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한 글을 지면으로 옮겼습니다.

전쟁영화는 어느새 블록버스터를 만들 때 동원되는 하나의 거대한 예시가 되었다. 수많은 특수효과와 인력이 투입되는 프로젝트이자 매번 정치적 담론을 형성하는 소스가 되는 분야이다. 이동진 평론가는 "최고의 전쟁영화는 결국 반전(反戰)영화가 될 수밖에 없다."라는 말을 남긴 바 있다. 보다 회의적으로, 누벨바그를 상징하는 감독 프랑소와 트뤼포는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상 작품이 감독의 손을 떠난 후엔 통제가 불가하기에, 설령 감독의 의도가 반전을 지향한다 할지라도 관객에게 전쟁에 대한 은밀한 환상과 흥분을 심어줄 위험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이 글은 그 위험을 하나의 질문으로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한다. 영화가 감독의 의도와 무관하게 전쟁을 미화하고 마는 것이라면, 영화는 대체 어떤 방법으로 자기 자신의 스펙터클에 저항하는가. 그리고 그 저항을 우리는 신뢰할 수 있는가.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미리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몇 편의 전쟁영화가 그 답을 향해 던진 서로 다른 시도들을, 한 편이 다른 한 편의 막다른 골목에 응답하는 방식으로 따라가 보려 한다.
먼저 고백할 것이 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영화의 처음과 끝을 감싸는 성조기가 세계의 경찰을 자처하는 미국의 위엄을 드높이는 노골적인 프로파간다처럼 보였다. 그러나 병역을 마치고 다시 보았을 때, 같은 성조기는 이 영화를 보았을 군인에 대한 더없이 분명한 예우로 보였다. 변한 것은 영화가 아니었다. 손 떠는 습관을 끝내 들킨 밀러의 그 손을, 나는 두 번째에야 일 퍼센트쯤 더 이해하게 되었을 뿐이다. 같은 영화를 두 번 보았고, 나는 두 번 다른 영화를 본 것이다.
이것을 단순한 변심으로 치부하고 싶지는 않다. 같은 영화, 같은 관객이었는데 관람의 시점이 달라지자 판정이 통째로 뒤집혔다. 이것이야말로 트뤼포가 경고했던 그 배신, 완성된 영화가 만든 사람의 뜻을 거슬러버리는 사태의 가장 순수한 형태일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감독의 손을 떠나 통제 불가가 되는 정도가 아니라, 같은 한 사람의 통제조차 벗어나 그가 무엇을 짊어지고 들어오느냐에 따라 매번 다른 영화가 되어버린다. 관객은 하나가 아니다. 한 사람조차 시점에 따라 여러 명의 관객인 것이다. 이 분열은 내 판단력의 결함이 아니라, 정확히 이 영화가 너무 잘 만들어졌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분명 미적으로 탁월한 영화이다. 노르망디 해변에 상륙하는 20여 분의 오프닝 시퀀스는 전쟁영화를 통틀어 가장 완성도 높은 시퀀스일 것이다. 핸드헬드의 화려함과 병사들의 뒤를 따르는 카메라는 전쟁영화 역사상 최고의 현장감을 만들어낸다. 동시에 이 영화는 탁월한 휴머니스트의 영화다. 손 떠는 습관을 끝내 들킨 밀러, 셸 쇼크로 굳어버린 채 전우의 죽음을 막지 못하는 업햄. 효율과 공리로만 작동하는 전장에서 이 영화는 비효율과 비공리의 일화를 들려주며, 군인들이 그저 누군가의 자식이자 한 명의 약한 인간일 뿐이라는 슬픈 진실을 담아낸다. 스필버그는 라이언 구출을 성전(聖戰)이라 자칭하지 않으며, 그 작전의 당위를 관객에게 역설하지도 않는다.
바로 그렇기에 이 영화는 위험하다. 시점이 바뀌면 판정이 뒤집힌다는 것이 두 번의 관람 사이의 이야기라면, 단 한 번의 관람 안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그 20분의 오프닝을 마주한 그 순간, 관객은 압도적 스케일의 스펙터클이 주는 짜릿함에 먼저 도취되었는가, 아니면 그 장르적 쾌감에 앞서 전장 그 자체의 참혹한 허무를 먼저 느꼈는가. 이것 역시 나는 판정할 수 없다. 그리고 판정할 수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문제의 핵심이다. 영화가 잘못 만들어져서가 아니다. 너무 잘 만들어졌기에, 매혹과 환멸이 같은 이미지 안에서 끝내 분리되지 않는 것이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잘 만들어서 위험한 영화이며, 우리의 출발점이다.

그렇다면 손쉬운 해법이 떠오른다. 더 사실적으로, 더 끔찍하게 만들면 되지 않을까. 그러나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이미 보여주듯, 사실성은 곧 스펙터클이 된다. 이 함정을 정확히 피해 간 영화가 있다. 공교롭게도 같은 1998년, 같은 2차 대전을 다룬 <씬 레드 라인>이다.
스필버그가 관객을 감각으로 압도해 전장 한복판에 밀어 넣었다면, 테렌스 맬릭은 정반대의 길을 택했다. 거대한 이야기임에도 피상적으로 프레임을 꾸미지 않고, 전쟁이라는 소재의 거시적 시선에 안주하는 대신 지옥도에 던져진 인간의 내면을 적극적으로 조명한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반전(反戰)을 설교하지 않는다. 간헐적으로 틈입하는 자연물의 이미지는 관객의 능동적인 사유를 환기할 뿐, 스펙터클한 액션의 쾌감을 주지 않으려 최대한 노력을 기울인 흔적이 역력하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논쟁적 요소가 될 수 있었던 스펙터클함의 화려함이 여기엔 없다.
다만 이 성공에도 마찰은 남는다. 독백과 내레이션의 현학적인 텍스트는 다소 이질적으로 느껴지며, 시에 가까운 작법으로 빚은 이미지와 그 텍스트가 온전히 조응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이 마찰은 하나의 단서를 남긴다. 스펙터클을 거부하는 길은 어쩌면 관조와 시(詩)의 방향에 있을지 모른다는 것. 이 단서는 잠시 접어두자.

스펙터클을 피하는 것이 그토록 어렵다면, 차라리 그것을 정면으로 끌어안되 관객에게 되돌려주면 어떨까. 1979년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지옥의 묵시록>이 택한 길이 그것이다. 이 영화는 압도적 스케일과 호방한 액션으로 관객을 매혹적인 전장으로 초대한 뒤, 그 공간의 광기를 여과 없이 비추어 관객 스스로 자신의 태도를 반성하게 만든다. 헬기 공중 강습 시퀀스에서 <발퀴레의 기행>이 울려 퍼지며 민간인을 학살하는 장면은, 음악이 관객에게 흥분하라고 명령하는 순간이다. 죽음 위로 깔리는 웅장한 스코어 그 자체가 유혹의 한 형식인 것이다. 감독 코폴라 본인이 이 장면을 들어 이 영화는 반전영화가 아니라고 말했고, 나 역시 가슴이 웅장해지는 발퀴레를 틀면서 폭격하는 장면을 두고 어떻게 이것이 반전영화일 수 있는지 의문을 품은 바 있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역설적으로 작동한다. 커츠 대령을 묘하게 동경했던 윌러드 대위와 마찬가지로, 전쟁의 막연한 오락성과 낭만성을 무의식 속에서 동경했던 관객은, 그 신기루야말로 이 부조리한 공간의 부산물에 불과했음을 스스로 마주하게 된다. 코폴라가 반전영화가 아니라 밝혔음에도, 이 영화는 어떤 반전을 표방하는 영화보다 탁월한 메시지를 선사한다. 하지만 여기엔 치명적인 조건이 붙는다. 이 작동은 오직 관객이 반성의 노동을 수행해 줄 때만 성립한다는 것이다. 나조차도 이런 대작 앞에서는 압도적인 장면의 힘에 맘 편히 감상적이 되곤 한다.
그렇다면 묻게 된다. 관객이 그 노동을 거부한다면. 발퀴레에 그저 도취된 채 흥분과 쾌감만을 가지고 극장을 나선다면. 서론에서 나는 한 사람조차 시점에 따라 여러 관객이 된다고 했지만,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시간을 가로지르는 복수성이 있다면, 같은 순간 극장에 나란히 앉은 관객들 사이를 가로지르는 복수성도 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 질문을 형식으로 증명했다. 2부작 격인 <아버지의 깃발>과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다. 그는 같은 이오지마 전투를 미군과 일본군 양쪽 진영에서 두 편으로 나누어 찍었다. 같은 전투를 보는 시선이 진영에 따라 이토록 달라진다면, 하나의 이미지가 누구에게는 추모이고 누구에게는 선전일 수 있다면, 서론에서 한 사람의 두 관람 사이에 벌어졌던 그 분열은 이제 사회적인 얼굴을 얻는다. 그러나 시선의 분열은 진영과 진영 사이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아버지의 깃발>은 같은 미국 안에서조차 그 분열이 벌어짐을 보여준다. 성조기 게양이라는 그 유명한 사진은, 그것이 찍힌 병사들에게는 전우가 스러져간 참혹한 현장이지만, 그것을 이용하는 국가에게는 전쟁채권을 팔기 위한 선전 도구다. 영화는 추모의 이미지가 선전으로 가공되는 그 과정 자체를 해부한다. 하나의 이미지가 무엇이 되는가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지 않다. 그것으로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같은 순간, 같은 화면 앞에서도 관객은 여럿인 것이다. 스펙터클을 되돌려준다는 <지옥의 묵시록>의 전략이 흔들리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되돌려받을 관객의 자리가 단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더 급진적인 해법으로 가자. 스펙터클이 올라탈 형식적 고리 자체를 제거하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화는 단연 구소련의 걸작 <컴 앤 씨>다.
내가 이 영화를 높게 평가하는 이유가 있다. 어느새 전쟁영화의 미덕처럼 사용되는 서스펜스가 이 영화엔 없기 때문이다. 긴장을 의도적으로 유예시키며 장르적 쾌감을 제공하는 기술을, 이 영화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마을로 돌아온 주민들이 도망친 줄 알았을 때 카메라는 그들의 시체를 스쳐 지나가듯 비출 뿐이며, 헛간에 사람들을 몰아넣고 불과 총으로 학살하는 후반부 시퀀스에서도 영화는 그들이 살 것인지 죽을 것인지를 두고 편의적인 시소게임을 벌이지 않는다. 주인공과 관객은 이 비극의 결과를 이미 짐작하지만 이를 바꿀 수도 저항할 수도 없다. 우리는 철저하게 무력감을 느낀다. 롱테이크와 1인칭 시점은 관객을 인물과 일치시키며, 영화가 보여주는 초토화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영화의 마지막, 전쟁의 광기에 사로잡힌 소년이 히틀러의 사진을 향해 총알을 난사할 때, 영화는 역재생을 통해 히틀러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기어이 유년 시절의 히틀러를 소환한다. 수많은 악행 앞에 방아쇠를 당기던 소년도, 어린 히틀러의 사진 앞에서는 차마 방아쇠를 당기지 못한다.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은 어린아이의 모습이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트뤼포는 진정한 반전영화는 존재할 수 없다고 했지만, 그 불가능한 목표를 위해 이 영화는 필사적으로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 끝내 완주한다. 지금까지의 어떤 해법보다 강력한 답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컴 앤 씨>가 완전한 전쟁영화인가? 가장 강력해 보이는 이 답에도 빈틈이 있다. <컴 앤 씨>를 보던 나는, 후반부에 이르기 전까지, 비정형적이고 과장된 클로즈업이 의식될 만큼 많이 등장하는 것을 보며 이 영화가 광기를 전달하기 위해 '애쓰는' 듯한 인상에 다소 갸웃했었다. 더 큰 질문은 이것이다. 쾌락의 고리를 제거하고 남은 그 충격적이고 지독한 이미지들 자체가, 역설적이게도 또 하나의 스펙터클이 되지는 않는가. 실제로 나는 어쩌면 <컴 앤 씨>보다 표현의 방식에 있어 더 나아간 듯한 영화 <페인티드 버드>의 적나라한 이미지들 앞에서 정확히 그 의심을 품은 적이 있다. 지옥도를 그리려는 의도였음에도 간헐적으로 그 자극적 이미지 자체에 대한 집착성이 느껴졌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감독의 의도와 모순되는 것은 아닌가 갸웃했던 것이다. 이미지를 통한 모든 탈출은 이미지의 함정으로 되돌아오는 듯하다.
이 회귀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영화가 <1917>이다. <1917>의 촬영은 특별하다. 그러나 내 기준에서 이 경우는 과잉이었다. 거대한 기술의 강박적 남용이 오히려 비순수성을 불러왔다. 인물들의 여정은 처절한 반면, 카메라는 원 컨티뉴어스 숏을 이어가기 위해 시공간을 유려하고 매끄럽게 유영한다. 스코필드가 철로를 아슬아슬하게 건널 때 카메라는 그의 뒤와 옆을 자유롭게 날아다닌다. 스코필드에겐 위기가 닥치지만, 카메라에겐 고난이 없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핸드헬드가 병사들의 뒤를 따르며 처절한 리얼리티를 만들어냈다면, <1917>의 매끄러움은 그 처지의 괴리로 인해 짐짓 기만적으로까지 느껴진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출발점으로,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빠졌던 그 함정으로 되돌아왔음을 깨닫는다. 다만 이제는 <1917>이 어째서 그 출발점으로 되돌아왔는지, 그 이유를 명명할 수 있을 것만 같다. 함정에서 벗어나려 든 그 방법 자체가, 매번 새로운 볼거리가 되어 관객을 다시 매혹시키기 때문이다. 사실성으로 탈출하면 사실성이 스펙터클이 되고, 기교로 탈출하면 기교가 스펙터클이 된다. 모든 형식적 해법은 자기 자신의 형식을 미학화하는 순간 배신한다. 스탠리 큐브릭의 걸작 <영광의 길>이 전투 시퀀스에서 의도적으로 둔탁한 움직임을 연출해 전장을 미적으로 표현하길 거부했던 것과 비교한다면, <1917>의 그 우아한 비행을 나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 <1917>은 분명 훌륭한 영상이다. 그러나 훌륭한 영화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 재귀에서 빠져나오려면 질문 자체를 옮겨야 한다. 지금까지의 물음이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였다면, 이제 물어야 할 것은 '무엇을 보여줄 권리가 있는가'이다. 재현의 윤리라는 문제다.
그 기준점으로 <쉰들러 리스트>를 놓자. 이 영화에서 가장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너무나도 간편한 악의 캐릭터성이다. 주제를 내세우기 위해 아몬 괴트를 평면적인 절대악으로 상정하고 그의 악행을 자극적인 촬영으로 부각시킨다. 유태인의 전라를 야외에 전시하는 방식은 충격 요법의 의도가 노골적이다. 실화라 할지라도 영화라는 매체로 들어온 이상 영화만의 내적 논리를 따라야 한다. 사건의 자극성을 부각시켜 충격을 강요하는 방식을 나는 선호하지 않는다. 전능한 관찰자의 시점에서 비극을 객관적으로 재현해 전시한다면, 이는 그들에 대한 또 하나의 시선의 폭력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시선을 구속하면 어떨까. <사울의 아들>이 택한 길이다. 이 영화는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비스타비전도, 스펙터클을 제공하는 시네마스코프도 아닌, 이젠 찾아보기 힘든 아카데미 비율 1.37:1의 화면비를 사용한다. 수감자들의 시선은 모두 다르며 그들은 자신이 존재했던 수용소의 총체를 파악할 수 없기에, 이 좁은 화면비와 배경을 지우는 아웃포커스는 관객의 시야를 사울이 처한 그것과 동일시한다. 대개의 영화에서 우리는 영화 속 한 인물보다 많은 것을 볼 수 있지만, 우리는 <사울의 아들>에서 사울이 디딘 곳 이외의 공간을 알 수 없으며, 사울이 정확히 인지한 것만을 겨우 볼 수 있다. 가스실을 공간으로 두고 있지만 그곳에서의 학살에 카메라의 초점을 맞추지 않는 이 영화는, 비극을 자극적으로 재현하는 여타 영화에 대한 안티테제로 기능한다. 자극적인 장면이 관객의 감정을 오롯이 쥐고 흔든다면, 소재의 사용은 사건의 비극성을 전달하기에 앞서 감독의 미학적 성취를 위한 기교로만 남기 때문이다.

시야를 구속하는 이 길의 끝은 어디인가. 구속의 극한은 추방이 아닐까.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학살을 화면에서 완전히 추방한다. 산과 물과 풀숲에서 뛰노는 한 가족의 평화로운 순간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평화 말고는 다른 것을 떠올리기 어려운 그 순간, 우리는 아버지 루돌프의 제복이 나치의 근무복임을, 그의 직장이 그가 거하는 집의 한 울타리 너머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임을 알게 된다. 장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공간과 가장 아름다운 낙원이 공존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소름 끼치는 순간은 카메라 앞에 어떤 이미지를 가져다 놓을 때가 아니라, 평온하고 아름다운 이미지 너머로 누군가의 울부짖음이, 무언가 벌어지고 있음을 확신할 수밖에 없는 소음들이 들리는 순간이다.
여기서 이 글이 지금껏 한 번도 다루지 않은 차원이 열린다. 소리다. 우리는 줄곧 이미지와 카메라를 이야기해 왔다. 그러나 전쟁영화는 소리로 막대한 윤리적·미학적 작업을 수행한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 카메라를 통한 기교는 전무하다시피 하며 대부분의 순간 카메라는 얼어붙어 있다. 영화는 내화면 대신 외화면에 집중해 주제를 만들어낸다. 남편의 출근길을 배웅하고 정원의 꽃을 바라보는 회스의 모습이 내화면에 포착되는 동시에, 외화면에서는 의미심장한 쇳소리와 처형의 소리가 무심히 흐른다. 관객의 눈앞에서 루돌프는 유희로 담배를 태우지만, 공간 너머에서는 누군가의 육신이 연기로 태워진다. 학살의 순간조차 카메라는 루돌프의 얼굴만이 겨우 담기는 로우 앵글로 그만을 포착할 뿐, 그곳의 끔찍함은 신음 소리와 거뭇한 연기로 짐작될 따름이다. 참혹한 현장을 끝까지 이미지로 재현하길 거부하면서도, 외화면과 대비를 통해 그 비극이 분명 존재했음을 공고히 하는 이 영화는, 재현하지 않지만 다큐멘터리는 아닌, 홀로코스트 영화의 한 신기원이다. 악이 이토록 평범한 얼굴을 한 채 일상에 녹아 있음을, 영화는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증명한다.
픽션(가짜가 아니라 극이라는 말이다)과 아름다움을 그대로 둔 채 잔혹만을 소리로 옮긴 것이 <존 오브 인터레스트>라면, 픽션 자체를 포기하면 무엇이 남는가. 알랭 레네는 1956년 <밤과 안개>에서 다큐멘터리를 택했다. 시간과 진실을 머금은 과거의 영상 자료와 사진을 통해 꾸밈과 거짓 없는 역사를 전달하며, 흑백에 대비되는 컬러 영상으로 종전 후 남은 흔적과 멈춰버린 것들의 증언을 끊임없는 교차편집으로 관객에게 들이민다.
작금의 시선에서 이 영화의 방법론은,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영화라는 창작물이 온전히 재현할 수 없음을 깨달은 체념적 시선의 결과물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체념이 아니라 가장 정직한 선택이라고 말하고 싶다. 비극을 프레임 안에 재현하는 과정에서 감독의 미학적 비전을 위한 설정들이 개입하기 시작하면, 감독은 자신의 예술적 성취에 집착해 영화가 전달하려는 핵심을 흐리고 주객을 전도시키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알랭 레네는 재현을 포기하는 대신, 카메라가 역사를 추적하기를 멈추지 않는 길을 택한다. 완벽의 미학에는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분명한 진실에는 도달해야 한다. 그것이 비극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가장 진정성 있는 방법일 테니까. 다만, 이것은 한 방향의 끝이기도 하다. 가장 윤리적인 입장이 극영화의 포기라면, 그 끝에 닿는 순간 영화는 영화이기를 그만두기 때문이다.
재현의 윤리에는 한 가지 특수한 사례가 더 있다. 적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 혹은 재현하지 않을 것인가의 문제다. 적의 비인간화는 가장 오래된 선전 기술이기에, 이 물음은 글의 첫머리에서부터 따라온 프로파간다의 실타래와 직결된다.

타르코프스키의 <이반의 어린 시절>은 적군인 독일군의 모습을 영화 내내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는다. 등의 상처로 대변되는 전쟁의 상흔으로 인해 아이의 순수를 잃어버린 이반에게, 순수는 오직 과거를 추억하는 꿈속에서만 보여진다. 가족의 복수를 위해 그는 끊임없이 전쟁터에 남길 원하고, 과거와 환상은 그를 옭아매어 전장을 떠나지 못하게 만든다. 적나라한 표현 없이도, 자극적이고 위악적인 이미지에 도취되지 않고도, 이 영화는 시적 이미지를 통한 정서의 전달만으로 전쟁의 참혹을 끝내 이루어낸다.
적을 보여주지 않는 것이 한 답이라면, 정반대로 적을 인간으로 그리면 어떻게 되는가. <다운폴>은 히틀러를 인간(인 동시에 주인공)으로 그려 정확히 그 윤리 논쟁을 불러일으킨 영화다. 그러나 이 영화가 히틀러의 상냥한 면모를 일부 보여줄 때, 그것은 결코 히틀러를 동정하는 면죄부로 작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장면들은 그를 수많은 국민을 이끄는 리더가 아니라 한낱 보잘것없는 인간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어떤 인물의 방향이 아무리 악이라 하더라도 사람들은 때때로 그 강력한 에너지에 무의식적으로 매혹될 수 있는데, <다운폴>은 바로 그 악의 카리스마를 걷어낸 드문 사례다. 악은 종종 무능하며 너무나 평범하고 비참한 얼굴을 하고 있다. 이 영화는 그것을 정확히 포착한다. 여기서 앞서 언급했던 <컴 앤 씨>의 마지막이 되돌아온다. 소년이 어린 히틀러의 사진 앞에서 방아쇠를 당기지 못한 그 망설임과, <다운폴>이 어른 히틀러를 인간화하는 작업은 같은 철학적 지점에서 충돌한다. 적에게 얼굴을 주는 것은 윤리인가, 면죄인가. 두 영화가 함께 내놓는 답은 이렇다. 얼굴을 주되 카리스마를 걷어내면 윤리가 되고, 얼굴을 주되 동정을 부여하면 면죄가 된다.
<다운폴>이 히틀러에게서 카리스마를 걷어내 윤리에 도달했다면, <철십자 훈장>은 같은 일을 다른 자리에서 해낸 작품이다. 나치의 병사를 주인공으로 삼으며 그들에게 감정적 서사를 부여했다는 것 때문에 얼핏 나치에 대한 동정으로 의심받기 쉽지만, 실은 그 의심의 반대편에 확고히 선다. 페킨파는 총탄에 스러지는 육체를 슬로모션으로 늘여 폭력을 하나의 안무처럼 빚어내던 감독이다. 폭력 미학의 거장이라 불리는 그가,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오락적 테이스트가 사라진 서늘한 지옥의 공간만을 보여주며 적나라한 표현을 전장의 허망함에 오롯이 복무시킨다. 무대는 패주하는 동부전선의 나치 독일군이며, 주인공 슈타이너는 그 이름이 곧 영화의 제목인 철십자 훈장을, 그러니까 국가가 수여하는 명예 그 자체를 경멸하는 인물이다. 적군의 내면에 감정을 담았으되, 영화는 그를 끝내 영웅의 자리에 앉히지 않는다. 다운폴이 악에게서 카리스마를 걷어냈듯, <철십자 훈장>은 적군에게서 영웅의 후광을 걷어낸다. 폭발이 일어나는 순간 히틀러의 사진이 벽에서 떨어지는 그 짧은 장면이 말하듯, 영화가 응시하는 것은 어느 진영의 대의가 아니라 전쟁 그 자체의 덧없음이다. 끊임없이 귓전에 밀려드는 포성이 청각의 잔상처럼 이명으로 남는 이 영화의 광기는 <지옥의 묵시록>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적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의 물음은, 결국 누가 누구의 고통을 그리고 있는가라는 더 큰 물음으로 이어진다. 위치성의 문제다. <바시르와 왈츠를>은 가해자의 기억을 다룬다. 감독 아리 폴만 자신이 레바논 내전 당시 그 자리에 있던 이스라엘 병사였고, 영화는 그가 떠올리지 못해 괴로워하는 학살의 기억을 따라간다. 사브라-샤틸라 학살의 참혹함은 실사로 재현하기엔 너무 끔찍하며 자칫 피해자에게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기에, 애니메이션은 그 윤리적 딜레마를 피하면서도 사건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게 한다. 그리고 영화 말미, 애니메이션이 실제 기록 영상으로 전환되며 학살 이후 절규하는 주민들을 비추는 순간, 형식 뒤에 가려져 있던 현실의 무게가 고스란히 전달된다. 이 영화에는 이스라엘 병사의 고통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그들을 학살의 '방관자' 혹은 사건의 전말을 몰랐던 '순진한 피해자'처럼 비추는 것 아니냐는 비판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영화로 민족의 반성을 촉구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면, 자기 자신만이라도 죄악 앞에서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응시하려는 태도가 있기에 메시지는 힘을 잃지 않는다. 폴만이 그렇게 자신이 선 자리를 응시할 때, 나는 한국어로 이 글을 쓰면서 단 한 편의 한국 전쟁영화도 호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끝나지 않은 전쟁의 당사국에서 '모든 전쟁영화'를 말해온 내가, 과연 내 자리를 응시하고 있었는지는 자신할 수 없다.
이제 처음의 미결로 돌아갈 차례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성조기는 처음 보았을 때 프로파간다였고 다시 보았을 때 예우였다. 같은 화면이 어째서 두 개의 윤리적 의미를 가질 수 있었는가. 그 미결을 풀 열쇠가 이제 손에 있다.
만약 전쟁영화가 선전의 도구로 쓰여서는 안 된다는 명제를 끝까지 밀어붙인다면, 우리는 곤란해진다. 앞서 보았던 이스트우드의 두 영화가 그 곤란을 증언한다. <아버지의 깃발>은 성조기 게양 사진이 선전으로 가공되는 과정을 그리면서도 바로 그 위선을 폭로했고,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전범국을 주인공으로 삼고도 미화 대신 성찰을 이끌어냈다. 선전의 재료를 정면으로 끌어안고도, 두 영화는 선전이 아니라 그 반대편에 도달한 것이다. 이 영화들 앞에서 '선전 금지'라는 명제는 너무 거칠다. 영웅과 성조기와 애국적 정서라는 재료의 존재 자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그것이 비인간화로 향하는가 폭력을 세탁하는 데 쓰이는가가 문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성조기에 대한 나의 판정이 뒤집힌 것은, 영화가 그 사이에 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 앞에 선 내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성조기가 예우인지 선전인지는 영화 안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영화가 그 깃발로 무엇을 하는가와, 관객이 그 깃발 앞에 무엇을 짊어지고 서는가가 만나는 자리에서 매번 새로 결정된다. 그러니 '선전 금지'라는 명제는 영화의 속성만을 검사해서는 끝내 판정할 수 없다. 판정 불가능성은 영화의 결함이 아니라, 영화와 관객 사이에서 매 관람마다 다시 일어나는 하나의 사건인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함정과 그로부터의 탈출들을 따라왔다. 사실성으로 탈출하면 사실성이 스펙터클이 되고, 기교로 탈출하면 기교가 스펙터클이 되며, 절제로 탈출하면 그 절제가 미학화되고, 다큐멘터리로 탈출하면 영화를 떠나버린다. 모든 해법이 새로운 문제를 낳는다. 이 재귀를 목격한 뒤에야 나는 비로소 내가 처음 가지고 있던 신념들을 다시 꺼낼 수 있다.
전쟁을 찬미하는 영화는 다시는 만들어져서는 안 된다. 전쟁의 형식 속에서 은밀히 폭력에의 매혹을 전달하는 영화 역시 생겨나서는 안 된다. 그러나 스펙터클의 장(場)이 되어선 안 된다는 나의 오래된 명제는, 이제 이렇게 고쳐 적어야 한다. 모든 형식적 해법은 자기 자신의 스펙터클을 낳으므로, 전쟁영화의 윤리는 완성에 있지 않고 불완전을 견디는 데 있다고. 선전의 도구로 쓰여선 안 된다는 명제 또한, 비인간화하고 폭력을 세탁하는 선전을 금한다는 말로 정밀해져야 한다고.

누구에게나 완벽한 영화가 없듯, 완벽한 전쟁영화도 없다.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상 완전한 반전영화는 도달할 수 없는 목표일지 모른다. 그러나 <밤과 안개>의 카메라가 가르쳐주었듯, 완벽의 미학에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분명한 진실에는 도달해야 한다. 항상 예술이 나아간 방향은 불가능한 장벽을 향한 도전이었으며,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는 전투적인 시도였다. 전쟁영화 역시 그 불가능을 향해 전진하는 영화들이기에, 그 도전이 자기 자신의 스펙터클에 잡아먹히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한, 나는 언제나 그들을 지지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