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읽으면, 무엇이 달라 보일까요?

연재한 글을 지면으로 옮겼습니다.

21ST CINEMA

스탠리 큐브릭, 완벽이라는 이름의 폭력

<시계태엽 오렌지>
<시계태엽 오렌지>

영화는 무엇으로 이루어진 예술인가. 흔히들 이미지와 소리라 말하고, 이는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그 둘의 무게가 같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의 시작을 떠올려 보라.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가 스크린을 향해 달려들던 순간, 관객들이 혼비백산하여 자리를 피했다는 그 유명한 일화에 소리의 역할은 없었다. 멜리에스가 달의 얼굴에 포탄을 박아 넣을 때에도, 무르나우의 흡혈귀가 계단 벽에 그림자를 드리울 때에도, 영화를 영화이게 만든 것은 언제나 이미지였다. 유성영화가 도래하기 전 무성영화의 시대가 수십 년간 영화의 전부였다는 사실은, 이미지가 소리 위의 권력을 갖는 이 예술의 근원적인 질서를 증언한다. 소리가 없는 영화는 여전히 영화이지만, 이미지가 없는 영화는 영화가 아니라 라디오다. 영화는 본질적으로 '보는' 예술이며, 영화의 모든 역사는 '무엇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를 둘러싼 분투의 기록이었다.

그렇다면 묻고 싶다. 영화 역사상 가장 뛰어난 이미지를 축조한 감독은 누구인가. 현역으로 좁히자면 감각적이고 강박적인 작법의 웨스 앤더슨, 물감이 물에 번지듯 몽환적인 화면을 빚는 왕가위, CF 감독 출신답게 쿨하고 날카로운 영상을 보여주는 데이빗 핀처, 국내로는 독보적인 스타일리스트 이명세와 강렬한 표현주의의 박찬욱이 떠오른다. 그러나 시대의 경계를 허물고 영화의 역사를 통틀어 단 한 명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이 이름을 부른다. 오늘 글의 주인공, 영화 역사상 가장 이질적이고 환상적인 비주얼리스트, 스탠리 큐브릭이다.

<쉰들러 리스트>
<쉰들러 리스트>

스탠리 큐브릭이 어떤 감독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큐브릭은 자신의 절친이기도 한 스필버그의 <쉰들러 리스트>를 두고 그것은 홀로코스트 영화가 아니라고 말했다. 스필버그에게 재능이 없다는 뜻은 아니지만, 그 영화는 600만이 학살된 이야기가 아니라 600명이 살아남은 이야기, 요컨대 한 편의 성공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비극의 한복판에서 끝내 구원의 서사를 길어 올리는 그 손길을, 큐브릭은 감상적인 키치라 불렀다. 동의하든 않든, 이 한마디는 그가 어떤 인간인지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는 간편한 위로를 경멸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 경멸은, 뒤에서 보겠지만, 그의 모든 영화를 떠받치는 단 하나의 세계관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이미 영화사의 만신전에 그 좌석이 공고한 거장이기에, 아무것도 아닌 내가 이 자리에서 그를 평가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임을 안다. 다만 나는 큐브릭의 이미지가 어떻게 위대한가를, 그리고 그 위대함을 둘러싼 오래된 논쟁의 윤곽을 더듬어 보려 한다. 미리 말해두자면, 그 논쟁은 '큐브릭이 잘 찍는가'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논쟁은 한 칸 안쪽에 있다. 그 완벽한 이미지는 대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그러나 그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먼저 그 이미지가 얼마나 위대한가를 마주해야 한다.

CG라는 과학기술이 발달하면 영화의 이미지는 필연적으로 진보하리라 믿었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고전 아날로그 특수효과 '따위'는, 컴퓨터그래픽이 창조하는 비현실적이고 압도적인 화면에는 상대가 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이 편견이 단숨에 무너진 것이 큐브릭의 영화 앞에서였다. 기술의 발전이 표현의 범위를 넓힌 것은 사실이나, 그 '기술의 발전'을 인간의 '상상력의 발전'과 동의어로 삼을 수는 없다. CG라는 것이 존재하지도 않던 시절, 감독들은 자신이 머릿속에 그린 바를 구현하기 위해 독창적인 양식과 기법을 발명했고, 예술적 성취는 바로 그 발명의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큐브릭은 그 발명가들 중의 왕이었다.

<배리 린든>
<배리 린든>

<배리 린든>을 떠올려 보자. 로코코 시대의 질감을 재현하기 위해 그는 인공조명을 일절 거부하고 자연광과 촛불만으로 화면의 명암과 깊이를 빚어냈다. 세 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의 어느 지점에서 정지 버튼을 눌러도, 그 한 장면 한 장면이 완벽한 구도와 미감을 갖춘 한 폭의 회화로 남는다. <시계태엽 오렌지>의 화면은 또 어떤가. 성적 알레고리로 가득 찬 팝아트적 조형물들이 디스토피아적 근미래를 떠받치고, 그 감각적인 표면 아래로 폭력의 무늬가 일렁인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영화 한 편이 그 자체로 하나의 문화유산이 된 경우다. 오늘날 만들어지는 모든 우주영화가 이 작품의 그늘 아래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비티>가 우주의 적막을 다루는 방식도, <인터스텔라>의 우주선 디자인과 후반부의 초현실적 체험도, 그 원형은 반세기 전 큐브릭이 이미 완성해두었다.

그러나 큐브릭의 '이미지'를 이야기할 때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작품은 <샤이닝>이다. 공포라는 장르가 공간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이 영화는 정석이자 정점으로 보여준다. 좁은 공간의 공포와 넓은 공간의 공포가 있다면, 후자에서 관건은 한 사람의 인간과 그를 압도하는 공간감의 대비다. 큐브릭은 이 세상과 동떨어진 듯한 거대한 호텔을 무대로 세운 뒤, 그 내부마저 공허하고 기이한 미궁으로 만든다. 호텔의 형태를 끝내 파악하지 못하게 이어 붙인 숏들, 이곳이 정상적인 공간이 아님을 암시하는 바닥의 무늬와 붉은 화장실, 누군가의 시선처럼 인물을 뒤쫓는 스테디캠. 특히 그 스테디캠은 단순한 기교가 아니다. 상하좌우의 여백이 지워진 채 인물에게 들러붙는 그 시점은, 오버룩 호텔이라는 고립된 감옥 위에 '프레임'이라는 또 하나의 감옥을 포개는 장치다. 시선의 암시이자 감옥의 중첩. 내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깨달을 때, 나의 시야가 영화의 세계 앞에서 한없이 초라해질 때, 궁극적으로 '미지'라는 공간 앞에서 두려움이 발생할 때, 공포는 태어난다. <샤이닝>의 이미지는 그렇게 지어졌다.

<샤이닝>
<샤이닝>

그러나 <샤이닝>에서 우리가 경험한 이 옥죄는 듯한 감각은 단지 이 한 편의 호러에 국한되지 않는다. 큐브릭의 영화에는 관객을 좀처럼 놓아주지 않는 어떤 공통의 공기가 흐른다. 진정한 거장이라면 누구나 자기만의 물성을 지니는 법이다. 히치콕의 화면을 지배하는 불안, 오즈의 기계적 구도에서 솟는 엄정함, 타르코프스키의 빛에 깃든 성스러움과 생명력이 그렇다. 그렇다면 큐브릭의 물성은 무엇인가. 다른 누구에게서도 찾기 어려운 최면적 리듬, 바로 그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영화는 느리다. 그러나 큐브릭이 느리다고 푸념하는 것은 정당한 비판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것은 약점이 아니라 그의 취향이고 서명이기 때문이다.

이 최면성은 큐브릭 작품의 몇몇 오프닝에서 특히 선명하게 드러난다. <시계태엽 오렌지>의 첫 장면을 떠올려보자. 신경을 즉각 거스르는 붉은 원색의 이미지만을 잠시 보여주더니, 눈빛만 봐도 심상치 않은 주인공 알렉스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카메라로 영화는 시작된다. 그 뒤 아주 천천히 줌아웃하며 드러나는 주인공 일당의 공간은, 유아적이면서도 향락적인 모티프로 채워진 공간이다. 음악은 마치 회문을 마주할 때처럼, 나아가지 못하고 빙빙 도는 듯한 심상으로 흐른다. 이어 주인공의 내레이션이 들려오고, 음침하면서도 확신에 찬 말투로 자신이 믿는 가치를 설파한다. <시계태엽 오렌지>의 오프닝은 무엇보다도 앞으로 관객이 겪게 될 그 불쾌한 정서를 시작부터 관객의 망막에 각인시킨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오프닝은 큐브릭이 지향하는 '속도'가 무엇인지 체감하게 해 주는 가장 대표적인 순간이다. MGM 로고가 등장하기 전까지 약 3분 가량 흐르는 서곡은 암전된 화면에 더해 진행된다. 그 이후 영화는 놀랍게도 인류의 기원이라는 원시 시대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나간다. 현대에 도달하려면 한참이 필요할 듯한 그 시작점에서도 큐브릭은 급하게 뛴다는 인상을 주지 않는다. 그저 그 시점에서 보여 주어야 할 순간들을 차근차근 제시한 후, '뛰어가지' 않고 '질러서', 혹은 '점프해서' 간다. 현대로 빠른 시간 안에 당도하지만, 급하게 뛰어서 도착하지 않고 도발적이고도 효율적인 방식을 통해 넘어오는. 이것은 큐브릭의 기술적 재능이기도 하거니와, 스스로의 작품 세계의 정수와도 같은 '느린 속도'를 배반하지 않는 일관성의 측면에서도 인상적이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이번엔 <샤이닝>을 보자. <샤이닝>은 버즈아이 뷰로 호텔의 공간적 고립을 묘사하는 동시에, 주인공의 차를 집요하게 뒤쫓는 초현실적 시점으로 영화의 주제를 미리 누설한다. 그런데 여기서 멈춰 생각해 볼 것이 있다. 많은 영화에서 오프닝의 목적은 관객을 영화 속 공간으로 '초대'하는 데 있다. 큐브릭의 오프닝은 다르다. 그의 오프닝은 관객을 초대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이 그 공간에서 도망치지 못하도록 붙잡는 데 목적을 둔다. 큐브릭은 영화의 공간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관객은 이미 그 기이한 공간 안에 들어와 버린 한 명의 인간으로 간주된다. 나와 무관해 보이는 그 이질적인 "그들만의 공간"에 이미 발을 들였음을 뒤늦게 알아챈 관객이 시선을 한 뼘 떼어 객관적으로 바라보려 하지만, 큐브릭은 그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는다. 그가 거는 최면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샤이닝>이 화면의 명암으로 '하루'가 지났다고 무의식적으로 이해하려는 관객을 비웃듯, 단독 자막을 북마크처럼 끼워 넣으며 '이틀'씩 건너뛰어 그 무의식적 이해마저 교란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큐브릭은 결코 급하지 않다. 영화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끌어모아, 그는 관객을 돌이킬 수 없게 옥죈다.

이미지를 다스리는 그의 손길은 화면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의 음악적 감각 또한 짚지 않을 수 없다. 큐브릭은 음악을 화면에 '어울리게' 까는 감독이 아니라, 화면과 '어긋나게' 부딪치게 만드는 감독이었다. <시계태엽 오렌지>에서 알렉스가 폭력을 휘두르는 순간 흘러나오는 'Singin' in the Rain'의 명랑함,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의 핵폭발 위로 울려 퍼지는 'We'll Meet Again'의 감미로움. 폭력과 멸망이라는 내용과 그 위에 덧입혀진 음악의 다정함 사이에서 견딜 수 없는 부조화의 아이러니가 솟구친다. 클래식을 끌어들이는 솜씨도 마찬가지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그 유명한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우주라는 무한을 인간이 만든 가장 질서정연한 선율로 감싸 안으며 묘한 숭고를 빚어낸다.

이 최면적이고도 느린, 그렇지만 완벽하게 만들어지는 결과물이 더욱 놀라운 까닭은, 그것이 어느 한 장르에 갇히지 않는다는 데 있다. 장르에 있어 다재다능한 감독을 떠올리라면 대개 스티븐 스필버그를 꼽을 것이다. 옳다. 그러나 그에 앞서 큐브릭이 있었다. 큐브릭은 장르의 정복자다. 초기작 <공포와 욕망>, <킬러스 키스>, <킬링>과 유작 <아이즈 와이드 셧>은 스릴러의 외피를 둘렀고, <영광의 길>과 <풀 메탈 자켓>은 각각 1차 세계대전과 베트남전을 무대로 한 전쟁영화다. <스파르타쿠스>와 <배리 린든>은 고대 로마와 로코코 시대를 다룬 사극이며, <롤리타>와 <시계태엽 오렌지>는 파격적 소재를 다룬 범죄영화의 문법을 빌렸다. <닥터 스트레인지러브>로는 냉전을 냉소하는 신랄한 블랙코미디를 선보였고,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와 <샤이닝>은 각각 SF와 호러 장르사 최고의 걸작으로 추앙받는다.

스릴러의 히치콕, 서부극의 존 포드, 가족의 오즈, 코미디의 채플린처럼 특정 장르의 스페셜리스트로 불리는 거장들이 있다. 그렇다면 모든 장르를 넘나든 큐브릭은 제너럴리스트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손댄 모든 장르에서 큐브릭은 스페셜리스트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은 성취를 남겼다. 큐브릭은 장르의 스페셜리스트가 아니다. 영화의 스페셜리스트다.

<스파르타쿠스>
<스파르타쿠스>

음악 한 곡 한 곡의 사용까지 매만진 큐브릭의 이 집착에는 마땅한 이름이 있다. 바로 완벽주의다. 문화예술계에서 이 단어만큼 남용되는 말도 드물지만, 큐브릭에게만은 이 수식이 조금도 거추장스럽지 않다. "영화계 최후의 군주"라는 별칭이 특히 유명한데, 영국으로 건너간 이후 <롤리타>부터 그는 연출의 모든 것을 손수 총지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화는 차고 넘친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는 고증을 위해 나사에 자문을 구했고, <샤이닝>에서는 텅 빈 공간감을 얻기 위해 호텔을 통째로 지었으며, 극 중 잭이 타이핑한 수백 페이지의 원고를 오타 하나까지 일일이 작성하게 했다. <배리 린든>의 촛불 조명은 이미 말한 그대로다. 연출의 전권조차 쥐지 못했던 <스파르타쿠스> 시절에도 그는 수천 명의 엑스트라에게 일일이 번호를 매겨 제각기 다른 동작을 주문했다 한다. 그 완벽주의 탓에 후기로 갈수록 신작 사이의 간격은 점점 길어졌지만, 매번 내놓는 작품이 한결같이 걸작이었으니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런데 바로 이 완벽주의가, 큐브릭을 둘러싼 가장 오래된 의심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모든 프레임을 손아귀에 넣고 단 하나의 우연도 허락하지 않는 이 통제광의 태도를, 어떤 이들은 거장의 증거가 아니라 광대의 허세로 읽는다. 극단적인 명암의 대비와 미동조차 없는 롱테이크, 빈민들의 날것 같은 실제 삶을 끌어들여 허구와 다큐멘터리의 경계를 허물어버리는 '시각적 금욕주의자'라고 불리는 감독 페드로 코스타가 남긴 평이 그 대표적인 목소리다. 그는 큐브릭에게 거장이라는 표현을 쓰는 데 결코 동의할 수 없다고 잘라 말한다. 카메라 뒤에서 요술을 부린다고 거장이 되는 것은 아니며, 그저 새로운 광대 하나가 나타났을 뿐이라는 것이다. 코스타가 보기에 자크 타티나 존 포드 같은 진짜 거장들은 자신만의 단일한 시점에서 세상을 보여주는 데 반해, 큐브릭은 마치 자신이 수백 개의 시선을 가진 양 꾸민다고 말했다. 그들은 단지 이렇게 찍는 편이 더 멋지다는 이유만으로 숏을 바꾸지는 않는데, 큐브릭의 방식은 분명 관객을 속이는 짓이라는 것이다. 숏에서 속이기 시작하면 그것은 더 이상 영화가 아니라고, 코스타는 단언한다.

가혹하지만, 나 역시 큐브릭의 영화 앞에서 그가 전능한 신의 자리에 올라앉아 모든 것을 내려다보며 판결한다는 인상을 받은 적이 있다. 때로 그 전능한 척하는 태도는 오만으로 비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부담스러운 지점은, 그의 영화가 '모든 순간' 완벽한 완성도를 고집한다는 데 있다. 그의 감각이 너무도 탁월한 탓에 느끼는 역설적 피로일지 모르나, 그냥 힘을 빼고 흘러가도 좋을 순간에서조차 강박적이라 할 만큼 빈틈없는 구도를 들이밀기에, 영화 전체가 어딘가 삭막해 보이는 것이다. 물론 프레임 속 모든 찰나를 완벽한 구도로 빚어낸다는 것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기에, 이 대목에서 나의 감정은 늘 양가적이다.

<시계태엽 오렌지>
<시계태엽 오렌지>

비판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큐브릭의 태도가 파시스트적이라 지적하는 전문가도 적지 않다. 두 가지 의미에서다. 하나는 형식이다. 인간을 기하학적 구도 안에 무력한 점으로 가두고, 모든 것을 위에서 굽어보며 압도하는 그 완벽한 질서의 미학이, 개인을 전체 앞에 소멸시키는 파시즘의 미감과 닮았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내용이다. <시계태엽 오렌지>가 그 단골 표적이다. '폭력에 대한 폭력'이라는 소재로 폭력의 맹점을 이야기한다면서, 정작 그 연출은 역설적으로 폭력을 매혹적인 것으로 그려내고 있지 않으냐는 논조다. 관객으로 하여금 폭력을 비판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폭력에 도취되게 만든다면, 그 영화는 자신이 내건 주제를 스스로 배반하는 셈이 아닌가.

이 모든 비판에 대한 나의 대답은, 큐브릭이 평생 단 하나의 이야기만을 반복한 감독이라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작가주의가 말하는 '작가(auteur)'의 정의를 떠올려 보자. 작가란 소재와 장르를 갈아치우면서도 끝내 같은 강박으로 회귀하는 사람이다. 매번 다른 영화를 찍는 듯 보여도 결국 하나의 세계관, 하나의 질문으로 되돌아오는 사람. 그러므로 작가의 표지는 '다양함'이 아니라 오히려 '집요한 동일함'이다. 그리고 이 기준 앞에서 큐브릭은 너무도 명백한 작가다.

그의 영화를 관통하는 단 하나의 명제를 만들라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인간이 이성과 문명과 기술로 쌓아 올린 모든 질서는 끝내 자기 안의 본능과 폭력을 통제하지 못하고 무너진다.' <시계태엽 오렌지>의 알렉스는 과학기술에 의해 악한 본성을 교화당하지만 결말에 이르러 기어이 그 본성을 회복한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는 인류가 창조한 인공지능이 인류에게 반기를 든다.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에서는 성관계 중 느낀 자신의 무력함을 공산당의 음모로 착각한 미치광이 장군 하나가 끝내 세계를 멸망으로 몰아넣는다. 스탠리 큐브릭은 항상 인류의 패배를 그린다. 그의 초기작 <영광의 길>에서 이미 그 염세의 시선은 형형했다. 부조리한 군이라는 조직, 죽음을 앞둔 병사 앞에서 입에 바른 헛소리만 늘어놓는 종교인, 관망과 위선으로 일관하는 간부들. 큐브릭은 그 모든 것을 조롱의 시선으로 응시했다.

자, 그렇다면 비판자들이 본 그 '차가움'은 무엇인가. 나는 그 삭막함이야말로 큐브릭의 세계관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빈틈없이 완벽하고 차가운 표면은 결함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그의 깊은 불신이 형식으로 굳어 결정(結晶)된 것이다. 인간의 질서가 필연적으로 붕괴하는 광경을 그리려면, 그 광경을 위에서 차갑게 내려다보며 판결하는 시점이 필요하다. 코스타가 '기만'이라 부른 그 전능한 시선, 수백 개의 시선을 가진 척하는 그 강박적 구도야말로, 인간의 패배를 부감(俯瞰)하는 자의 필연적인 자리이자 형식인 것이다. 형식과 주제가 여기서 완전히 포개진다. 비주얼리스트 큐브릭과 작가 큐브릭은 두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이었다.

같은 논리는 그를 향한 가장 무거운 혐의, 곧 파시즘이라는 지적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의 화면이 인간을 기하학적 질서 안에 무력하게 가두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파시즘의 미학을 무심코 답습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미학을 차갑게 해부하기 위한 선택이다. 인간이 세운 완벽한 질서가 결국 그 안의 인간을 짓밟고 만다는 것이야말로 큐브릭이 평생 되풀이한 명제가 아니던가. 그는 질서의 폭력성을 미화한 것이 아니라 전시한 것이다. 압도하는 구도로 개인을 소멸시키는 그 연출은, 개인을 소멸시키는 모든 체제의 초상이기도 하다. 닮았다는 것과 공모한다는 것은 다르다. 그는 파시즘의 미감을 빌려 파시즘이 인간에게 무엇을 하는지를 보여준다.

<샤이닝>
<샤이닝>

<시계태엽 오렌지>의 그 '아름다운 폭력' 역시 이 맥락에서 다시 읽힌다. 어떤 소재든 여과 없이 들이미는 큐브릭의 방법론을 생각하면, 폭력을 매혹적으로 그려내는 그 연출은 폭력 그 자체에 대한 찬미가 아니라, 폭력에 도취되는 인간이라는 종(種)에 대한 잔혹한 블랙코미디로 기능한다. 조롱에 가까운 냉소를 자신의 영화 도처에 새겨 넣는 감독이 큐브릭이기에, 그의 "아름다운" 연출은 역설적으로 하나의 우화로 작동하는 것이다. 그것은 폭력을 미화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을 미화할 줄 아는 우리 자신을 거울 앞에 세우는 일이다. <샤이닝>의 거울이 REDRUM을 MURDER로 뒤집어 보여주듯, 큐브릭의 아름다운 화면은 그 이면에 감추어진 우리의 본성을 현실로 끄집어내는 거울이었다.

그러나 작가라는 칭호가 곧 만능의 찬사는 아니다. 여기서 나는 하나의 단서를 달아야겠다. 큐브릭은 분명 작가였으되, 다재다능한 이야기꾼은 아니었다. 이 둘은 결코 같은 말이 아니다. 다재다능함이란 스필버그의 미덕이다. 그는 장르마다 진실로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고, 관객의 정서를 그 장르의 결에 맞게 매번 새로이 빚는다. 큐브릭은 그런 의미의 이야기꾼이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그럴 뜻이 없었다. 그는 이야기를 바꾸기 위해 장르를 넘나든 것이 아니라, 같은 이야기를 매번 다른 실험실에서 다시 증명하기 위해 장르를 넘나들었다. 장르는 그에게 서사를 담는 그릇이 아니라 가설을 검증하는 환경이었다. 전쟁이라는 조건에서도, 우주라는 조건에서도, 밀폐된 호텔이라는 조건에서도 인간은 똑같이 무너진다. 변수만 바꾸어 동일한 실험을 반복하는 일. 그것이 바로 큐브릭이 제너럴리스트가 아니라 작가인 이유이자, 동시에 다재다능한 이야기꾼은 끝내 되지 못한 이유다.

그리고 그의 작가됨을 가장 선명하게 증명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가 작가이기를 실패한 작품이다. <스파르타쿠스>가 그렇다. 단 10분만 보아도 큐브릭의 영화 같지 않은 이 작품에는 그의 기하학적 구도도 감정의 이면을 응시하는 서늘한 시선도 보이지 않는다. 다분히 할리우드적으로 정석적인 풀 숏과 정석적인 감성의 음악으로 채워진 이 영화는, 그가 연출의 전권을 쥐지 못했음을 매 순간 실토하는 것만 같다. 큐브릭은 감독으로 참여했으되, 이것은 명백히 '큐브릭 영화'가 아니다. 통제를 빼앗긴 큐브릭은 더 이상 큐브릭이 아니었다는 이 사실은, 그의 작가됨이 곧 그의 지배욕과 한 몸이었음을 방증한다. 그가 손수 매만지지 않은 화면에서 그의 세계관은 흔적도 없이 증발한다. 작가의 인장은 오직 그가 모든 것을 장악한 자리에만 찍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인장이 찍힌 영화들은, 시간 앞에서 살아남았다.

과거에 만들어진 수많은 영화 앞에 놓인 가장 큰 장벽은, 과연 그 영화가 '시간을 견딜 수 있는가'라는 물음일 것이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히지 않은 채 기어이 그 시간을 견뎌낸 영화들을 우리는 '고전'이라, '클래식'이라 부른다. 큐브릭이 세상을 떠난 지 사반세기가 넘었지만, 시네필들은 여전히 그를 또렷이 기억한다. '역대 최고의 감독'이라는 주제가 던져질 때마다 그의 이름은 어김없이 최상위권에 자리하며, 반세기 전에 만들어진 그의 영화들은 지금도 끊임없이 인용되고 오마주된다.

그러니 정직하게 매듭짓자. 큐브릭은 완벽한 감독이었는가. 아마 아닐 것이다. 그의 차가움은 누군가에게는 끝내 결함으로 남을 것이고, 그의 전능한 시선은 누군가에게는 영영 오만으로 읽힐 것이다. 다재다능한 이야기꾼을 그에게서 기대했던 이들은 끝내 실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무엇보다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미지를 빚고 분위기를 자아내고 '비주얼'을 축조하는 일에 관한 한, 스탠리 큐브릭만큼 좋은 교본은 일찍이 없었고 앞으로도 드물 것이다.

큐브릭은 시대를 앞서갔다. 그의 영화는 앞으로도 계속 우리보다 앞서 있을 것이다. 그의 모든 영화는 여전히, 현대의 영화들이 끝내 가닿아야 할 미래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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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 The Movie Databa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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