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한 글을 지면으로 옮겼습니다.

예술가를 그린 영화는 대개 두 방향 중 하나로 흐른다. 천재를 신화로 떠받들거나, 사기꾼으로 조롱하거나. 그런데 코엔 형제는 어느 쪽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예술가를 우러러보지도, 예술을 성전(聖殿)으로 떠받들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냉소로 일관하지도 않는다. 코엔이 응시하는 것은 재능과 진심이라는 두 축의 어긋남이다. 재능이 없어도 진심일 수 있고, 재능이 있다고 착각할 수도 있으며, 재능이 있어도 끝내 실패할 수 있다. 코엔은 이 어긋남 앞의 예술가를 미화도 조롱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오래 응시한다. 그 응시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그 시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코엔이 그린 세 명의 창작자를 나란히 세워 볼 필요가 있다. <헤일, 시저!>와 <바톤 핑크>와 <인사이드 르윈>. 이 세 편은 재능과 진심이라는 두 축을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어긋나게 배치한다. 재능이 없어도 진심일 수 있고, 재능이 있다고 착각할 수도 있으며, 재능이 있어도 끝내 실패할 수 있다. 코엔이 그리는 예술가란 대개 이 셋 중 하나다. 이 세 초상을 차례로 지나고 나면, 코엔이 예술을 대하는 태도의 밑바닥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가 드러난다.
첫 번째는 재능 없는 자의 진심이다. <헤일, 시저!>는 1950년대 할리우드를 배경으로, 스튜디오의 해결사 에디를 따라 여러 편의 영화가 동시에 만들어지는 촬영장을 누빈다. 꿈의 공장이라는 이름값을 하듯 그곳에서는 귀족극과 서부극과 종교영화와 뮤지컬이 한꺼번에 빚어진다. 찬란한 빛과 스타들 앞에서 우리는 더없는 매혹을 느낀다. 그러나 코엔은 그 빛의 저편 또한 모른 체하지 않는다. 어느 촬영장에서나 엑스트라 격의 배우들은 물건처럼 소비되고, 이미지를 바꾸어 보겠다며 평생 서부극에서 활약하던 배우를 정극에 던져 넣는 제작사의 행태는 지독하리만치 상업성을 앞세운다. 서로가 진짜 기자 정신의 소유자라 내세우면서도 결국 억지스러운 기삿거리를 좇는 기자들의 모습까지, 이곳의 할리우드는 순수한 열정과 아름다움만으로 채워진 공간이 결코 아니다. 겉으로는 저마다 그럴싸한 명분을 내세우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그놈이 그놈인, 욕망과 부조리가 넘실대는 공장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세계에서는 재능 있는 자들조차 미덥지 않다는 점이다. 영화판에서 가장 똑똑하고 글 잘 쓰는 엘리트라는 공산주의 작가 모임은 자본주의의 모순을 논리 정연하게 성토하면서도 정작 제 몸값 흥정과 스튜디오의 돈에 혈안이 되어 있고, 당대 최고의 대스타는 그들의 몇 마디에 앵무새처럼 이념을 읊어 대는 텅 빈 인물이다. 재능과 언변이 넘칠수록 진심은 도리어 텅 비어 가는 형국이다.
그럼에도 코엔은 영화를 향한 순수한 동경을 숨기지 않는다. 공산주의자로 밝혀진 배우가 주연을 맡았던 뮤지컬의 촬영 순간, 그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우리는 끝내 잊지 못한다. 제작의 순간들이 태산처럼 고되었을지언정, 의자에 앉아 영사기가 쏘아 올리는 영화를 마주할 때면 우리는 여지없이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리고 이 텅 빈 세계 한복판에서 진심을 지키는 이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재능과 가장 거리가 먼 자들이다. 액션 서부극 스타 호비 도일은 고상한 예술 영화의 감독 앞에서 대사 한 줄조차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는, 지식인의 눈에는 그저 투박한 꼭두각시일 뿐인 배우다. 그러나 납치된 대스타를 찾아내고 사건의 실마리를 푸는 것은 똑똑한 작가들이 아니라 바로 이 우직한 카우보이다. 계산도 허영도 없이 영화와 스튜디오를 향한 순수한 애정만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주인공 에디 역시 창작의 재능을 지닌 예술가는 아니다. 그는 새벽같이 십자가상 앞에 무릎 꿇어 기도하고, 매일같이 배우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며 할리우드라는 거대한 공장을 홀로 떠받친다.
이 모든 것을 하나로 잇는 것이 에디의 고해성사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에디는 아내의 만류에도 담배를 끊지 못함을 고해한다. 담배가 몸에 해로운 줄을 그 역시 알지만, 그럼에도 끊지 못하는 것이 담배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에디는 다시 고해소를 찾아 이 일이 너무나 힘들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하는 것이 옳은 것 같다고 고백한다. 담배와 닮았으되 그 요지는 정반대다. 부조리를 남김없이 알면서도, 옳다고 믿는 일을 끝내 놓지 못하는 것. 이것이 코엔이 그리는 창작자의 첫 번째 얼굴이다. 그는 재능의 유무를 따지기 이전에, 영화라는 환상에, 그리고 자신이 하는 그 일에 무엇보다 진심인 인간이다.

두 번째는 정반대의 초상, 곧 재능이 있다고 착각하는 자의 오만이다. <바톤 핑크>의 무대인 1941년은 할리우드의 황금기다. 시간을 이겨 내고 오늘날까지 고전으로 회자되는 걸작들이 이 무렵 쏟아졌고, 그만큼 재능 있는 작가들이 넘쳐 났으며, 제작자들은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그들의 두뇌를 착취했다. 극중 바톤 핑크가 마주하는, 정신이 피폐해진 작가 빌 메이휴 같은 이들이 할리우드의 호텔마다 몇이나 있었을지 모를 일이다. 흥미로운 것은 바톤 핑크가 묵는 호텔 방을 그의 머릿속이라 상정할 때 열리는 해석이다. 신경을 긁는 모기와 뜯겨 나가는 벽지를 그의 혼란한 정신으로 읽는다면, 방 안의 소심하고 억압된 바톤 핑크와 적극적이고 감정을 분출하는 이웃 찰리는 한 인격의 양면이 된다. 그의 또 다른 자아인 찰리는 호텔에 불을 지른다. 공상으로만 산발하는 아이디어는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갖지 못하기에, 바톤 핑크는 끝내 그 방을 떠날 수밖에 없다.
바톤 핑크는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말하지만 정작 보통 사람의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다. 진정한 연극을 논할 때면 흥분하여 자신의 견해를 쏘아 대지만, 상대가 입을 열기 시작하면 귀찮음을 숨기지 못한다. 남의 이야기에 귀를 닫은 자가 보통 사람의 이야기를 써낼 수 있을 리 없다. 결국 그가 손에 쥔 것은 완성된 작품이 아니라 머릿속에 산발하는 아이디어뿐이었다. 코엔이 겨누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공상을 작품으로, 아이디어를 재능으로 착각하지 말라는 것. 다만 코엔의 시선을 냉소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 그는 이 오만한 예술가를 비판하는 동시에, 창작의 고통에 매일 밤을 시달렸을 그 시대 작가들의 처지 또한 나란히 응시한다. 그런 의미에서 <바톤 핑크>는 모두를 존중하는 동시에 모두를 비판하는 영화다.
세 번째 초상은 앞의 둘을 넘어선다. 재능이 있으나 끝내 실패하는 자의 애수다. <인사이드 르윈>의 르윈 데이비스는 진심도 재능도 갖춘 인물이다. 그의 음악은 실제로 아름답다. 그런데도 그는 실패한다. 공연이 끝나자마자 낯선 사내에게 폭행당하는 장면으로 문을 여는 이 영화에서, 르윈은 제 거처조차 없어 지인의 집을 전전하며 빌붙어 연명하는 포크 뮤지션이다. 성공과는 거리가 멀고, 지인에게는 구박만 받으며, 그를 잘 모르는 이들에게는 존재감마저 희미하다. 본래 듀엣으로 활동했으나 파트너를 자살로 잃고 홀로 남은 그에게, 이 고독은 더욱 사무친다. 무엇보다 르윈 데이비스는 르윈 데이비스로 불리지 못한다. 전 애인 진은 그를 애쉬홀이라 부르고, 우연한 동승자는 그를 엘윈이라 부르며, 누군가는 그의 단짝 고양이를 두고 르윈이라 부른다. 자신의 이름조차 온전히 지니지 못하는 인간, 그것이 르윈의 처지다.
여기서 결정적인 관찰이 필요하다. 이 영화는 르윈의 실패에 이유를 대지 않는다. 그가 못나서도, 세상이 부당해서도 아니다. 코엔은 그저 재능과 진심이 성공을 조금도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건조하게 응시할 뿐이다. 영화는 몇 번이고 르윈의 비상을 기대하게 만들었다가 그 기대를 저버리며, 중반을 넘어서면 관객 스스로 그 기대를 접게 된다. 코엔의 영화 가운데서도 유달리 어둡고 뿌연 화면은 르윈의 처지를 시각화한 것이다. 흑백의 대비와 안개와 역광으로 먹먹하고 막막한 질감을 빚어낸 브루노 델보넬의 촬영은, 출구 없는 그의 삶을 한 장의 이미지로 응축한다. 그럼에도 르윈은 무너지고 쓰러져 목놓아 울지 않는다. 앞의 두 초상이 자기기만과 고해에 관한 것이었다면, 세 번째 초상은 착각도 위로도 없이 자신의 진실을 아는 자가 그 진실을 묵묵히 견디는 이야기다. 재능도 진심도 모두 갖추었으되 세상은 끝내 값을 치르지 않는, 가장 잔인하고 가장 순수한 경우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바로 이 대목에서 코엔의 결정적인 술수가 드러난다. 희망 없이 처연하기 그지없는 르윈의 삶은, 그럼에도 관객으로 하여금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여기에는 코엔의 짓궂은 재간이 있다. 그는 눈물겨운 이야기로 관객의 마음을 기어이 적시고 만다. 음악은 아름답고 이미지는 위대하며 감성은 절묘하다. 실패한 예술가의 밑바닥을 그리면서도, 코엔은 그 밑바닥을 끝내 아름답게 빚어 관객을 사로잡는다. 여기에 이 글이 향하는 역설의 씨앗이 있다. 우리는 예술가의 실패와 밑낯을 보면서도, 바로 그것을 그린 예술에 끝내 매혹된다.
세 명의 창작자를 관통하는 것은 하나다. 세상은 이 셋 중 누구의 진심에도 정당한 값을 치르지 않는다. 진심뿐인 자에게도, 착각한 자에게도, 재능까지 갖춘 자에게도. 코엔의 냉정함은 여기에 이른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세상이 값을 치르지 않는 그 까닭이 세 편에서 저마다 다르다는 점이다. 에디의 진심은 재능이 없어 인정받지 못하고, 바톤 핑크의 오만은 스스로 무너져 값을 잃으며, 르윈의 재능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저 좌초한다. 세상이 진심에 값하지 않는 데에는 어떤 일관된 논리도 없다. 다만 값을 치르지 않는다는 결과만이 세 초상을 관통할 뿐이다. 그러나 코엔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이곳은 욕망과 부조리가 넘치는 공장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영화를 사랑할 것이다.' 라는 듯이. <헤일, 시저!>가 그 온갖 부조리를 낱낱이 보여주고도 끝내 다다르는 자리가 바로 여기다. 코엔이 예술가를 미화하지 않는 것은 예술을 폄하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미화하지 않고도 사랑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밑낯을 남김없이 들여다보고도 끝내 남는 사랑, 그것이 코엔이 예술을 대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이 세 초상은 저마다 자기 진실 앞에서 다른 자세를 취한다. 에디는 자신의 고됨과 미련을 문자 그대로 고해하고, 바톤 핑크는 자기기만을 끝내 고백하지 못한 채 방을 떠나야 하며, 르윈은 고해할 죄조차 없이 그저 견딘다. 고백과 부인과 감내. 예술가가 자신의 진실 앞에서 취하는 이 세 가지 태도가, 코엔의 예술가론을 단순한 인물 나열이 아니라 하나의 스펙트럼으로 세운다. 세상은 진심에 값하지 않고 재능은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이 냉철한 인식과, 그럼에도 창작을 향한 사랑을 거두지 않는 태도. 코엔이 예술가를 그릴 때 미화도 조롱도 하지 않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는 예술가의 밑낯을 정면으로 응시하면서도, 그 앞의 인간을 끝내 비웃거나 떠받들지 않는다. 아무런 의미도 보장되지 않은 세계를 알면서도 담담히 껴안는 인간의 자세를 코엔이 오래 응시해 왔듯, 정당한 보상이 없음을 알면서도 예술을 사랑하는 그 마음 또한 코엔이 평생 놓지 않은 물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