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읽으면, 무엇이 달라 보일까요?

연재한 글을 지면으로 옮겼습니다.

21ST CINEMA

영화는 뺄셈의 예술 (2)

<존 오브 인터레스트>
<존 오브 인터레스트>

앞선 글은 하나의 법칙에 도달한 듯 한 채 끝났다. 영화는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도리어 짙어질 수 있으며, 부재가 가장 강한 현존일 수 있다는 법칙. 그러나 완벽해 보이는 법칙일수록 그 완벽함이 의심스럽다고도 했다. 덜어낼수록 강해진다는 말이 언제나 참이라면 영화를 만드는 일은 그저 지워나가는 일에 불과했을 텐데, 우리는 그렇지 않음을 안다. 같은 생략이 어떤 영화에서는 여백이 되고 다른 영화에서는 한낱 약점이 된다. 무엇을 보여줄지는 취향이 아니라 그 사람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의 문제로 바뀐다. 이 글은 그 두 그림자를 따라간다. 뺄셈은 언제 실패하며, 보여주지 않을 권리는 언제 책임이 되는가.

먼저 실패다. 앞의 글이 자칫 뺄셈을 만능의 미덕으로 오해하게 했다면, 그 오해는 <도굴>이 저지른 과오를 정확히 뒤집은 형태의 또 다른 과오가 된다. 덜어낸다고 다 좋아지지는 않는다. 빅토리아 머호니의 <올드 가드 2>에서 두 인물의 오랜 갈등이 봉합되는 대목은 나이브하게 흘러가는데, 그 이유는 봉합에 이르기까지 쌓였어야 할 정서적 축적이 생략되었기 때문이다. 남겨야 할 것마저 덜어낸 탓에 인물의 선택은 끝내 감정적으로 와닿지 못한다. 거장의 손에서도 이 실패는 온다. 아쉬가르 파르하디의 영화는 늘 정보와 판단을 아껴 관객을 도덕적 미궁에 세우던 절제의 대가였지만, <세일즈맨>에서는 그 아낌이 예전만큼의 밀도를 낳지 못한다. 인물의 내면을 켜켜이 쌓아 올리던 솜씨가 상대적으로 덜 유효하게 그려진 탓에, 질문은 던져지되 그 질문을 떠받칠 무게가 헐거워지는 것이다. 같은 절제가 그의 전작들에서는 여백이었으나 여기서는 다소 헐거운 빈자리에 그친다.

또 다른 실패는 덜어냄을 엉뚱한 자리에 놓는 데서 온다. 우민호 감독의 <하얼빈>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순간을 담백하게, 요란 떨지 않고 처리하는데 그 절제 자체는 나무랄 데가 없다. 문제는 이 영화가 오프닝에서 스스로 그 암살을 가장 중요한 작전이자 하이라이트라 선언해 두었다는 데 있다. 정작 관객에게 약속한 그 정점에서 덜어내 버렸으니, 절제는 여백이 아니라 번복처럼 관객에게 다가온다. 덜어냄이 옳은지 그른지는 무엇을 덜어내느냐만이 아니라 어디에서 덜어내느냐에도 달려 있는 것이다. 이보다 더 공허한 실패는 뺄셈을 흉내만 내는 것이다. 깊이를 가장하여 비우지만 정작 그 빈자리 뒤에 걸린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부재는 여백이 아니라 그저 구멍이 된다.

<아이덴티티>
<아이덴티티>

앞선 글의 끝에서 던진 물음, 같은 생략이 어디에서는 여백이 되고 어디에서는 구멍이 되는가에 대한 답이 여기에 있다. 여백은 비운 자리에 무언가를 걸어둔 자의 것이고, 구멍은 비우기만 한 자의 것이다. 제임스 맨골드의 <아이덴티티>의 반전이 그러하다. 손바닥 뒤집듯 국면을 전환하는 데만 몰두한 그 반전은, 정작 뒤집힌 자리에 걸려 있는 것이 없어 놀라움이 아니라 공허로 귀결된다. 무언가를 감춘 줄 알았으나 애초에 감출 것이 없었던 셈이다. 이 실패들이 가리키는 것은 하나다. 덜어냄 자체는 미덕도 악덕도 아니라는 것. 없어도 되는 것을 덜어내면 여백이 되지만, 있어야 할 것을 덜어내거나 엉뚱한 자리에서 덜어내면 그것은 구멍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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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가 덜어냄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도굴>이 앓았던 병, 곧 과잉 또한 하나의 얼굴이 아니다. 최동훈 감독의 <외계+인>은 여러 시점을 섞어 진행하는 이야기의 태생적인 비대함이 끝내 산만함으로 흩어진다. 심지어 2부는 편집으로 산만함을 덜어내려 애쓴 흔적이 역력함에도 말이다. 봉준호 감독의 <옥자>는 동화의 틀을 표방하면서도 그 틀이 감당할 범위 이상으로 판을 벌린 탓에, 너무 많은 것을 집어넣으려다 서사와 형식이 서로 불협화음을 낸다. 거장이라 하여 과적의 함정 앞에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 불과 재>의 과잉은 결이 조금 다르다. 이미 복잡한 이미지 위에 복잡한 텍스트가 더해져 매 순간 받아들여야 할 정보의 볼륨이 감당의 한계를 넘어설 때, 스펙터클은 도리어 제 무게에 짓눌린다.

<007 스펙터>
<007 스펙터>

그리고 이 대목에서 앞 글의 제임스 본드가 되돌아온다. <카지노 로얄>과 <스카이폴>이 반세기의 관습을 덜어내 시리즈를 되살렸다면, <007 스펙터>는 정확히 그 반대 방향으로 미끄러졌다. 단순한 플롯과 간결한 서사가 전작의 미덕이었음에도, 이번에는 인물과 사건이 중구난방으로 툭툭 제시되기만 할 뿐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거추장스러워진 것이다. 덜어내어 살아난 시리즈가 다시 채워 넣어 휘청이는 이 광경만큼, 뺄셈과 덧셈이 한 몸의 두 얼굴임을 선명히 보여주는 사례도 드물다. 때로 과잉은 아예 감독의 욕심이 되어 영화를 난잡하고 몰개성 하게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덧댄 가벼운 코미디 한 줌이 정작 영화의 전체에서 가장 필수적이었을 진지함을 희석시켜 마땅히 도달했어야 할 정서적 귀결의 힘을 스스로 빼버리기도 한다. 얼굴은 저마다 달라도 이 모든 과잉이 도달하는 곳은 하나다. 더 넣을수록 저마다는 옅어진다는 것.

무언가를 잘못 덜어내는 것과 무언가를 잘못 덧대는 것은 그러므로 같은 과오의 두 얼굴이다. 진짜 문제는 빼느냐 더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버려도 되는지를 아는가다. 위대한 뺄셈은 뻔한 것, 예상되는 것, 없어도 그만인 것을 덜어내면서 정작 본질은 남기거나 오히려 강화하고, 실패한 뺄셈은 그 반대로 본질을 덜어내고 껍데기만 남긴다. 뺄셈은 공식이 아니라 판단이며, 무엇이 본질인지 아는 바로 그 판단이 곧 감독의 안목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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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트라이트>
<스포트라이트>

여기까지, 뺄셈을 잘했느냐 못했느냐는 결국 잘 만든 영화와 서툰 영화를 가르는 문제였을 뿐이다. 뺄셈이 취향을 넘어 윤리가 되는 영역이 따로 있다. 보여주지 않기로 한 그 대상이 누군가의 실제 참상일 때다. 앞선 글에서 <스포트라이트>가 사제들의 아동 성범죄를 파헤치면서도 그 학대의 장면을 단 한 컷도 담지 않음으로써 자극 대신 진실을 지켜냈던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때 그 선택은 어디까지나 좋은 만듦새의 문제였다. 주제를 흐리지 않기 위한 미학적 절제. 대상이 실제의 고통이 되는 순간, 같은 선택은 만듦새를 넘어 하나의 책임이 된다. 무엇을 보여주지 않을 것인가라는 물음이, 무엇을 보여줄 권리가 있는가라는 물음으로 바뀌는 것이다.

이 문제를 가장 정교하게 푼 영화는 라즐로 네메스의 <사울의 아들>이다. 이 영화는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숨기지 않는다. 다만 영리하게도 초점을 뺀다. 참상은 카메라의 한복판이 아니라 얕은 초점 너머 흐릿한 주변부에 늘 존재하고, 오직 한 사내의 얼굴만이 카메라의 중심에 또렷이 붙들린다. 여기에 이 영화의 결정적인 정교함이 있다. 윤리적 뺄셈은 단순히 감추는 것이 아니다. 감추기만 하는 것은 외면일 수 있고, 참상을 '없던 일'로 만드는 미화일 수 있다. 참상을 완전히 지우는 일은 그것을 기억해야 할 의무를 저버리고, 참상을 전시하는 일은 희생자의 고통을 구경거리로 바꾸어 배반한다. <사울의 아들>이 이룬 것은 그 둘 사이를 지나는 좁은 길이다. 참상을 지우지 않되 소비되지 않는 방식으로 현존시키는 것, 시야의 가장자리에 붙들어 끝내 사라지지 않게 하되 결코 구경거리로 내어주지 않는 것.

조나단 글레이저의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같은 문제를 정반대의 극단에서 푼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장의 가족이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영위하는 평온한 일상,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오직 그것뿐이다. 학살은 담장 너머에서 넘어오는 소리로만, 굴뚝의 연기로만, 화면의 가장자리조차 아닌 프레임 바깥에 온전히 머문다. <사울의 아들>이 참상을 흐릿한 주변부에 붙들어 두었다면, 글레이저는 그것을 아예 화면 밖으로 밀어내고 소리에게 맡긴 것이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그 학살은 보이는 어떤 참상보다 끔찍하게 관객의 내부에서 자라난다. 가해자의 안락한 일상과 담장 너머 지옥의 소리가 나란히 놓일 때, 악의 평범함은 그 어떤 고발보다 서늘해진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앞선 글의 논리가 윤리의 무게를 얻어 되돌아온다. 보여주지 않은 이미지는 관객의 내부에서 펼쳐진다고 했는데, 참상 앞에서 그 내부의 이미지는 스크린이 보여줄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끔찍하고, 동시에 그 어떤 것보다 존엄하다. 직접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영화는 관객을 참상의 소비자로 만들지 않는다.

(1969) L'Armée Des Ombres (Army Of Shadows).jpg

<사울의 아들>
<사울의 아들>

이것이 핵심이다. 참상을 직접 보여주는 순간 관객은 목격자가 아니라 구경꾼이 되고, 카메라는 증언이 아니라 착취의 도구가 될 수 있다. 나아가 참상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카메라는 자칫 관객의 눈을 가해자의 눈에 포갠다. 고통받는 몸을 바깥에서 내려다보는 그 시선이야말로, <사울의 아들>이 끝까지 희생자의 얼굴 곁에 머무름으로써 거부한 바로 그 시선이다. 또한 낱낱이 보여진 참상은 기묘한 종결감을 남긴다. 다 보았으니 끝났다는, 참상이 스크린 안에 담겨 처리되고 말았다는 거짓 안도. 그러나 보여지지 않은 참상은 종결되지 않은 채 관객을 오래도록 짓누른다. 끝내 처리되어서는 안 될 것에 종결을 허락하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참상 앞에서의 창작물이 가질 수 있는 정직의 영역이다.

정반대의 선택이 무엇인지는 같은 저격을 그린 <영웅>이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이 영화는 이토 히로부미가 쓰러지는 순간을 통째로 슬로모션으로 늘이고, 집요한 클로즈업으로 그의 가슴에서 피가 튀는 모습까지 기필코 담아낸다. 관객이 보고 싶어 하는 순간을 충실히 담는다는 명분으로 읽힐 수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장면의 자극성을 극대화한 채 이 순간에는 이런 감정만을 느껴야 한다고 지시하는 교조적인 태도에 가깝다. 실제의 역사를 다루는 태도라는 점에서, 장 피에르 멜빌의 <그림자 군단>은 이 <영웅>의 정확한 대척점에 선다. 같은 저항의 역사를 그리되 멜빌은 레지스탕스를 영웅 이상의 영웅으로 떠받드는 태도를 걷어내고, 뜨거운 서사 대신 평민들의 차가운 서사를 택했다. 관객이 이미 성웅임을 아는 인물을 자꾸만 가르치려 드는 그 교조를 이 영화는 경계하며, 눈물조차 값싸게 만들지 않는 비정함으로 반복되어선 안 될 비극의 무게를 지킨다. 미화를 덜어내는 것 또한 실제의 역사를 존중하는 하나의 방식인 것이다.

물론 무엇을 어디까지 보여줄 것인가에 하나의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진실을 좇는 기자들의 이야기인 <스포트라이트>가 참상을 완전히 화면 밖에 두는 것과, 참상의 한복판에 갇힌 자를 그리는 <사울의 아들>이 그것을 초점 너머에 두는 것은 각자의 영화가 무엇에 관한 영화인가에 따라 달라지는 선택이다. 그러나 그 모든 선택을 관통하는 기준은 하나다. 이미지가 그 대상을 섬기는가, 아니면 착취하는가. 무엇을 보여주지 않을 것인가라는 물음은 여기서 미학을 넘어, 재현되는 대상의 존엄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라는 결단이 된다.

돌이켜보면 실패의 문제와 윤리의 문제는 결국 하나의 능력을 두 자리에서 시험하는 일이었다. 무엇이 본질이고 무엇이 군더더기인지 가려내는 감각, 그것이 형식의 자리에서 발휘되면 '뺄셈의 안목'이 되고, 양심의 자리에서 발휘되면 '재현의 윤리'가 된다. 본질과 군더더기를 구별하지 못하는 감독은 서툰 장인으로 남고, 증언과 구경거리를 구별하지 못하는 감독은 그 이상의 무언가를 잃는다. 뺄셈은 그 정점에서 기교의 문제와 태도의 문제가 하나로 포개지는 지점이다. 무엇을 남길지 아는 일과 무엇을 감당할지 아는 일은, 실은 같은 물음의 두 얼굴이었던 것이다.

<덩케르크>
<덩케르크>

그러나 이 모든 안목과 결단에도 불구하고, 뺄셈에는 만드는 쪽이 끝내 어찌할 수 없는 마지막 변수가 하나 남는다. 받는 쪽이다. 영화든 드라마든 한국 콘텐츠 하면 감정적이고 강렬한 무언가를 떠올리게 된 지 오래고, 어떤 형태로든 폭발의 순간과 과잉의 순간이 담기지 않으면 '밋밋하다'는 한마디로 작품 전체가 저평가되곤 한다. 이는 우리만의 습관도 아니어서, 각국의 콘텐츠를 소개하는 유쾌한 영상들에서까지 한국 콘텐츠의 특징으로 그 강렬함이 꼽히곤 한다. 과잉에 길들여진 눈은 뺄셈을 절제가 아니라 결핍으로, 성취가 아니라 실패로 읽는다. 그리하여 뺄셈은 실행하기도, 감당하기도, 심지어 알아보기도 어렵다. 위대한 뺄셈이 종종 처음에는 외면당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서두에서 이야기한 <덩케르크> 앞에서 관객의 반응이 그토록 격렬하게 갈렸던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다시 덩케르크의 해변으로 돌아가자. 놀란이 덜어낸 것은 인물의 사연과 전황과 적군의 얼굴이었고, 그 대신 남기고 오히려 밀도를 높인 것은 시간과 소리와 위기에 처한 육체였다. 그가 무엇을 덜어냈는가만큼이나 무엇을 남겼는가가 이 영화를 결정한다. 우리는 한 편의 영화에서 감독이 무엇을 뺐는가와 무엇을 남겼는가를 고루 확인할 줄 알아야 한다. 뺄셈은 지우는 기술이 아니라 남길 것을 아는 기술이며, 그 앎에는 안목과 책임이 함께 걸린다. 프레임은 언제나 그 가장자리에 의해 규정되고, 하나의 이미지는 그 곁의 부재에 의해 완성되지만, 그 가장자리를 긋는 손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알아야 하고 또 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영화는 보여주는 예술이다. 그러나 위대한 영화는 무엇을 보여주지 않을지 아는 예술이며, 끝내 무엇을 보여주지 않을지 감당하는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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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 The Movie Databa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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