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한 글을 지면으로 옮겼습니다.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금지한 감독이 있고, 카메라 앞에서 연기 외엔 아무것도 허락하지 않은 감독이 있다. 전자의 인물은 로베르 브레송이고, 후자의 인물은 잉마르 베리만이다. 로베르 브레송은 '배우'라는 말을 거부하고 그들을 '모델'이라 불렀다. 리허설을 지치도록 반복시켜 배우의 의도와 해석을 소진시킨 뒤, 표현이 빠져나간 텅 빈 몸짓과 발화만을 화면에 남기려 했던 인물이다. 잉마르 베리만은 정반대로 나아갔다. 인간의 얼굴을 그 어떤 감독보다 오래, 가깝게 붙든 클로즈업으로 필모그래피 전체를 채웠다. 한쪽은 얼굴에서 표정을 지웠고, 한쪽은 표정 가득한 얼굴을 화면에 가득 밀어 넣었다.
그런데 서로 대척점에 선 두 사람이 실은 같은 질문 앞에 평생을 머물렀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신은 왜 침묵하는가. 둘은 평생을 이 하나의 물음에 붙들려 있었다. 다만 그 물음 앞에 선 두 사람의 자리는 정반대였다. 브레송은 믿는 자였다. 가톨릭 신앙 속에서 그는 은총이란 인간이 구해서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저항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라 믿었고, 성당에 앉아 있을 때 초월의 임재를 느낀다고 말한 사람이었다. 반면 베리만은 믿지 않는 자였다. 엄격한 루터파 목사의 아들로 자라 끝내 신앙을 버렸지만, 무신론을 선언하고 수십 년이 지난 뒤에도 "나는 평생 신과의 고통스럽고 기쁨 없는 관계와 씨름해왔다"고 현재형으로 쓴 사람이었다. 신을 버렸으되 신에게서 놓여나지는 못한 자.
그렇다면 답은 간단한 것이 아닌가. 믿는 자는 침묵 앞에서 그것을 받아들이고, 안 믿는 자는 그 침묵을 부재의 증거로 읽으리라고. 그러나 그들의 작품 속 형식은 이 예상을 배반하는 것처럼 보인다. 믿는 브레송이 화면을 비웠고, 믿지 않는 베리만이 화면을 채웠다. '소거'와 '과잉'. 신을 확신한 자가 가장 앙상한 문법을 택했고, 신을 의심한 자가 가장 과열된 문법을 택했다. 이 글은 같은 침묵에 대한 두 개의 상반된 형식적 해답을, 그리고 그 형식이 각자의 신앙과 어떤 관계에 놓이는지를 따라가 보려는 시도다.

브레송에게 연기는 거짓이다. 배우가 감정을 "표현"하는 순간, 카메라는 그 표현의 기교를 담을 뿐 감정 자체는 담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비운다. 프레임에서 정보를 덜어내고, 음악을 걷어내고, 배우에게서 해석을 소진시킨다. <사형수 탈옥하다>에서 카메라가 감방의 전경 대신 손과 얼굴만을 클로즈업으로 가두고 옆방 수감자의 존재를 화면 이동 없이 소리만으로 전하듯, <호수의 란슬롯>의 마상시합이 창과 갑옷의 충돌을 정면으로 담지 않고 리액션과 양철 두드리는 잡음으로만 처리하듯 말이다. 소거는 보여줄 것을 지워, 관객을 인물의 감각 안에 가두는 형식이다. 그런데 이 형식은 단지 미학적 취향이 아니다. 브레송에게 비움은 신학이었다. 인간이 손대는 표현을 모두 걷어낸 자리라야, 인간의 것이 아닌 무언가가 통과할 수 있다고 그는 믿었다.
<어느 시골 본당 신부의 일기>는 이 신학의 가장 직접적인 판본이다. 젊은 신부는 프레임을 인상적으로 구성하지도, 강렬한 연기로 감정을 웅변하지도 않는다. 영화는 그의 병약함과 무력함, 신자들의 냉대와 스스로의 회의를 아무런 극적 장치 없이 담담하게 통과할 뿐이다. 그런데 바로 그 무장식(無裝飾) 때문에, 죽음에 이르도록 믿음을 놓지 않는 신부의 마지막을 마주할 때 관객은 설득이 아니라 경외로 반응하게 된다. 신앙이 흔들리는 인간을 흔들리는 그대로 지켜본 자리에서, 끝내 그것을 붙드는 인간에 대한 숭고가 발생한다. 브레송은 신앙을 강변하지 않는다. 신앙을 강변하지 않음으로써 신앙을 설득한다.
소거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먼 지점은 <당나귀 발타자르>다. 브레송이 모델에게서 지우고자 했던 그 '표현'을, 당나귀는 처음부터 가지고 있지 않다. 표정을 지을 수 없고 대사를 말할 수 없으며 카메라를 의식할 수조차 없는 이 짐승은, 브레송이 평생 배우를 몰아붙여 도달하려 했던 완성태이자, 이미 비워진 모델 그 자체다. 인간이 가할 수 있는 온갖 학대를 밑바닥까지 통과한 발타자르가 마침내 산속에서 양떼에 둘러싸여 눈을 감을 때, 화면에는 어떤 신학적 대사도 감정적 음악도 없다. 그럼에도 그 죽음은 성인(聖人)의 순교처럼 도래한다. 말할 수 없는 존재가 그저 거기 있음으로써, 언어로는 끝내 옮길 수 없는 종교적 신성이 발생하는 것이다. 표현의 완전한 부재가 곧 신성의 조건이 된다는 이 역설. 그것이 브레송 소거의 극한이다.

<무셰트>는 같은 논리를 인간에게 적용한다. 학대받는 소녀의 수난을 그리면서도 브레송은 감정을 자극하는 어떤 연출도 삽입하지 않는다. 판단을 관객의 몫으로 남긴 채, 소녀가 스스로 세상을 등지는 마지막 순간마저 카메라는 무심함을 버리지 않는다. 그런데 감정을 강요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그 죽음은 벌이 아니라 구원처럼 읽힌다. <소매치기>는 이 구원의 구조를 정식화한다. 방탕한 자유를 좇던 주인공은 감옥이라는 제도에 갇히고 나서야 그 좁은 자리에서 비로소 진짜 자유를 만난다. 자유는 더 가짐이 아니라 스스로를 내어줌으로써 완성된다는 것. 이것은 은총의 논리 그 자체다. 브레송의 인물들은 언제나 무언가를 잃음으로써 무언가에 도달한다. 소거는 촬영의 방법이자 동시에 그의 구원론이었다.
그런데 이 문법은 스스로 균열을 내기도 한다. <몽상가의 나흘 밤>에서 브레송은 처음으로 음악과 플래시백, 유람선이 다리 밑을 지나는 서정적 이미지를 허락한다. 주인공 자크는 브레송 자신의 투영이고, 그를 뒤흔드는 마르테는 통속극과 할리우드적 정서가 그의 세계로 침투하는 통로, 곧 '베리만'적 과잉이 보내는 유혹의 화신이다. 마르테가 등장할 때만 화면은 멜로와 관능으로 젖고, 그녀가 부재하는 장면은 다시 미니멀리즘으로 돌아온다. 브레송은 그 유혹 앞에서 흔들리지만 결국 고독한 소거의 자리로 회귀한다. 스스로 이 영화를 비극이라 부른 것은, 자신이 이 길 외에는 걸을 수 없다는 자각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소거는 브레송의 유작 <돈>에 이르러 가장 어두운 국면으로 들어선다. 무의미한 연쇄 살인이 벌어지고, <당나귀 발타자르>의 마지막을 감싸던 은총의 빛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발타자르의 죽음이 성인의 순교로 도래했다면, <돈>의 살인은 어떤 구원의 기미도 없이 그저 차갑게 전시된다. 그러나 여기서 은총이 소멸했다고 말하는 것은 성급하다. 브레송은 신을 버린 것이 아니라, 신이 물러나고 은총이 거두어진 세계가 어떤 지옥이 되는지를 끝까지 응시한 것이다. 은총 없는 인간의 삶이 물질에 짓눌려 무의미한 기계로 전락하는 그 밑바닥을 그려냄으로써, 그는 역설적으로 은총이 없어서는 안 될 것임을 증명한다. 소거는 성스러움에 도달하는 통로였고,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성스러움의 부재를 그려 그 필요를 (어쩌면 다소 거칠게 느껴질 만큼) 요청하는 자리에까지 나아갔다.
베리만은 정반대의 길을 택했다. 베리만에게 신의 부재를 증언하는 것은 텅 빈 화면이 아니라 견딜 수 없이 꽉 찬 얼굴이었다. 인간이 신을 향해 묻고 응답을 얻지 못할 때, 그 절망은 표정이 되어 얼굴 위에 떠오른다. 클로즈업은 그 절망을 붙드는 베리만의 유일한 신학적 도구였다. 브레송이 표현을 지운 자리에서 신성을 기다렸다면, 베리만은 표현을 극한까지 밀어붙인 자리에서 신의 부재를 드러냈다.

<제7의 봉인>에서 죽음은 은유가 아니라 체스를 두는 실체로 화면에 등장한다. 이미지 자체가 곧바로 신학적 명제가 될 수 있다는 이 믿음 (브레송이라면 결코 손대지 않았을 종류의 '마법') 을 베리만은 서슴없이 끌어들인다. 기사 블로크는 흑사병이 창궐하는 세상 한복판에서 신에게 존재를 증명하라 요구하지만 신은 침묵한다. 응답 없는 그 자리를 영화는 죽음의 형상과 종말의 이미지로 가득 채운다. 브레송이 침묵의 자리를 비워 두었다면, 베리만은 그 침묵을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조각한다.
이 침묵을 정면으로 마주한 영화가 <겨울 빛>이다. 목사 토마스는 이름부터 의심하는 자, 예수의 제자 도마(토마스)의 이름을 지녔다. 피아노 연주자가 연주 도중 하품을 한다거나, 신자들이 찬송 도중 나갈 채비를 하는 등 은혜와 권위가 이미 빠져나간 텅 빈 교회의 목사 토마스는, 절망에 빠져 찾아온 신자 요나스에게 "신은 없다."고 자신의 마음을 정직하게 고백한다. 목사의 입에서 나온 그 정직은 요나스의 죽음이라는 파국으로 되돌아온다. 영화는 십자가 위 예수의 마지막 절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를 직접 인용하며, 누군가에게 버림받는 고통이야말로 인간이 겪는 가장 근원적인 고통임을 짚는다. 끊임없이 사랑을 구하는 무신론자 메르타와, 그녀에게 끝내 마음을 열지 않는 토마스의 구도가 고해하는 인간과 침묵하는 신의 구도를 그대로 반사하는 이 영화에서, 응답은 끝내 오지 않는다.
신앙의 이 하강은 <침묵>에 이르러 마지막 단계에 다다른다. 베리만 자신이 <겨울 빛>을 포함한 세 편을 하나의 계열로 묶어 '형이상학적 환원'이라 부르며, 그 종착점인 <침묵>을 '신의 침묵, 그 부정적 각인'으로 규정한 바 있다. 여기서는 앞선 영화들에 그나마 남아 있던, 신을 향한 물음의 형식조차 사라진다. 남는 것은 부재 그 자체다. 낯선 도시의 호텔 방에 갇힌 두 자매는 서로의 결핍을 채우려 손을 뻗지만 강렬한 흑백 콘트라스트 속에서 끝내 닿지 못하고, 채워줄 수 있는 타인은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만이 그들 사이에 남는다. 신의 침묵은 이제 신을 향한 물음이기를 그치고, 인간과 인간이 서로에게 가닿지 못하는 침묵으로 온전히 옮겨 앉는다. 신이 말하지 않는 세계에서 인간마저 서로에게 말하지 못할 때, 침묵은 비로소 완성된다.

이 문법의 절정은 <침묵>의 3년 뒤 세상에 등장한, 아마도 베리만의 최고 걸작인 <페르소나>다. 신의 침묵이 인간과 인간 사이의 침묵으로, 그리고 이제 한 인간과 그 자신 사이의 침묵으로까지 파고든 자리에 이 영화가 있다. 두 배우의 얼굴이 반쪽씩 겹쳐지는 그 유명한 이미지 앞에서, 브레송이라면 얼굴 자체를 지웠을 자리에 베리만은 두 개의 얼굴을 하나로 욱여넣는다. 엘리자벳과 알마라는 두 인격이 하나의 얼굴로 뭉개지고, 그 뭉개짐은 가면 없이는 살 수 없는 인간이라는 조건 자체를 겨냥하며, 나아가 관객을 향해 이미지를 조작하는 영화라는 매체 자신의 가면까지 함께 벗겨낸다. 브레송이 당나귀라는 이미 비워진 존재에게서 신성을 찾았다면, 베리만은 두 개의 자아를 견딜 수 없이 밀착시켜 그 마찰 속에서 정체성 자체가 붕괴하는 재앙을 드러낸다. 신이 사라진 자리를 인간의 가면으로 메우려 할 때 벌어지는 존재론적 파산, 그것이 베리만의 침묵이다.
이 밀도 짙은 문법에 나 자신이 반문한 적도 있다. <정열>을 보며 이렇게 적기도 했었다. "베리만은 자신이 관심 있는 '순간' 외에는 거의 장력을 버리다시피, 시간을 방치해 두는 인상마저 준다." 이를테면 타르코프스키가 러닝타임 전체를 고르게 붙들어 두지만, 베리만의 과잉은 연속적이지 않고 폭발적이다. 얼굴이 극한에 도달하는 몇 순간을 위해 나머지 시간을 정말로 방치하는 것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이 방식은 때로 강렬함이 기교 자체로만 기능하는 인상을 남기기도 하지만, 그 몇 순간의 얼굴이 담아내는 신의 부재의 무게는 다른 어떤 형식으로도 대체되지 않는다.
그런데 평생 과잉을 밀어붙인 베리만은 마지막에 이르러 방향을 튼다. 스스로 은퇴작으로 삼은 <화니와 알렉산더>에서, 신은 여전히 침묵하고 종교는 여전히 위선적이다. 주교라는 인물을 통해 종교의 독선은 노골적으로 심판받는다. 그러나 영화는 처음으로 클로즈업된 얼굴들의 격돌이 아니라 "작은 세계"에 둘러앉은 식탁을 답으로 내놓는다. 신이 끝내 응답하지 않아도, 지금 곁에 있는 이들과 함께 먹고 웃는 일상의 온기 자체로 이미 충분하다는 태도. 신을 향한 물음을 신을 향하지 않는 자리에서 해소하는 이 전환은, 과잉이 극한까지 밀어붙여진 끝에 오히려 소박한 것 (어쩌면 브레송의 영역에 가까운 자리) 으로 되돌아온 결과다.

브레송의 마지막 영화와 베리만이 스스로 선언한 은퇴작은 일 년의 시차를 두고 나란히 각자의 경력을 닫는다. 소거를 끝까지 밀어붙인 브레송은 <돈>에서 은총이 거두어진 세계의 밑바닥을 그렸고, 과잉을 평생 밀어붙인 베리만은 <화니와 알렉산더>에서 가족과 온기라는 축소된 세계로 내려앉았다. 형식만 보면 두 사람은 끝까지 정반대 자리에 서 있다. 한쪽은 화면을 비우다 못해 은총의 부재까지 비추었고, 다른 쪽은 화면을 채우다 지쳐 소박한 식탁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종착점 위에 두 사람의 신앙을 겹쳐 놓으면, 어긋나 있던 것은 형식뿐이었음이 드러난다. 믿는 자 브레송은 은총이 사라진 지옥을 그림으로써 오히려 은총을 요청했다. 신의 부재를 극단으로 밀어붙인 그 자리에서도, 그의 카메라는 끝내 신을 가리키고 있었다. 믿지 않는 자 베리만은 신이 침묵하는 세계를 받아들인 뒤, 그 침묵을 인간이 서로를 사랑하는 일로 견뎌냈다. 신을 지운 그 자리에서, 그의 카메라는 끝내 인간을 향했다. 두 사람은 서두에서 통념이 예상하는 것과 정반대의 형식을 택했지만, 그 형식이 데려간 끝에서 각자는 결국 자신이 믿어온 자리에 서 있었다. 형식은 통념을 배반했으나, 신앙은 끝내 자기 자신을 배반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신의 침묵'은 두 사람에게 끝내 같은 것이 아니었다. 브레송의 침묵은 은총이 도착하기 직전의 정적이다. 소매치기의 감방에서, 발타자르의 마지막 숨에서, 심지어 <돈>의 차가운 지옥에서도, 침묵은 무언가가 임해야 함을 가리키는 빈자리였다. 베리만의 침묵은 끝내 오지 않는 응답이다. 겨울 빛의 텅 빈 예배당에서, 서로에게 닿지 못하는 얼굴들 위에서, 침묵은 그 자체로 최종적인 답이었다. 한쪽에게 침묵은 은총의 문턱이고, 다른 쪽에게 침묵은 신의 부재를 확정하는 자리다. 신은 두 사람 모두에게 응답하지 않았지만, 그 응답 없음이 뜻하는 바는 각자의 신앙만큼이나 서로 달랐다. 그 서로 다른 침묵 앞에서 완성된 두 개의 문법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서로를 마주 본 채 여전히 건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