸 이는 오즈 야스지로다. 그의 영화는 느리고 차분하되 빽빽한 구도와 공간감으로 시종 팽팽한 장력을 유지하다가, 이따금 그 공간을 의도적으로 비운다. <만춘>의 마지막이, <동경 이야기>의 마지막이 그러하듯, 인물의 뒷모습을 텅 빈 프레임 안에 불쑥 던져놓아 내내 쌓아 올린 장력을 일순간 놓아버리는 것이다. 장면과 장면 사이에는 아예 인물이 사라진 빈 공간을 끼워 넣는다. 아무도 없는 복도, 가만히 걸린 빨래, 텅 빈 골목처럼, 서사를 조금도 진전시키지 않아 기능적으론 무쓸모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 '필로우 쇼트'는 오직 정적만을 담아 앞 장면의 감정이 관객 안에서 천천히 가라앉을 자리를 내어준다. 그리고 오즈는 바로 그 빈 화면에서 가장 큰 감정을 길어 올린다. 채워서가 아니라 비워서 도달하는 감정. 부재가 밀도가 되는 순간의 가장 순정한 형태가 거기 있다.

그리고 어떤 영화에서는, 덜어낸 그 자리가 도리어 가장 뜨거운 자리가 된다. 왕가위의 <화양연화>를 두고 누군가는 러브씬 없이 가장 관능적인 영화라 부른다. 이 농담은 뺄셈의 가장 깊은 비밀을 건드린다. 보여주지 않음이 단지 자극을 아끼는 데 그치지 않고, 오히려 자극이 결코 다다를 수 없는 밀도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 편집과 촬영만으로 빚어낸 억눌린 리듬 속에서, 끝내 맺어지지 못하는 두 사람의 감정은 그 어떤 노골적인 장면보다 짙어진다. 여백은 채워지지 않은 자리가 아니라, 관객의 상상이 밀려들어와 스스로 채우는 자리다. 스스로 채울 수 있다는 그 '가능성의 영역'은 '이미 채워진' 영역의 것보다 훨씬 크다. 부재가 곧 밀도가 되는 순간이다.

여기까지 왔을 때, 뺄셈은 거의 하나의 법칙처럼 보인다. 덜어낼수록 강해지고, 보여주지 않을수록 짙어진다는 법칙. 그러나 완벽해 보이는 법칙일수록 그 완벽함이 의심스럽다. 만약 뺄셈이 언제나 정답이라면, 영화를 만드는 일이란 그저 지워나가는 일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어떤 영화는 덜어내어 충만해지지만, 어떤 영화는 덜어내어 도리어 빈곤해진다는 것을. 같은 생략이 한쪽에서는 여백이 되고 다른 쪽에서는 그저 구멍이 된다는 것을. 무엇이 이 둘을 가르는가. 그리고 또 하나,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은 관객이 무엇을 볼 수 있고 무엇을 볼 수 없는지를 대신 결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 대상이 누군가의 실제 고통일 때, 보여주지 않겠다는 선택은 더 이상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책임의 문제가 된다. 부재가 밀도가 되는 이 아름다운 법칙에는, 그리하여 두 개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 뺄셈은 언제 실패하는가, 그리고 보여주지 않을 권리는 언제 책임이 되는가. 미학의 문제가 끝나는 자리에서, 윤리의 문제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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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 The Movie Databa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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