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읽으면, 무엇이 달라 보일까요?

연재한 글을 지면으로 옮겼습니다.

21ST CINEMA

거짓말쟁이의 정직, 키아로스타미와 진실/허구의 경계

<체리향기>
<체리향기>

먼저 인정하고 시작하자.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거짓말쟁이였다. 그는 평생에 걸쳐 우리를 속였다. 처음에는 감쪽같이, 우리가 속는 줄도 모르게. 나중에는 속이는 바로 그 순간에 자신이 속이고 있다는 사실까지 카메라 앞에 펼쳐 보이면서. 그렇지만 영화의 역사를 통틀어, 나는 그보다 정직한 감독을 알지 못한다. 이것은 말장난이 아니다.

영화가 거짓이라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카메라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담지 않는다. 자르고, 잇고, 빚는다. 프레임 바깥을 도려내고 시간을 접으며,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감출지 매 순간 선택한다. 영화란 그 선택들의 더미, 곧 정교하게 조립된 거짓이다. 대부분의 감독은 이 거짓을 들키지 않으려 애쓴다. 관객이 스크린 너머를 '현실'로 착각하도록 카메라의 존재를 지운다. 키아로스타미는 거꾸로 갔다. 그는 영화가 거짓이라는 사실을 숨기기는커녕 끊임없이 들춰 보였고, 그 거짓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경배했다. 오직 그 거짓을 통과해야만 닿을 수 있는 진실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의 삶 또한 비슷했다. 1979년 혁명이 이란을 삼키고 수많은 동료 예술가가 망명을 택할 때, 그는 떠나지 않았다. 이미지를 검열하는 신정 체제의 한복판에 남아, 그 제약을 피해 가는 대신 통과하며 영화를 만들었다. 제약과 인공을 통과해 진실에 이른다는 그의 영화적 신념은 그가 살아낸 선택이기도 했던 셈이다. 그러니 이 거짓말쟁이를 이해하는 가장 빠른 길은, 그의 영화가 스스로 제 거짓을 가장 노골적으로 자백하는 한 순간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체리향기>
<체리향기>

그 순간은 1997년작 <체리향기>의 마지막에 있다. 90분 동안 영화는 우리를 한 남자의 죽음 곁에 붙들어 둔다. 자살을 결심한 바디는 자신을 묻어 줄 사람을 찾아, 흙먼지 이는 테헤란 외곽의 헐벗고 메마른 언덕을 끝없이 돈다. 세 번째 승객인 노인의 말이 그의 결심에 희미한 균열을 낸 듯도 하지만, 영화는 끝내 그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보여주지 않는다. 화면이 어둠 속에 잠긴 뒤, 거칠고 무성의한 질감의 비디오 영상이 불쑥 끼어들 뿐이다. 방금까지 죽음만이 가득하던 그 갈색 언덕이 푸른 봄 풀밭으로 바뀌어 있고, 군인 엑스트라들이 그 위를 한가로이 거닐며, 키아로스타미와 스태프가 카메라를 매만진다. 우리가 픽션인 줄 알면서도 기꺼이 빨려 들어가 있던 그 세계가 한순간에 무너진다. 키아로스타미는 이 단 한 번의 붕괴를 위해 90분을 썼다. 이것은 영화일 뿐이며, 이 이야기의 해답은 당신 각자의 삶에서 찾으라는 듯이.

이 컷을 두고 혹자는 말한다. 거장이 관객의 몰입을 비웃으며 "꿈에서 깨어나라"고 외친 냉소의 제스처라고. 과연 그럴까. 키아로스타미가 자기 영화의 인공성을 거듭 들춰 보이는 그 순간들이 관객을 비웃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도대체 무엇을 향하는가. 그 물음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체리향기>의 이 마지막 컷이 어떻게 가능해졌는지, 그가 평생에 걸쳐 한 칸씩 쌓아 올린 사유의 궤적을 처음부터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87년작인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에서부터 시작해보고 싶다. 친구의 공책을 잘못 가져 온 아마드가 그것을 돌려주려 초행의 마을 길을 헤매는 더없이 순수하고 책임감 있는 이야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영화를 의심 없이 본다는 사실이다. 아마드의 여정을 곧이곧대로 따라가고, 두 아이의 안위를 진심으로 걱정한다. 이것은 순진한 허구다. 아직 카메라가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우리가 스크린 너머의 세계를 그대로 믿는 영화. 그리고 바로 이 믿음을, 키아로스타미는 곧 자기 손으로 허문다. 그는 이 영화의 세트로 되돌아온다.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5년 뒤에 등장한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는 그 회귀의 첫걸음이다. 1990년의 이란 대지진 이후, 키아로스타미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의 아역들이 살아 있는지 확인하러 그 지역을 찾았다는 실화가 있었고,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는 그 실화를 각본 삼아 감독 역할의 배우와 그 아들 역할의 배우를 '세워' 촬영한 픽션이다. 그러나 차창 밖으로 흐르는 폐허의 풍경은 세트장이 아닐 것이며, 카메라를 의식하는 행인들은 연기자로 섭외된 엑스트라라기엔 너무 우연하다. 픽션과 논픽션이 절묘하게 뒤섞인다. 한 노인이 카메라를 향해 물그릇을 청하자 난데없는 스태프가 종종걸음으로 등장하고, 노인은 말한다. 테라스가 있던 그 집은 영화 속 내 집이었고, 지금 이 집도 진짜 내 집이 아니라고. 그러면서 덧붙인다. "영화도 거짓을 넘어 현실이 되기도 하죠." 이 대사가 키아로스타미가 부여한 것인지, 노인이 그 순간 실제로 뱉은 것인지, 우리는 끝내 알 수 없다. 알 수 없음, 그것이 이 영화의 방법이다.

<올리브 나무 사이로>
<올리브 나무 사이로>

이 지그재그 3부작의 최종장인 <올리브 나무 사이로>에서 그 방법은 하나의 구조가 된다. 이 영화에는 두 개의 이야기가 투트랙으로 돈다.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의 메이킹필름을 찍는 모함마드 감독의 이야기(A)와, 그 촬영에 뛰어든 청년 호세인이 상대역 테헤레를 향해 품은 순정의 이야기(B). 그러나 A는 리얼, 즉 정말로 키아로스타미의 전작의 메이킹필름을 찍은 것이 아니다. 배우와 감독이 나누는 명백히 '설정'된 클로즈업, 우연이라기엔 지나치게 계획된 숏-리버스 숏이 그 증거다. 물론 B 역시 픽션이다. 호세인이 촬영장에 합류하기 이전을 보여주는 플래시백들은, 그 시점에 카메라가 있었을 리 없으므로 사후에 재구성해 찍은 연출일 수밖에 없다. B의 순정 또한 키아로스타미가 빚은 이야기인 것이다. 결국 우리가 쥔 단 하나의 희미한 사실은 키아로스타미가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를 찍었다는 것뿐이며, 그 영화조차 실제를 재구성한 '언리얼'임을 우리는 안다. 얽힌 거짓들로 가득한 이 구조 속에서 영화는 단순한 주제 하나를 던진다. 창작은, 영화는, 현실을 반영하려 하지만 근본적으로 진실이 아니다. 부정적 의미의 가짜는 아니되, 영화는 '가짜'다.

그런데 바로 그 가짜의 한복판에서 진짜가 솟는다. 영화의 끝, 테헤레를 따라가며 마음을 고백하는 호세인을 카메라는 컷도 레이어도 없이 익스트림 롱숏으로 하염없이 지켜본다. 이 시선은 셋이다. 전작과 같은 방식의 엔딩으로 자신의 인장을 새기는 감독의 시선, 두 배우를 바라보는 극 중 모함마드의 시선, 그리고 러닝타임 내내 두 사람을 지켜본 관객의 시선. 영화는 창작이라는 형태로 인해 근본적으로 허구일 수밖에 없으나, 감독과 인물과 관객의 시선이 한 청년을 응원하며 일순간 하나로 모인다면, 그것은 한계를 가진 이 매체가 빚을 수 있는 어쩌면 유일한 '진실'의 순간이 된다.

흥미롭게도 이 붕괴의 정점은 가장 나중이 아니라 한복판에 있다. 코케르 3부작이 한창이던 1990년, 키아로스타미는 이미 <클로즈 업>에서 그 경계를 완전히 허물어 버렸다. <클로즈 업>의 시작은 매우, 매우 논픽션처럼 보인다. 택시 기사를 좇던 카메라는, 기자가 사기꾼을 체포하러 아한카의 집으로 들어가는 그 극적인 순간을 따라 들어가는 대신, 집 밖에서 낙엽을 차며 시간을 보내는 택시 기사를 응시한다. 서사적 정보값이 0에 가까운, 할리우드라면 가장 먼저 잘려나갈 장면. 그런데 바로 그 무목적성이 선언이다. 가장 극적인 사건의 순간에 카메라를 정점에서 떼어내고, 사건의 바깥 그 죽은 시간에 머무르겠다는 선언이다.

<클로즈 업>
<클로즈 업>

그 선언이 무색하게, 끝내 보여주지 않았던 체포의 순간이 중반부에 버젓이 등장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차남 메흐다드의 법정 증언에 끼어드는 플래시백, 즉 한 사람의 주관을 통과한 불완전한 형태다. 한 번은 카메라가 사건의 바깥에 머무름으로써, 한 번은 사건이 누군가의 기억을 통과함으로써, 어느 쪽도 우리에게 사건을 직접 건네주지 않는다. 이 이야기의 가장 극적인 사건을, 우리는 단 한 차례도 온전한 형태로 보지 못한다.

재판 장면조차 그렇다. 나머지가 35mm로 촬영된 데 비해 재판은 16mm로 찍혀 마치 실제 재판이 삽입된 듯하지만, 사브지안의 대사는 실제 발언을 토대로 재구성한 각본을 따른 것이다. 가장 다큐멘터리처럼 보이는 그 구간조차 빚어진 것이다. 다만 한 가지를 놓쳐선 안 된다. 그 대사가 '그의 실제 발언을 토대로' 했다는 것. 키아로스타미가 말을 추려 배열했을지언정, 그 말들은 본래 사브지안의 입에서 나왔다. 작가는 키아로스타미일지 모르나, 목소리는 사브지안의 것이다. 가장 연출된 것처럼 보이는 그 진술이 동시에 가장 진실한 사브지안의 것일 수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사브지안이 거장 마흐말바프를 처음 사칭하던 순간이 플래시백으로 등장할 때, 그는 자신이 실제로 저질렀던 사칭을 영화 속에서 다시 연기한다. 진짜 사칭범이 카메라 앞에서 '마흐말바프를 사칭하는 사브지안'을 연기하는 것이다. 사칭의 사칭, 연기의 연기. 예술가가 되고 싶었으나 곤궁으로 꿈을 접어야 했던 그는, 마흐말바프라는 역할을 입는 순간 존경을 받았고, 영화에 대한 사랑을 늘어놓아도 사람들이 귀를 기울였으며, 아들에게 무언가를 사 줄 돈도 얻었다. 사칭으로 얻은 그 자리에서 비로소 그의 예술 사랑은 발화될 자리를 얻었다. 그리고 키아로스타미는 <클로즈 업>을 통해 그 꿈을 또 한 번, 이번엔 배우가 되는 길로 이루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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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실제 마흐말바프가 등장한다. 출소한 사브지안이 우상과 마주쳐 오열하는 그 장면을, 카메라는 멀리서 잡는다. 무엇보다 실제의 순간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영화의 맨 마지막, 우리는 그 사브지안을 아한카의 집 '내부에서' 바라본 숏으로 영화가 끝나는 것을 본다. 멀리 길 위에서 몰래 잡은 그 영상과, 가족의 집 안에서 잡은 이 숏은 물리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 그러니 이 마지막 숏은 별도로 세팅된, 연출된 숏이다. 무엇보다 실제처럼 느껴졌던 그 재회조차, 결국 누군가 카메라를 놓아둔 자리에서 구성된 것이다. 영화는 가장 진실하게 느껴지는 그 순간에 슬그머니 자신의 연출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것은 영화가 처음 했던 선언 — 가장 극적인 순간에 카메라를 사건 바깥에 두겠다던 그 태도 —으로 되돌아온다. 오프닝에서 카메라는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사건의 바깥에 남았다. 끝에서는 정반대로, 카메라가 마침내 집 안으로 들어선다. 시작에서 들어가지 않았던 그 문을, 끝에서 들어가는 것이다. 사브지안이 거짓을 연기함으로써 자신의 진실에 닿으려 했듯, 키아로스타미는 모든 것을 세팅하고 연출함으로써 사브지안의 진짜 눈물에 닿는다. 그 눈물은 실제다. 그러나 그 눈물은, 오직 키아로스타미가 빚어낸 세팅 안에서만 우리에게 도착한다.

그렇다면 키아로스타미가 끝내 말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네가 진실이라 믿은 것은 다 연출이었으니 속은 것이다"라는 폭로인가. 정반대다. 냉소주의자라면 말할 것이다. "그 눈물은 세팅이다, 그러니 그 감동은 가짜였다." 여기서 멈추면 남는 것은 허무뿐이다. 그러나 키아로스타미가 말하는 것은 정반대다. 그 눈물은 연출된 자리에서 흘렀다. 그런데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진짜다. 그는 진짜를 취소하지 않는다. 진짜와 연출이 양립한다는 것을, 나아가 연출을 통해서만 그 진짜에 닿을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그가 부수려는 것은 관객의 감동이 아니라, 진짜와 가짜를 갈라놓는 그 칼 자체다. "진짜냐 가짜냐"의 법정 논리에서 사브지안은 그저 사기꾼이다. 가짜 마흐말바프, 거짓말쟁이, 유죄. 그러나 그 거짓말 속에 있던 영화를 향한 사랑은, 인정받고 싶다는 그 갈망은 가짜였는가. 그것은 그 무엇보다 진짜였다. 가장 거짓된 행위 속에 가장 진실한 것이 깃들어 있었다. 진짜와 가짜로 사람을 가르는 그 칼은 사브지안 같은 인간을 영원히 베어낼 수밖에 없고, 키아로스타미는 그 칼을 부러뜨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가 자기 영화의 연출을 굳이 드러내는 순간들은 "꿈 깨라"는 폭로가 아니라 하나의 고백이다. 나 역시 거짓을 빚어 진실에 닿는 자라는 것. 그는 사브지안을 단죄하는 자리가 아니라, 그와 같은 자리에 선다.

<체리향기>
<체리향기>

이제 우리는 시작의 그 컷으로 돌아갈 수 있다. <체리향기>의 거친 메이킹필름은, <클로즈 업>의 그 양립 불가능한 마지막 숏과 정확히 같은 제스처다. 영화가 제 인공성을 끝내 감추지 않는 것은 그것을 비웃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그 인공성이야말로 진실을 낳는다는 것을 경배하기 위해서다. 바디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키아로스타미는 답하지 않는다. 대신 그 답을 관객의 세계로, 각자의 삶으로 넘긴다. 삶과 죽음 앞에서 감독이기 이전에 한 인간일 뿐인 자가 취하는 겸손이다. 그리고 그 겸손이야말로 그가 영화라는 매체로 끝내 말하려 한 것이다. 영화는 거짓말이다. 카메라는 자르고 잇고 빚으며, 단 한 순간도 순수한 현실인 적이 없다. 그러나 바로 그 거짓의 기계를 통해 우리는 사브지안의 진짜 눈물에, 그가 평생 누구에게도 받지 못한 경청에, 끝내 이루어진 화해에 닿았다. 영화라는 거짓이 없었다면 이 진실들은 존재하지조차 않았을 것이다. 영화는 진실의 적이 아니라, 진실에 이르는 유일한 통로다. 그는 꿈에서 깨어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꿈과 현실이 처음부터 하나였다고 말하는 것이다.

평생 트레이드마크처럼 쓴 검은 선글라스 너머에서, 그는 평생 단 하나를 응시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보여줌과 감춤은 처음부터 대립이 아니었다는 것. 그는 가장 많은 것(사건을, 카메라를, 결말을)을 감춤으로써 가장 깊은 것을 보여준 감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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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 The Movie Databa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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