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한 글을 지면으로 옮겼습니다.

극장에서 관객의 신체가 가장 상반된 자세를 취하는 두 장르를 꼽으라면, 아마도 코미디와 스릴러일 것이다. 전자는 긴장을 풀게 하고 후자는 긴장을 조인다. 웃음은 이완에서 터지고 공포는 응축에서 자라난다. 그래서 언뜻 우리는 이 두 장르가 여러 장르들 중에서도 서로 가장 먼 지점에 놓인다고 은연 중에 생각하게 되고, 때문에 한 감독이 둘 중 하나를 훌륭하게 다루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기꺼이 그를 거장이라 부른다. 그런데 코엔 형제는 이 정반대의 두 장르를 모두 정점에서 짓는다. 한 편에서 관객을 배꼽 잡게 하던 손이 다른 편에서는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고, 때로는 한 편 안에서 그 두 가지를 동시에 해낸다. 이 양립은 어떻게 가능한가.
조엘 코엔과 에단 코엔, 이 두 형제는 데뷔 이래 사십 년 가까이 각본과 연출과 편집을 손수 도맡으며 자신들만의 세계를 쌓아 올렸다. 그들의 필모그래피는 믿기 어려울 만큼 장르의 폭이 넓다. 피가 흥건한 범죄극과 능청스러운 소동극이, 건조한 서부극과 우아한 시대극이, 흥겨운 음악 영화와 서늘한 종교적 우화가 한자리에 뒤섞여 있다. 이 종횡무진의 이력을 앞에 두고 우리는 자연스레 묻게 된다. 이토록 이질적인 영화들을 짓는 이 형제를 과연 하나의 이름으로 묶을 수 있는가. 나는 묶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매듭은 의외로 단순한 곳에 있다.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굳이 멀리 갈 필요도 없다. 사실 <파고> 한 편이면 충분하다. 비장한 음악과 함께 자동차 한 대가 씨에라를 견인한 채 설원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오프닝에서부터, 이 영화는 자신이 어느 한쪽 장르에만 속하기를 거부한다. 장인의 재산을 노리고 자신의 아내를 납치해 달라 사주한 제리 룬드가드는, 예상치 못하게 꼬여 가는 사건들 앞에서 무너진다.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의 인물들이 하나같이 순진하고 어리숙하다는 점이다. 납치를 사주하는 자는 마음이 여려 철저하지 못하고, 살인을 저지르는 자들은 단순하며 방심이 잦다. 그들의 계획이 어긋나는 것은 세상이 유난히 가혹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그들이 자신의 계획을 감당할 만한 그릇이 못 되기 때문이다.

코엔은 인물이 말하는 속도에 맞추어 다음 숏으로 넘어가는 박자를 세밀히 조절하고, 대화의 장면마다 단독 숏을 자주 부여하여 마치 관객이 인물과 직접 마주 앉은 듯한 착각을 빚는다. 로저 디킨스가 담아낸 새하얀 설원은 세공업자의 디테일을 보는 것 같고, 커피를 든 마지의 뒤로 시체가 놓인 그 한 컷마저 절묘하다. 이 정교하게 통제된 표면은 그 자체로 하나의 기대를 심는다. 모든 것이 질서 있게 흘러가리라는 기대다. 그러나 코엔은 바로 그 표면을 찢기 위해 그것을 공들여 세운다. 소박하고 사랑스러운 세계 안에서 일순간 서늘한 피가 배어 나온다. 대낮에 제리의 집을 습격해 아내를 납치하는 장면은 그 대담함에 실소가 나오면서도 한가로운 일상을 깨뜨리는 습격이라는 점에서 소름이 끼치고, 홧김에 경찰을 쏴 죽이는 개어의 모습을 마주하면 등골이 서늘해진다. 만삭의 몸으로 사건을 좇는 마지는 여느 형사가 두르는 독기와 광기 대신 사랑스럽고 인간적인 인물이지만, 그녀가 걸어 들어가는 세계는 지독할 정도로 소름 끼친다. <파고>는 소박하고 사랑스러운 한편 지독할 정도로 소름 끼치는 영화다. 즉 한 편의 영화 안에 이미 두 개의 출구가 나란히 열려 있다.
여기서 우리는 코엔이라는 감독을 관통하는 하나의 골조를 발견한다. 코엔의 모든 주인공은 계획을 세운다. 나름의 합리를 갖춘 계획이다. 그러나 그 계획은 반드시 어긋나고,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 버린 파국으로 그들을 떠민다. 그 어긋남 위에서 세상은 그들에게 어떠한 의미도 보장하지 않는다. 이것은 스릴러의 골조인 동시에 코미디의 골조다. 그러므로 진짜 물음은 여기서 비로소 시작된다. 같은 골조에서, 어떻게 정반대의 감정이 태어나는가.
코엔의 영화는 실없어 보이다가도 일순간 소름이 돋게 만드는 순간들을 품고 있다. 어쩌면 이 독특한 온도야말로 코엔이라는 이름의 서명이라 할 만하다. 그의 영화에서 웃음과 불길함은 서로를 밀어내는 대신 한 장면 안에 포개진다. 관객은 자신이 지금 웃어야 할지 긴장해야 할지 확신하지 못한 채, 인물과 함께 불안정한 바닥 위를 걷는다. 바로 이 발밑의 불확실함이야말로 코엔이 두 장르를 동시에 거느릴 수 있는 비결이다. 장르란 본디 관객을 특정한 감정으로 안착시키겠다는 일종의 약속이다. 코엔은 그 약속을 처음부터 지킬 뜻이 없다. 안정된 감정의 지반을 관객에게 허락하지 않는 감독에게, 코미디와 스릴러의 경계란 애초에 견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카메라 앞에서 두 장르는 언제라도 서로에게 스며들 준비가 되어 있다. 인물의 악몽을 그저 지켜볼 때 우리는 그것을 코미디로 즐기지만, 그 고난이 감당할 수 없는 규모로 인물을 덮치는 순간 더 이상 그것을 유머로 즐길 수 없게 된다. 곧 인물이 감당할 수 있는 선을 그 고난이 넘어서느냐 아니냐가, 웃음과 공포를 가르는 첫 번째 분기점이다. 그러나 크기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같은 골조는 두 갈래의 전혀 다른 출구를 가지며, 그 두 출구를 끝까지 밀어붙인 영화들을 나란히 놓을 때에야 그 갈림의 정체가 드러난다.

첫 번째 출구는 허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코엔의 영화 가운데 가장 장르적인 외피를 두른 작품이다. 거창한 음악도 현란한 기교도 자제된 채, 텍사스 사막의 모래알을 씹는 듯 건조한 네오 웨스턴의 표면 위로 돈가방을 둘러싼 추격이 굴러간다.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에 이 영화의 서스펜스는 장중할 만큼 느리고 우아하며, 연쇄되는 숏들의 화학 작용은 코엔의 어떤 영화보다 강렬하다. 그러나 이 장르적 외피 아래에는 코엔이 평생 관철해 온 주제의식이 가장 완성된 형태로 내재되어 있다. 영화는 늙은 보안관 에드가 몇 년 전 자신이 사형대로 보낸 한 청년 살인마를 회고하며, 요즘의 범죄에는 딱히 동기조차 없다고 탄식하는 것으로 문을 연다. 그는 직업적 책임감으로 사건 현장을 뒤쫓지만 사태의 핵심에는 끝내 닿지 못하고, 모든 일이 마무리된 뒤의 찌꺼기만 주워 먹는 도태된 늙은이처럼 보인다. 그가 만나는 이마다 건네는 이야기의 요지는 언제나 같다. 세상이 왜 이 모양인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것. 세상에 드리운 빚을 밝히려는 수많은 이들은 그렇게 끊임없이 좌절한다.
이 세계의 문제적 존재 안톤 쉬거는 흔한 혼돈의 살인마가 아니다. 그는 우연을 운명이라 믿고, 그 우연이야말로 세상을 작동시키는 질서라 굳게 믿는 인물이다. 동전의 앞뒷면으로 상대의 생사를 가르고, 치밀한 계획을 거쳐 무혈로 약국을 터는 그 앞에서, 계획이라는 인간의 오만은 무력하게 부서진다. 퇴역군인이자 전 용접공인 르웰린 모스는 이 악마에 홀로 맞서는 인간처럼 보인다. 단서를 좇아 돈가방을 손에 넣고, 자신을 쫓는 존재를 직감하여 덫을 치고 무장하며 철저히 대비하는 그를 보며, 우리는 그가 이 악마를 이겨낼 수 있을지 묻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애초에 대적과 극복의 차원이 아니었다. 쉬거가 몰고 온 것은 그의 몸뚱이만이 아니라, 거스를 수 없는 죽음과 이해할 수 없는 우연의 기운이었기 때문이다. 르웰린은 예상치 못한 순간, 지금껏 접점조차 없던 이들의 손에 우연처럼 또 운명처럼 스러진다. 우연에 맞선 무수한 인간 중 하나였던 그는, 끝내 그 우연을 피하지 못했다. 어긋남이 이 정도에 이르면 그것은 더 이상 웃기지 않다. 남는 것은 오직 허무뿐이다.
<시리어스 맨>의 래리 고프닉 역시 다르지 않다. 물리학을 가르치는 인물, 곧 질서와 확신을 업으로 삼는 인간에게 어느 날부터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이 연달아 쏟아진다. 코엔은 이 붕괴를 형식으로 옮긴다. 꿈과 현실의 레이어를 능수능란하게 쌓아 올렸다가 어느 순간 뒤집어 버리는 그의 연출 앞에서, 관객은 래리와 함께 무엇이 실재이고 무엇이 환영인지에 대한 확신마저 잃는다. 질서를 가르치던 자의 세계에서 질서의 지반 그 자체가 흔들리는 것이다. 성적을 올려 달라며 돈 봉투를 두고 가는 학생, 이혼을 요구하는 아내, 신경을 긁는 이웃. 그가 찾아간 랍비들은 끝내 해답을 쥐어 주지 않는다. 신의 뜻이라 여기라는 말, 답은 없지만 의무는 존재한다는 말만이 돌아올 뿐이다. 너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단순하게 받아들이라는 영화 첫머리의 경구는, 새로운 고난이 닥칠수록 지키기 어려운 명령이 된다. 무엇보다, 악몽이 끝난 듯한 자리에서마저 예측할 수 없는 재앙이 기다린다는 것이 이 세계의 비극이다.

여기서 우리는 어긋남이 허무로 귀결되는 조건을 하나 세울 수 있다. 그것은 어긋남 뒤에 아무런 의미도 없을 때, 코엔이 그 심연을 끝내 채워 주지 않고 비워 둘 때다. 그런데 코엔의 세계가 여기서 끝이었다면, 그는 그저 냉혹한 허무주의자로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손이 정반대의 영화를 빚어낸다. <아리조나 유괴사건>이나 <위대한 레보스키>를 보고 있노라면, 도대체 이 영화들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만든 감독의 작품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다. 시종 심각하고 순도 높은 스릴러에서, 이렇듯 헐렁하고 유쾌한 코미디까지 모두 만들 줄 아는 감독이라니. 그리고 바로 그 의심 속에 답이 있다.
<위대한 레보스키>의 듀드는 자신에게 닥친 혼돈을 통제하려 들지 않는다. 오인과 착오가 사방에서 그를 덮쳐도, 그는 그것을 붙잡는 대신 흘려보내고 볼링장으로 향한다. 듀드는 세상이 내다 버린 세대의 초상이기도 하다. 진짜 세상을 경험하기도 전에 전장으로 내몰렸다가 갈 곳 없이 거리로 내던져진, 몸만 자란 아이. 그런 그에게 직장이나 구하라며 잔소리하는 동명이인의 백만장자 제프 레보스키는, 책임 없는 조언을 던지는 기득권의 얼굴이다. 세상은 듀드를 돕지 않았고 앞으로도 돕지 않을 것이다. 곁을 지키는 친구 월터가 전쟁을 한탄하면서도 호전성을 끝내 버리지 못하는 인물이라는 점은, 그 상처가 개인의 것이 아니라 한 세대 전체의 것임을 넌지시 일러 준다. 싸이키델릭한 환각의 연출에 웃음이 터지면서도, 끝내 그가 밑바닥의 삶을 벗어나지 못하리라는 절망적인 확신에 마음이 씁쓸해지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듀드는 무너지지 않는다. 그는 세계의 무의미에 짓눌리는 대신 그것을 흘려보내는 법을 아는 인물이다.
그러나 무의미를 껴안는 방식이 오직 하나인 것은 아니다. 듀드가 끝내 변하지 않는 인물, 곧 세계를 있는 그대로 흘려보내는 정적인 초연으로 웃음을 빚는다면, <아리조나 유괴사건>의 하이는 정반대의 경로를 밟는다. 세 번의 범죄로 세 번 감옥을 드나든 이 구제 불능의 사내에게 세상은 좀처럼 곁을 내주지 않는다. 결혼 이후에도 그는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아내는 불임의 난관에 부딪히며, 전과 탓에 입양마저 거부당한다. 그들에게는 오직 고난만이 닥친다. 세상은 이제 막 시작하려는 이들을 도와주지 않고, 그렇기에 그들의 일탈은 어쩌면 필연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이가 꿈속의 레너드 스몰스와 벌이는 대결은, 실은 자기 자신과의 대결이다. 어긋남의 연속 끝에서 하이는 마침내 어른이 된다. 하고 싶은 대로 행하며 책임지지 않던 미성숙에서, 옳은 것을 택할 줄 아는 인간으로 나아간다. 듀드가 세계를 향해 자신을 열어 둔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면, 하이는 세계와 부딪치며 스스로를 바꾸어 냈다. 전자의 웃음이 체념에 가까운 해탈에서 온다면, 후자의 웃음은 성장이라는 안간힘에서 온다. 그럼에도 두 웃음은 한 뿌리에서 자란다. 무의미한 세계 앞에서 무너지기를 거부했다는 바로 그 하나의 자세에서.
여기서 앞서 세운 결론을 수정해야 한다. 희극이 태어나는 조건은 어긋남 뒤에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다. 코엔의 코미디에서도 세계의 무의미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다. 그러나 무너지지 않고 살아남는 것만으로 웃음이 태어나는 것도 아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이 점을 미리 일러 준다. 벗어날 수 없는 죽음과 피해 갈 수 없는 우연은, 그에 맞서는 이에게는 지옥을, 그에 체념하는 이에게는 구질구질한 내일만을 건넬 뿐이다. 우연에 맞선 모스에게는 죽음이 주어졌고, 우연에 체념한 에드에게는 도태된 노년이 주어졌다. 곧 체념은 죽음을 면하게 할지언정 웃음을 낳지는 못한다. 듀드의 흘려보냄이 에드의 체념과 갈라지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에드는 세상이 왜 이 모양인지 끝내 묻기를 멈추지 못한 채 그 물음의 무게에 짓눌리지만, 듀드는 그 물음 자체를 내려놓고 볼링장으로 향한다. 무의미를 한탄하며 견디는 자에게는 구질구질한 내일이, 무의미를 한탄 없이 껴안는 자에게는 웃음이 주어진다. 허무는 심연 앞에서 인간이 지워지거나 도태될 때 오고, 희극은 같은 심연을 인간이 담담히 끌어안을 때 온다.
그러므로 코엔의 두 얼굴은 사실 두 얼굴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세계관을 비추는 두 각도일 뿐이다. 계획은 반드시 어긋나고 세상은 의미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이 냉엄한 전제는, 세상에 아무런 의미도 목적도 없다는 '니힐리즘'의 전제인 동시에 희극의 전제이기도 하다. 두 장르를 가르는 것은 세계가 아니라, 그 세계 앞에 선 인간의 자세다. 같은 우연 앞에서 모스는 스러지고 에드는 도태되지만, 듀드는 볼링을 치러 간다.
이 지점에서 코엔의 영화는 단순한 장르적 유희를 넘어선다. 그들이 던지는 질문은 결국 하나다.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은 세계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코엔은 이 물음에 섣부른 답을 내놓지 않는다. 다만 맞서다 스러지는 자와 체념한 채 늙어 가는 자와 담담히 껴안고 살아가는 자를 나란히 세워 놓고, 그 앞에서 웃어야 할지 몸서리쳐야 할지를 관객의 몫으로 남겨 둘 뿐이다. 냉소와 온정 사이의 이 아슬아슬한 균형이 코엔을 여느 허무주의자와도, 여느 이야기꾼과도 구별 짓는다. 세상의 무의미를 정면으로 응시하면서도 그 앞의 인간을 끝내 조롱하거나 미화하지 않는 시선, 그것이 이 형제의 영화를 오래 곱씹게 만드는 힘이다.
코엔이 코미디와 스릴러라는 가장 먼 두 장르를 모두 완벽하게 지을 수 있었던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에게 두 장르는 처음부터 다른 것이 아니었다. 그는 두 장르 사이를 오간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관을 두 방향에서 조명했을 뿐이다. 서두에서 던진 물음, 이 이질적인 영화들을 하나의 이름으로 묶을 수 있는가에 대한 답도 이로써 주어진다. 코엔의 필모그래피를 관통하는 매듭은 특정한 장르도, 반복되는 소재도, 익숙한 스타일도 아니다. 그것은 세계를 바라보는 하나의 시선, 곧 계획은 어긋나고 세상은 무의미하다는 냉철한 인식과, 그럼에도 그 인식 앞에서 인간이 취하는 자세에 대한 집요한 관심이다. 볼링핀은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고, 다시 일어나도 다시 쓰러진다. 쓰러짐은 이미 정해져 있으며, 남는 물음은 오직 하나, 그것이 다시 일어서느냐 마느냐다. 코엔의 인간들은 언제나 쓰러진다. 그리고 그들 중 누군가는 다시 선다. 코엔의 모든 영화는 결국 그 한 끗의 차이에 관한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