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읽으면, 무엇이 달라 보일까요?

연재한 글을 지면으로 옮겼습니다.

21ST CINEMA

서부극, 신화를 짓고 부수고 다시 꿈꾸기까지

<수색자>
<수색자>

한 사내가 문틀 안에 서 있다.

그는 방금 5년에 걸친 수색을 끝냈다. 납치된 조카를 되찾았고, 그녀를 안식처인 집으로 데려다 놓았다. 문 안에서는 가족이 재회의 온기를 나눈다. 그러나 정작 그 모든 것을 가능케 한 사내, 이든 에드워즈는 문지방을 넘지 못한다. 그는 한 손으로 반대편 팔꿈치를 감싸 쥔 채 잠시 문 앞에 머물다, 몸을 돌려 다시 황야로 걸어 나간다. 그리고 문이 닫힌다. 존 포드의 <수색자>를 영원히 기억하게 만드는, 영화사에서 가장 유명한 마지막 쇼트다.

미국이 스스로에게 들려준 건국 신화, 그 신화를 가장 완벽하게 지어 올린 감독은 어쩌면 자신의 최고 걸작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사내의 뒷모습으로 끝맺었다. 이것은 실수가 아니었다. 신화를 세운 바로 그 손이, 그 신화의 영웅을 문 밖에 세워둔 것이다.

서부극의 역사는 이 한 장의 닫히는 문에 적혀 있다. 서부극은 미국이 자신들의 신화를 세운 장르인 동시에, 반세기에 걸쳐 그 신화를 스스로 해체하고 끝내 묻어버린 장르다. 존 포드가 공고히 세운 신화를 세르지오 레오네가 유럽에서 해체하고,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그 해체마저 뒤집으며, 21세기의 감독들이 죽은 장르를 다시 불러내기까지. 건설과 해체와 애도, 그리고 그 죽음 이후까지가 모두 이 하나의 문 위에서 벌어진 일이다. 이 글은 죽은 장르라 불리는 서부극이 실은 어떻게 태어나, 어떻게 죽었으며, 왜 죽지 않는가에 대한 탐구다. 먼저 그 문이 열려 있던 시절로 돌아가자.

Stagecoach (1939) John Ford, John Wayne, Ringo Kid….jpg

<역마차>
<역마차>

흔히 서부극의 시작을 <역마차>로 꼽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서부극은 그보다 30년도 더 전부터 존재했다. 에드윈 포터의 <대열차강도>는 서사영화 그 자체의 출발점이었고, 무성기의 브롱코 빌리 앤더슨과 윌리엄 S. 하트, 톰 믹스는 수백 편의 서부극을 찍어냈다. 다임 노블과 '와일드 웨스트 쇼'는 영화가 등장하기도 전에 이미 그 신화의 토양을 다져두었다. 그러나 1930년대 초 유성영화로의 전환기에 서부극은 B급 양산형 오락물로 전락한, 반쯤 죽은 장르였다. 그 장르를 다시 격조 있는 예술의 자리로 끌어올린 단 한 편이 <역마차>이며, 그 부흥을 이끈 감독이 존 포드다. 포드는 서부극을 발명한 자가 아니라, 통속의 공식을 물려받아 자의식적인 신화로 격상시킨 자다. 서부극을 가장 높은 자리에 올려놓은 그 사람조차, 그 출발점은 장르의 통속적인 과거에 놓여 있었다.

포드가 서부극보다 큰 감독이라는 것, 그의 예술이 이 장르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자리에서 이야기한 바 있다. 그러니 여기서는 그가 서부극에게 무엇이었는지만을 본다. 신화를 세운 자로서, 그리고 그 신화에 스스로 금을 낸 자로서.

<역마차>가 시작되면 카메라는 모뉴먼트 밸리를 담는다. 위압적인 사암들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그 광막한 대지 위를 한 대의 역마차가 가로지른다. "나의 영화가 낳은 진정한 스타는 대지다"라는 포드의 말대로, 이 초창기의 서부에서 인간은 아직 대지 위에 놓인 조그만 존재이고, 그 세계의 문은 활짝 열려 있다. 포드는 이 신화를 여러 얼굴로 지었다. 흔히 기병대 3부작이라 불리는 <아파치 요새>·<황색 리본을 한 여자>·<리오 그란데>에서 그것은 군대라는 제도가 되고, <황야의 결투>와 <왜건 마스터>에 이르면 서사조차 거의 지워진 채 대지의 운동성만이 남는다. 그러나 신화의 중심에는 언제나 한 사내가 있었다. <역마차>의 링고 키드는 세상 밖에서 들어와 사건을 해결하고 다시 세상 밖으로 나간다. 문은 아직 자유롭게 통과된다. 그러나 포드는 이 사내를 신화의 영웅으로 남겨두지 않는다. 링고는 사회적 명망이 보장된 곳으로 돌아가는 대신 또 다른 황무지로 길을 떠나며, 그는 결코 선(善)으로 채색된 인물이 아니다. 훗날 장르 전체가 겪게 될 균열의 첫 조짐이, 이 인물에게서 이미 나타나는 것이다.

The Searchers, 1956 _.jpg

그리고 <수색자>에서 그 균열은 더 커진다. 이든 에드워즈는 조카를 구해내지만 그를 선인이라 부를 수는 없다. 그는 인종적 증오에 눈이 멀어 있고, 적의 머릿가죽을 벗기며, 무엇보다 끝내 자신이 구한 그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로저 이버트가 "장엄함을 품고 있는 이미지들"이라 불렀던 그 화면들의 종착점에서, 문은 처음으로 닫힌다. 그것도 이 세계를 지켜낸 바로 그 사내를 향해. 신화를 세운 폭력이, 그 폭력을 휘두른 자를 신화의 안쪽에서 밀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 자기 배반을 포드는 끝내 자기 손으로 완성한다.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에서다. 이 영화는 무법의 힘이 법치의 질서로 대체되는 과정을 그린다. 그러나 그 교체의 진실은 잔혹하다. 악당 리버티를 쏜 것은 총잡이 톰이지만, 정작 그 공을 가로채 상원의원이 되는 것은 법의 인간 랜스다. 리버티를 쏜 것은 톰이지만, 톰을 죽인 것은 랜스인 것이다. 나아가 포드는 이 영화를 자신의 첫 걸작과 정확히 포개어 놓는다. <역마차>가 마차의 도착으로 시작해 마차를 타고 떠나는 주인공으로 끝나듯, <리버티 밸런스>는 열차의 도착으로 시작해 열차를 타고 떠나는 주인공으로 닫힌다. 서부극의 시작과 끝이라 불리는 두 영화가 완벽한 수미상관을 이루는 것이다. 스스로의 왕국을 건설한 존 포드는, 바로 그 왕국의 종말을 제 손으로 고했다.

<서부의 사나이>
<서부의 사나이>

포드가 낸 이 균열은 곧바로 폭발하지 않았다. 그것은 먼저 1950년대 미국 서부극 내부에서 한 걸음 더 벌어지고 있었다. 프레드 진네만의 <하이 눈>은 영웅 서사의 탈을 쓴 사회 드라마였다. 마을을 위협하는 무법자가 정오의 열차로 돌아오지만, 진짜 위기는 외부의 적이 아니라 마을 내부의 분열과 두려움이며, 결말에서 보안관 케인은 자신이 지켜낸 마을의 배지를 흙바닥에 내던지고 떠난다. 앤서니 만의 서부극들인 <서부의 사나이>, <운명의 박차>, <라라미에서 온 사나이>에서는 그 병증이 주인공의 내면으로 파고든다. 포드와 히치콕 사이 어딘가에 선 이 감독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강박과 트라우마에 붙들린 채, 폭력의 순환에서 끝내 빠져나오지 못한다. 유럽의 총잡이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미국 서부극은 이미 자신의 영웅을 병들게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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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서부극이 스스로 병들어가는 동안, 유럽에서는 이 신화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다루는 감독이 나타난다. 세르지오 레오네다. 신화를 해체하려면 먼저 그것을 집에서 끌어내야 했다. 미국의 자기 신화 안에 선 사람은 그것을 발가벗길 수 없었고, 그 일은 이방인의 손에서 일어났다. 레오네의 카메라가 담는 것은 대지가 아니라 눈동자다. 땀에 젖은 얼굴, 극단적으로 당겨진 클로즈업, 총구 앞에서 굳어가는 시선. 포드가 대지 위의 조그만 인간을 담았다면, 레오네의 화면에 남는 것은 결투를 앞둔 두 사내의 눈뿐이다. 그는 신화에 반박하지 않는다. 그는 신화를 비워낸다. 선악의 구분을 걷어내고 그 자리에 안무와 눈빛과 돈만을 남긴다.

<황야의 무법자>
<황야의 무법자>

이 비움이 하나의 완성에 이르는 것이 이른바 '달러 3부작'이다. <황야의 무법자>에서 레오네는 아직 거장의 설익은 품격을 보일 뿐이지만, <석양의 건맨>을 거쳐 <석양의 무법자>에 이르면 그 문법은 완성된다. 흥미로운 것은, <석양의 무법자>의 세 주인공 중 누구도 세계관의 최강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대단한 무력을 지녔음에도 그들은 남북전쟁이라는 거대한 힘 앞에서는 그저 무력하게 휩쓸리는 존재에 불과하다. 투코의 그럴듯한 계획은 다른 총잡이가 아니라 전쟁의 대포에 어그러지고, 무시무시한 무력의 투코와 블론디는 모양 빠지게 북군의 포로가 된다. 돈을 향한 여정 내내 포탄이 쉴 새 없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있으면, 이 영화는 무법자들의 살벌한 결투가 아니라 전쟁에 휩쓸린 어떤 미물들의 소동에 가깝다. 총잡이는 더 이상 세계의 중심이 아니다. 그를 압도하는 것은 그보다 크고 인격 없는 힘, 곧 역사 그 자체다. 특히 투코라는 인물에서 이 해체는 정점에 이른다. 그는 세상을 구원하는 영웅이 아니라, 그저 내일을 기약할 수 없어 살아남기 위해 도둑이 된 사내다. 레오네는 자신의 주인공에게 세상을 구할 임무를 맡기는 대신, 살아가며 쌓이는 온갖 짐을 지운다. 그렇게 히어로로 소비되던 서부의 주인공은 발가벗겨진다.

총잡이를 압도하는 그 인격 없는 힘을, 레오네는 다음 영화에서 훨씬 더 멀리 밀고 나간다. <옛날 옛적 서부에서>다. 이것은 냉소가 아니라 애도이며, 레오네는 신화를 바깥에서, 그리고 과거형으로 바라본다. 제목부터가 이미 "옛날 옛적에"라는 동화의 시제로 말해지고 있다. 언뜻 통속적인 복수극처럼 보이는 이 영화의 진실은 그 공식적인 하이라이트가 어디서 벌어지는가에 있다. 하모니카 맨과 프랭크의 최종 결투는 압도적인 정서를 함유하고 있음에도, 드라마틱한 공간이 아니라 이제 막 세워지고 있는 철도 공사 현장의 한 구석에서 이뤄진다. 카메라가 두 사내를 비추는 동안에도 배경의 망치질과 톱질은 멈추지 않는다. 총잡이들의 결투가 세계의 중심이던 시절이라면 이 장면은 정중앙에 놓였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결투는 새로 태어나는 세계의 변두리로 밀려나 있다. 복수가 완결되는 그 순간에도 시대는 복수와 무관하게 제 속도로 전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지점에서 레오네가 끝내 거부하는 것이 드러난다. 그는 이 새로운 힘에 얼굴을 부여하기를 거부한다. 자본에는 처음부터 주어가 없기 때문이다. 총잡이들의 세계는 언제나 주어가 명확했다. 하모니카 맨이 프랭크를 죽인다. 전부 인격 대 인격으로 서술 가능한 능동태의 세계다. 반면 "철도가 놓인다"는 문장은 처음부터 수동태로만 존재하는 힘이다. 철도 사업가 모튼은 관객이 이 새로운 질서에 인격을 부여하고 싶어 하는 욕망을 겨냥한 서사적 미끼일 뿐, 그가 죽어도 노동자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계속 레일을 깐다. 낡은 질서는 죽음으로 완결되는 서사를 갖지만, 새 질서는 죽을 수 있는 주체 자체를 갖지 않기에 서사화되기를 거부한다. 그리하여 이 영화는 한 문장으로 응결된다. 서부를 만든 자는 서부에 살 수 없다. 총잡이도, 무법자도, 심지어 그들을 대체했다고 믿어진 자본의 얼굴마저도 자신이 만든 세계 안에 자리를 갖지 못한다. 오직 총을 쏘지 않고 신화도 없이 그저 그 흐름에 몸을 맡긴 자, 새 도시의 여주인이 되는 질 맥베인만이 살아남는다. 레오네는 이 영화를 통해 말한다. 미래는 영웅의 것이 아니라 실용주의자의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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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침묵>
<위대한 침묵>

레오네가 문을 열자, 해체는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갔다. 세르지오 코르부치의 <위대한 침묵>은 그 극단이다. 우리가 기대하는 복수극의 골조 자체를 처참히 배반하며, 눈밭 위에서 말 못 하는 주인공은 끝내 패배하고 악당이 승리한다. 카타르시스의 문은 결코 열리지 않는다. 곧이어 미국이 자기 신화를 스스로 해체하기 시작한다. 샘 페킨파의 <와일드 번치>에서 서부의 사내들은 자동차와 기관총이라는 근대 앞에 슬로모션의 피바다 속에 살해당한다. 그의 <관계의 종말>에서는, 옛 친구 빌리를 쏜 개럿이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에 흠칫 놀라 그 상(像)을 향해 한 발을 더 쏜다. 더는 자기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게 된 사내가, 낯설어진 제 얼굴을 총으로 부수는 것이다. 언제나 바깥을 향하던 서부극의 폭력이 처음으로 안으로 돌아서는 순간이며, 훗날 <용서받지 못한 자>가 완성하게 될 자기 처형의 첫 예고이기도 하다. 로버트 알트만의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에서는 신화 바깥에서 스러진 속물의 몽상가들이 눈 속에 파묻히고, 마이클 치미노의 <천국의 문>은 미 서부 개척의 마지막을 장식하며 그 자신이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종말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급진의 가장 먼 가장자리에서,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의 <엘 토포>는 서부극을 초현실과 신비주의의 실험으로 용해시켰다. 십수 년 사이에 서부극은 그렇게 껍데기만 남을 때까지 발가벗겨졌다.

그리고 바로 그 발가벗겨진 폐허 위에서, 해체의 도구였던 한 사내가 그 칼을 자신에게로 되돌린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다. 유럽에서 신화를 비워내던 '블론디'는, 이후 20년에 걸쳐 직접 서부극을 연출하며 그 장르의 둘레를 맴돌았다. <무법자 조시 웰즈>에서 그는 서부극에서도 이상적인 연대가 그려질 수 있음을 보였고, <페일 라이더>에 이르면 총을 사는 바로 그 순간 성직자의 칼라를 벗어 내려놓는 사내를 통해, 행동하기 위해 다시 폭력이 되는 자의 초상을 예고했다. <석양의 무법자>와 <용서받지 못한 자> 사이 어딘가에 놓인 이 영화는, 그 두 세계 사이의 과도기였다. 그리고 마침내, 이스트우드는 그 결산에 다다른다. <용서받지 못한 자>다.

<용서받지 못한 자>는 구원의 이야기가 아니라 체념의 이야기다. 여자든 아이든 가리지 않고 죽였던 무법자 윌리엄 머니는, 죽은 아내가 교화시킨 뒤로 총 솜씨마저 함께 죽어버려 표적 하나 맞히지 못하는 사내가 되어 있다. 이스트우드는 무시무시했다는 이 사내의 과거를 단 한 번도 플래시백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다. 머니의 과거는 이미 <석양의 무법자>의 블론디로 관객의 눈에 새겨져 있으니까. 유럽에서 신화를 해체하던 그 이름 없는 총잡이가, 이제 나이 든 얼굴로 스크린에 돌아온 것이다. 해체의 도구였던 바로 그 몸이, 이제 그 해체를 심판하는 자리에 선다. 바로 여기에 이 영화의 핵심이 있다. 폭력을 오락처럼 소비하던 수정주의 서부극에 대하여, 이 영화는 안티테제의 안티테제다. 그것은 신화로 화해롭게 되돌아가는 일이 아니라, 영웅으로 소비되어 온 총잡이가 실은 무엇이었는지를 그 자신의 입으로 자백하게 만드는 일이다.

세 인물이 이 논리를 떠받친다. 명성으로 살아온 늙은 총잡이 잉글리시 밥의 신화는 말(言)에 의해 발가벗겨지고, 치기 어린 젊은이 키드의 신화는 처음 사람을 죽인 제 손에 의해 깨어진다. 늙은이의 신화는 말로 벗겨지고, 젊은이의 신화는 제 손으로 깨진다. 그리고 선하게 살고자 했던 머니는, 과거라는 악이 끝내 그를 놓아주지 않아 스스로 죽음의 화신이 된다. 아내가 끊게 했던 술을 다시 입에 대는 순간, 표적 하나 맞히지 못하던 총구는 이제 빗나가는 법이 없다. 그는 살롱에서 모두를 죽이고, 마을을 등지며 소리친다. 여자든 아이든 가리지 않고 죽여왔다고. 자식들에게조차 숨겨온 그 정체를 스스로 외치며, 어둠 속으로 말을 몬다. 이스트우드가 이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 새겨 넣은 헌사("세르지오와 돈에게 바친다")는 이 모든 것을 문서로 봉인한다. 자신을 만든 두 감독, 레오네와 돈 시겔에게, 해체의 도구였던 사내가 그 장르의 진혼곡을 바친 것이다. 신화의 문은 이렇게, 그 신화의 주인공이었던 자의 손으로 닫힌다.

문이 닫힌 뒤, 서부극은 죽은 장르가 되었다. 그러나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21세기에 그것은 다른 얼굴로, 혹은 다른 장르에 스며든 문법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 사후의 세계는 우선 소멸과 심판의 얼굴을 하고 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그 사후의 얼굴을 가장 서늘하게 보여주는 것은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다. 보안관 벨은 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조차 더 이상 읽어내지 못하고, 이 시대의 악을 이해하기를 포기한 채 배지를 내려놓는다. 이든이 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머니가 그 문을 스스로 닫았다면, 벨에 이르러서는 문턱 그 자체가 판독 불가능한 것이 된다. 한편 데이비드 매켄지의 <로스트 인 더스트>는 그 소멸을 경제의 언어로 옮긴다. 이제 프런티어를 삼키는 것은 무법자가 아니라 은행이고, 무법자의 자리를 물려받은 것은 압류다. 서부극의 문법은 여러 얼굴로 흩어졌다. 제인 캠피언의 <파워 오브 도그>는 서부극을 정밀한 심리극으로 다시 쓰고, 테일러 셰리든의 <윈드 리버>는 그 무대를 인간이 공멸하는 짐승의 황무지로 옮긴다. 쿠엔틴 타란티노는 <장고: 분노의 추적자>에서 서부의 역사를 전복의 순간으로 되돌리고, <헤이트풀 8>에서는 그 역사를 세상의 고해이자 징벌로 밀어붙인다.

그러나 이 사후의 세계가 소멸과 심판의 얼굴만 지닌 것은 아니다. 켈리 라이카트의 <퍼스트 카우>는 신화가 아니라 동화가 피어나는 무대가 되고, 제임스 맹골드의 <로건>은 늙고 병든 야수가 마지막 구원을 얻는 무대가 된다. 그리고 그중 정점에 코엔 형제의 <더 브레이브>가 있다. 거친 마초들의 장르에 어리고 연약한 소녀를 주인공으로 세운 이 영화에서, 코엔 형제는 뜻밖에도 서부극으로 한 편의 동화를 빚어낸다. 아버지의 원수와 단둘이 마주하는 순간에조차 복수극의 광기 대신 정적만이 감돈다. 매티는 고난을 견디지만 스스로 그것을 극복하지는 못한다. 그녀는 구원받는다. 뱀에 물린 그녀를 안고 카그번이 집으로 돌아가는 시퀀스는, 이 장르가 제 총잡이들에게 끝내 허락하지 않았던 귀향을, 정작 총 한 번 든 적 없는 어린아이에게만은 허락한다. 문이 닫힌 뒤에야, 장르는 자신이 한 번도 열어주지 않았던 문을 비로소 상상하기 시작한다.

다시 그 문 앞으로 돌아가자. 1956년의 이든은 문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신화가 아직 그 이유를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92년의 머니는 어둠 속으로 말을 몰아 사라진다. 그리고 이 순간, 장르는 마침내 그 이유를, 영웅이 자신이 구한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이유를 안다. 총잡이의 폭력은 문명이 들어설 자리를 만들지만, 그 자리에 세워지는 문명은 폭력이 사라진 세계다. 그를 쓸모 있게 했던 바로 그 능력이, 평화가 오는 순간 그를 그 평화의 위협으로 만든다. 그는 자신이 세운 문명 안에서 살 수 없다. 그래서 서부를 만든 자는 서부에 살 수 없었고, 그런 뜻에서 이 신화의 건설은 처음부터 애도이기도 했다. 그러나 애도가 끝은 아니었다. 신화는 죽었어도 장르는 그 죽음을 애도하고 또다시 꿈꾸며 살아남았고, 세대가 바뀔 때마다 누군가는 닫힌 문을 다시 열어 그 안을 들여다본다. 죽은 장르라 불리면서도, 서부극은 형태를 바꾸어 가며 여전히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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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 The Movie Databa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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