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읽으면, 무엇이 달라 보일까요?

연재한 글을 지면으로 옮겼습니다.

21ST CINEMA

보이는 자와 사라지는 자, 이병헌과 송강호

<공동경비구역 JSA>
<공동경비구역 JSA>

"영화는 감독의 예술, 드라마는 작가의 예술, 연극은 배우의 예술이다." 수십 년간 한국 연기 역사의 산증인이었던 이순재 배우는 위와 같은 말로 자신의 예술론을 드러낸 바 있다.

"나쁜 감독 밑에는 좋은 배우가 있을 수 있지만, 좋은 감독 밑에는 나쁜 배우가 있을 수 없다." 라는 예술계의 유명한 격언도 있다.

두 말은 공교롭게도 같은 곳을 가리킨다. 영화라는 매체 안에서 배우는 끝내 자기 자신만의 주인일 수 없다는 것. 스크린에 새겨지는 한 배우의 모습에는 그 자신의 역량뿐 아니라 감독의 디렉팅과 편집의 호흡이 함께 스며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한 배우의 '연기'를 논할 때, 우리는 대체 무엇을 논하고 있는 것일까. 연극이 아닌 영화에서, 연기란 사뭇 오묘한 요소이다. 배우의 역량과 컨디션에 따라서나 혹은 감독의 디렉팅에 따라서 배우는 경력 최고의 연기를 선보일 수도 있으며 혹은 영원한 웃음거리로 남을 만한 모습을 남길 수도 있다.

내가 생각하는 한국 역사상 최고의 여성 배우는 전도연이다. 그러나 그 전도연마저 <협녀>에서는 거추장스러운 설정이 이것저것 붙은 캐릭터를 맡은 까닭에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그녀의 역량만큼의 것을 보여주지 못했다. 한편, 나는 아역 배우들의 능력치를 신뢰하지 않는다. 물론 그 중에서도 재능이 넘치는 아이들이 놀라운 연기를 보여주는 경우가 있곤 하지만, 절대적인 '경험'의 면에서 떨어지는 아이들이 성인 배우들이 하는 것 만큼의 연기의 '폭'을 보여주기는 당연히 어렵다는 사실에서다. 그렇기에 <아무도 모른다>를 통해 당시 14세의 야기라 유야가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것은 고레에다 히로카즈라는 거장의 공로가 컸을 것이다. 동어반복하자면 영화라는 매체 안에서 배우는 홀로 설 수 없는 존재다.

<샤이닝>
<샤이닝>

또한 영화에서의 연기에 대한 평가는 무엇보다 찬/반이 갈리는 분야일 것이다. <샤이닝>에서의 셜리 두발의 연기가 훌륭했는지, 훌륭하지 않았는지는 아직도 논쟁거리이지 않던가. 나는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연기를 굉장히 좋아한다. 역대 최고의 배우 중 한 명이라 생각하며, 그의 연기는 영화 안에서 언제나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생각을 받는다. 그러나 혹자는 그의 연기가 과시적이고 부담스럽다며 싫어하기도 한다. 나는 <아수라>의 정우성의 연기가 좋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아수라>에서 그의 발성이나 시선 처리 같은 디테일이 뛰어났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아쉬운 점과 극 중 그의 어색함 넘치는 욕설마저 그가 연기한 '한도경'이라는 인물의 특징과 제법 잘 어울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다 보면 '누가 봐도 잘하는' 연기들이 있다. 이런 케이스는 대부분 강렬하게 폭발하는 연기이다. 예를 들면 <위플래시>에서의 J.K. 시몬스, <조커>에서의 와킨 피닉스, <밀양>에서의 전도연, <올드보이>에서의 최민식 등이 있다. 이러한 퍼포먼스를 마주한 관객들의 감상은 분명 "와 연기 잘한다."로 귀결되지 않을까. 오해는 없었으면 좋겠다. 이들을 폄하하고자 하는 것이 절대 아닌, '누가 봐도 잘하는 연기'의 경우라는 것이다. 또한 계산적인 연기를 하는 배우들의 퍼포먼스는 누가 봐도 잘하는 연기일 것이다. 케이트 블란쳇, 메릴 스트립, 안소니 홉킨스 등등. 만약 특정 장면에서 특정 인물이 슬픔의 감정을 느끼고 있는 상황이라면, 모든 관객이 인물의 감정을 정보로서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는 연기가 계산적인 연기일 것이다. 말이 길지만 쉽게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보더라도 "아 저 사람 지금 슬프구나!"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 연기를 주로 선보이는 경우를 말한다.

엄밀히는 어폐가 있는 표현임을 안다. 그러나 나는 '연기'와 '연기력'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약간 구분해야 하는 개념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보다 자세하게 말하자면 연기'력'은 배우 스스로의 'skill'의 영역인 것 같고 '연기'는 프레임 안에 담기는 모습 - 그것이 배우의 타고난 피지컬이든 감독의 디렉팅으로 인함이든 - 즉 'image'의 영역인 것 같다. 이를테면 멜로 장르에서 관객의 설렘을 유발하기 위해 캐스팅한 배우들의 잘생긴 마스크, 이 또한 프레임 안에 담기는 연기의 일부분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화양연화>에서의 치파오를 입은 장만옥이라는 피사체 자체, 이 또한 연기의 일부분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image란 '아름다움'의 다른 이름만은 아닐 것이다. 어떤 얼굴은 자신이 고유하게 지닌 빼어난 미모로 프레임을 가득 채우지만, 또 어떤 얼굴은 닳고 닳은 평범함 그 자체로 프레임을 채운다. 우리 옆집 어딘가에 살고 있을 것만 같은 얼굴, 스크린 안에 담겨 있다는 사실조차 잊게 만드는 그 무던한 얼굴 또한, 하나의 강력한 image인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가정을 하나 던져보고 싶다. 배우 스스로의 'skill'이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각자 뛰어난 두 배우가 있다고 하자. 그런데 그 둘이 동등한 그 힘을 정반대 방향의 'image'로 빚어낸다면 어떨까. 한 사람은 자신의 skill을 '최대한 보이는' 쪽으로 쏟아붓고, 다른 한 사람은 그 skill을 '최대한 보이지 않는' 쪽으로 가라앉힌다면. 그리고 나와 당신은, 공교롭게도 그런 두 배우를 이미 알고 있다.

"현재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배우 두 명을 대라."라고 질문을 한다면 어떤 답변이 나올까. 아마도 이병헌과 송강호가 가장 많이 언급되지 않을까. 두 배우는 지난 20년간 가장 빛났던 배우들이며 수많은 작품을 통해 가장 뛰어난 연기를 보여준 배우들이다. 때로는 한 작품에서 함께 연기를 선보였으며 언제나 수많은 이들을 통해 비교되어 왔다.

필자는 연기를 업으로 삼은 사람도 아니고, 연기를 학문으로 배운 사람도 아니다. 다만 지금껏 두 배우의 얼굴을 응시하며 느낀 차이를, 내가 느낀 그대로 몇 자 적어보려 한다. 두 배우는 외모도 다르고 이미지도 다르며 연기의 스타일도 다르다. 배우의 연기법은 여러 요소로 인해 취향이 갈리는 분야일 것이다. 두 배우의 우열을 분명하게 정하는 것은 아마 가장 어려운 일 중에 하나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 글에선 두 대배우의 우열을 가리기보단 차이를 생각해 보고 그들이 보여준 그 탁월한 모습들을 다시금 반추해 보도록 하자.

미리 밝히자면 나는 국내 남자 배우 중 가장 좋아하는 배우가 이병헌이다. 그렇지만 나는 남녀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국내 배우는 송강호라고 생각한다. 가장 좋아하는 배우와 가장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배우가 다르다는 것, 이 글은 어쩌면 이 어긋남에서 출발한 기록일지도 모르겠다.

앞서 던진 가정을 이제 두 배우 위에 그대로 포개어 보려 한다. 이병헌과 송강호, 두 배우의 연기'력'은 의심할 여지 없이 충무로 최상위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그 동등한 힘이 프레임 위에 맺히는 방향은 정반대다. 이병헌은 자신의 skill을 가장 선명하게 '보이는' 쪽으로 밀어붙이고, 송강호는 그 skill을 가장 깊은 곳까지 '숨기는' 쪽으로 가라앉힌다. 이 글은 결국 그 두 방향에 관한 이야기다.

많은 이들이 이병헌을 추앙하는, 아니 신격화하는 제1의 요소로 드는 것이 바로 소위 연기 '스펙트럼'이다. 이병헌과 송강호를 비교할 때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송강호는 연기 폭이 좁아.", "송강호의 연기는 다 거기서 거기야." 나는 이 점에는 동의를 하지 못하겠다. 정말 진심인가? 송강호의 사투리 억양을 이유로 그의 연기가 매번 똑같다 생각하는 것일까? 한 영화의 흥행이 반드시 그 영화의 작품성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지만, 송강호가 이병헌보다 크게 흥행한 작품의 수가 많기 때문에 아마도 평균적으론 대중들은 송강호의 모습에 더 많이 노출되었을 것이다. 하나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우리가 어떤 배우를 자주 접해 그 배우의 얼굴에 익숙해진 것'과 '그 배우의 연기 폭이 좁은 것'은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만이 내 세상>
<그것만이 내 세상>

이병헌의 연기 스펙트럼은 충무로의 배우 중 최상위권이다. 이 점에선 말이 필요 없다. 이병헌은 <광해>에서의 지엄한 군주의 역할도, <그것만이 내 세상>에서의 헐렁한 소시민의 역할도 완벽히 소화한다. <악마를 보았다>를 통해 선보인 내내 강렬하게 폭발하는 경호원의 모습은 탁월했으며 <싱글라이더>에서 보여준 힘을 뺀 섬세한 연기는 역시 훌륭했다. 특히 1인 2역을 연기한 <광해>의 경우 낮고 묵직한 발성과 가볍고 흔들리는 발성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마스터>에선 필리핀식 영어를 구사하며 <남산의 부장들>에선 그 시절의 콩글리시를 구사했다. 이병헌의 그 다채로움을 보고 있자면 무섭기까지 하다. 심지어 상대적으로 최근작인 <콘크리트 유토피아>나 <승부>의 모습을 보면 이 배우의 역량이 아직도 우상향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준다.

그러나 송강호의 연기 스펙트럼도 그에 못지않다. 아니 어떤 순간에는 이병헌의 그것을 넘어서는 듯 보이기도 한다. 나는 <복수는 나의 것>과 <밀양>의 송강호가 도무지 같은 배우로 보이지 않는다. <복수는 나의 것>의 동진은 섬뜩할 정도의 건조함과 차가운 피비린내가 가득한 인물이지만 <밀양>의 종찬은 대한민국 어디엔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살아가고 있을 평범한 소시민의 모습이었지 않은가. 나는 <살인의 추억>과 <박쥐>의 송강호가 도무지 같은 배우로 보이지 않는다. <살인의 추억> 속 박두만 형사는 시대의 먼지를 가득 머금은 '만두 박'의 형상이지만 <박쥐> 속의 상현은 지금껏 송강호의 모습에게선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매혹적이고 퇴폐적인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자주 언급되는 배우들이지만 여전히 위험한 비교를 하나 해보자. 배우가 배역에 접근하는 부분에 있어, 나에게 이병헌의 연기는 로버트 드 니로 같으며 송강호의 연기는 알 파치노 같다. 이병헌은 배우가 배역이 된다. 송강호는 배역이 배우가 된다. 내 감상으론, 이병헌은 자신이 맡은 배역의 모든 것을 완벽하게 분석하는 느낌이라면 송강호는 자신의 특징을 배역에게 덮어 씌우는 느낌이다. 이병헌은 마치 로버트 드 니로처럼 자신의 외형을 배역에 맞춰 동화되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송강호는 알 파치노처럼 배역을 자신에 맞춰 개조해 새롭게 재해석한다는 느낌이다. (이병헌이란 배우가 몰개성하고, 송강호라는 배우가 게으르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흥미롭게도 이것과 유사한 구분이 이웃 나라에도 있었다. 홍콩 영화의 거장 왕가위, 그의 페르소나 중 가장 중요한 두 명은 아마도 장국영과 양조위였을 것이다. 왕가위 사단의 프로듀서 재키 팽은 양조위를 "캐릭터와 사랑에 빠지는 배우", 장국영을 "캐릭터를 유혹하는 배우"라 평한 바 있었다. 캐릭터에게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양조위가 이병헌의 자리라면, 도도하게 캐릭터를 쥐고 흔들어 끝내 제 것으로 소화해 버리는 장국영은 송강호의 자리일 것이다.

<타이타닉>
<타이타닉>

이병헌의 연기를 보며 많은 이들이 "이병헌의 연기를 보면 항상 다른 사람 같다, 그의 다른 배역이 떠오르지 않는다."라는 말을 한다. 동의하는 바이다. 대부분의 배우의 경우는 독보적으로 떠오르는 하나의 인물, 혹은 특정한 이미지가 있기 마련이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하면 아마도 대부분의 이들은 여전히 <타이타닉>의 '잭'을 떠올릴 것이며 '키아누 리브스' 하면 아마 많은 이들에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그의 캐릭터는 <매트릭스>의 네오일 것이다. 이젠 하나의 밈처럼 굳어진 배우 이경영의 이미지는 무언가를 진행시키는 고위층 관료의 모습일 것이다.

한 배우가 가지고 있는 고정된 이미지라거나, 그가 너무나 유명한 배우이기에 스크린 바깥에서의 그의 행적이 몰입에 개입되는 순간이 온다면 그것이 마냥 바람직한 방향인진 의문이 든다. 톰 행크스를 떠올리면 연상되는 이미지는 순수하고 올곧은 미국 소시민의 형상일 것이기에 만약 그가 조커나 안톤 쉬거와도 같은 역할을 맡는다면 많은 경우 그의 모습이 관객들에게 이질적으로 다가올 것이라 생각이 든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레버넌트>의 경우 우리가 그의 연기를 보며 과연 주인공인 '휴 글래스'에게 몰입을 했던가, 아니면 그에 앞서 오스카를 수상하려는 디카프리오의 발버둥을 느꼈던가. 하나의 고정된 이미지는 궁극적으로 배우 스스로에게 썩 긍정적인 방향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기에, 배우 이병헌이 보여주는 '천의 얼굴'은 분명 그의 능력이자 자산이다.

결국 이병헌의 '천의 얼굴'이란, 매 작품마다 전혀 다른 image를 프레임 위에 새로 새겨 넣는 능력일 것이다. 그는 자신을 철저히 지우고, 그 빈자리에 새로운 인물의 image를 빈틈없이 세운다. 그런데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그렇게 매번 자신을 지우는 이병헌은 어느 작품에서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배우가 되고야 만다.

이병헌은 속된 말로 '쪼'가 없다. 그만의 버릇을 찾기가 힘들다. 이병헌은 그 정교함이 본능에 가까울 만큼 탁월하며, 동시에 캐릭터에 완전히 동화되는 능력을 지녔다. 배우의 모든 테크닉을 요구하는 클로즈업 장면들을 볼 때마다 그 디테일에 감탄하곤 하는데, 눈썹의 미세한 움직임, 호흡의 강도 등을 엄정하게 조절하는 그의 모습에 매번 인상적이었다. CF 촬영에 임할 때조차 자신이 연기할 캐릭터에 대해 철저하게 분석하고 감독의 이전 작품들까지 연구해 온다는 그의 일화는 이병헌이라는 배우가 인물을 분석하는 그 프로페셔널함이 어떠한지를 짐작케 한다.

<악마를 보았다>
<악마를 보았다>

이병헌의 표정 연기를 볼 때면 도저히 저 방법보다 저 인물을 더 잘 표현할 방법은 없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이를 보면서 관객이 작위적이라는 인상을 쉽게 받지 않는 이유는, 그의 모든 몸짓이 인물의 감정을 표현한다는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해 집중한다는 것을 관객들 스스로가 강하게 인지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예시는 <광해>의 미공개 엔딩이라고 잘 알려져 있는 장면과, <악마를 보았다>의 엔딩 장면을 들 수 있겠다. 모두가 알고 있는 이야기지만, 특히 후자의 경우 이병헌의 표정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표현한 훌륭한 예시일 것이다. 실로 어마어마한 집중력을 선보이며 모든 순간 정답에 가까운 완벽함을 연기하는 배우. 충무로에 과연 이런 배우가 몇 명이나 될까.

그 집중이 가장 순수하게 드러나는 장면이 <악마를 보았다>의 엔딩이다. <악마를 보았다>의 마지막은 사실상 걸어가는 한 인간의 표정이 무너지는 장면 그 하나로 이루어져 있다. 장경철의 목이 그의 가족 앞으로 굴러떨어지며 단두대의 칼날이 수현이 계획해 왔던 모든 복수의 서사를 종결시킨 직후, 영화가 마지막으로 관객에게 내미는 것은 대사도, 음악의 고조도 아닌, 한밤중의 칠흑을 갓 벗어난 새벽의 거리를 걸어가는 수현의 얼굴 하나다. 본작의 감독 김지운은 여기서 연출을 거의 비워낸다. 카메라는 그저 그 얼굴을 따라가고, 조용한 선율 한 줄이 깔릴 뿐이다. 영화가 두 시간 동안 쌓아 올린 모든 질문인 "복수란 무엇을 남기는가, 악마를 응징한 자는 무엇이 되는가?" 의 응답을 어쩌면 오롯이 이병헌의 표정 하나에 위임한 것이다. 그것은 감독이 배우에 대한 강한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흔히 '웃는 듯 우는 듯한' 얼굴로 회자되지만 거기에 웃음의 감정은 없다. 입이 벌어지고 이가 드러난 형태가 웃음으로 오인될 뿐, 그가 붙든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하나, 복수가 끝난 자리에 남은 '상실'이다. 슬픔이 그 통상의 꼴조차 넘어설 만큼 극한으로 밀어붙여졌기에 표면이 일그러진 것이다. 모든 몸짓이 단 하나의 감정으로 수렴할 때 연기가 가닿는 자리가 바로 여기다.

송강호가 대단하다고 느끼는 부분은 개성을 죽이는 연기와 개성을 살리는 연기, 계산적인 연기와 동물적인 연기 등 어느 분야에서든 최고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에 있다. <밀양>의 종찬은 송강호라는 거대한 존재감이 떠오르지 않을 만큼 완벽하게 전도연의 배경으로 복무하였으며 <넘버 3>에서의 그 전설적인 일명 '토토토토' 연기는 배우 자체의 스킬로서 만들어진 장면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밀정>
<밀정>

<밀정>의 후반부 재판 장면에서 두 진영 간의 괴리를 연기하는 그의 모습은 배역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노력으로 이루어진 듯 보이며 <사도>의 하이라이트 장면인,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힌 지 7일째 되던 날에 나누었던 대화 장면에서의 송강호의 연기는 나에겐 배역 그 자체에게 극적으로 몰입한 동물적인 감각의 연기로 느껴졌다.

송강호의 동물적 감각이 가장 응축된 장면으로 <사도>의 '뒤주 대화'를 꼽을 수 있겠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힌 지 이레째, 죽음을 앞둔 아들과 마주한 영조는 그 순간에도 왕의 어조를 또박또박 유지하며 대사를 밀고 나간다. 그러나 이 장면이 회자되는 순간은 그 또박또박함의 시간들이 아니라, 대사를 잇던 목소리가 한순간 픽 하고 갈라지는 '삑사리'가 발생한 일순간에 있다. 정석적인 발성도 정돈된 형태도 아닌, 어쩌면 다른 배우라면 매끄럽게 다듬어 넘겼을 그 균열을 송강호는 메우지 않고 그대로 둔다. 그리고 바로 그 결함이 장면에 진정성을, 그 순간 무언가가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는 현실성을 부여한다. 통제된 발성은 '연기'처럼 들리지만, 숨이 걸려 음이 미끄러지는 소리는 '발생'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철저한 분석으로 빚어낸 <밀정>의 재판 장면과 정확히 반대편에서, 그는 배역 그 자체에 몸을 맡긴 채 그 순간을 살아낸다.

연기를 열정으로 하는지 이성으로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송강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연기를 뜨거운 열정으로 하는 거 같지만, 그 이면엔 논리적인 냉정함이 있어요. 계산적인 머리가 아니라 이성적인 머리가 필요해요. 차가운 이성에서 열정도 나오고 인물과 세상을 보는 창조력도 나오는 거죠."

송강호의 자연스러움이 결코 계산의 부재가 아니라는 자기 고백인 셈이다. 그의 본능처럼 보이는 연기조차, 실은 차가운 설계 위에서 피어난다.

앞서 이병헌을 찬양하는 많은 이들의 주된 논리가 "이병헌의 연기를 보면 항상 다른 사람 같다."라는 것을 언급했고 실제로 나도 이러한 의견엔 공감하는 바이지만, 또 한편으론 약간 다른 생각을 해 보게 된다. 과연 송강호의 경우와 같이 모든 배역을 '송강호화'시키는 것이 과연 나쁘기만 한 것인가?라는 생각이다. 한 배우의 이미지가 배우 박성웅(이중구)이나 다니엘 래드클리프(해리 포터)와 같이 '특정한 배역'으로만 떠오르는 것은 좋지 않겠지만 '특정한 연기 스타일'로 떠오르는 것은 그렇게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나에게 송강호의 연기는 때론 정석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가 맡은 특정한 씬에 대해 누군가는 그보다 더욱 정석적인 연기를 선보일 수도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때론 정석처럼 보이진 않는 그의 모습 때문에 송강호의 연기는 늘 개성이 넘치며 그 어떤 배우와도 다르다.

송강호가 'Vogue Korea'와의 인터뷰에서 이와 관련해 이야기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예를 들어 관객들이 저 장면에서 이렇게 들어올 것이다, 예상하는 걸 정반대 방향에서 치고 들어가는 거죠. 박찬욱 감독이 송강호는 답안지에 정답이 아닌 답을 적는데, 그게 더 정답일 때가 있다고 얘기한 적이 있어요. 그래서 후배들한테도 제일 먼저 머릿속에 떠오른 정답을 연기하면 첫걸음부터 잘못 간 거라고 얘기해요. 항상 다르게 비틀어서 시도해 보라고. 골대 앞에서 엉뚱한 슛을 하더라도 주저하지 말고 자꾸 넣어봐야 강한 슛을 넣는 선수가 되는 이치예요."

자신만의 답을 찾고 이를 통해 매번 생생한 연기를 선보이는 배우. 세상에서 오직 송강호만이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은 연기. 송강호는 문자 그대로 "One Of A Kind"의 배우이다.

둘을 좀 더 비교해 보자. 내가 본 이병헌의 모든 작품에서, 그가 연기하는 인물들은 매번 특별한 인물로 보인다. 내가 본 송강호의 모든 작품에서, 그가 연기하는 인물들은 때론 지극히 평범한 인물로 보인다. 조금 더 쉽게 이야기하자면, 이병헌은 모든 작품에서 주연처럼 보인다. 그의 캐릭터 홀로 무슨 만화에서 튀어나온 인물인 양 튈 때가 있다. 거의 모든 작품에서 주연으로 출연했으니 당연한 말이지만, 과연 이병헌이 그 개성을 누른 채 철저하게 '안 보여야 하는' 배역을 맡았을 때 과연 이병헌이 '안 보일' 수 있을까?

또한 이병헌의 연기력이 지나치게 '완벽'한 까닭인지 모르겠지만, 그의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항상 왠지 모를 거리감이 느껴진다. 씨네21의 김혜리 평론가 역시 이병헌과의 인터뷰에서, 그의 연기가 '치밀한 노력으로 완성된 자연스러움'이라는 느낌을 주는데 그 '웰메이드'의 인상이 외려 보는 이를 불안하게 만드는 면이 있지 않냐고 물은 바 있다. 꽤나 공감하는 부분이다. 가장 정교하게 빚어낸 자연스러움이 도리어 관객을 불안하게 만들고, 끝내 묘한 거리감으로 남는다는 것. 그것이 내가 이병헌의 연기 앞에서 늘 느끼는 바이기 때문이다. 그가 연기하는 인물은 항상 '영화 속의 인물' 같으며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그래서 이병헌의 연기를 항상 '픽션' 속의 '퍼포먼스'로 느끼게 되는 것 같다. 물론 이병헌은 항상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나는 그가 항상 좋은 '연기'를 하는 것만 같다.

<밀양>
<밀양>

그러나 송강호의 경우 자신의 배역이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역할이라면 철저하게 조연으로 가려지는 느낌마저 들게 만든다. <밀양>이 그랬다. 송강호임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감은 절대 주연 배우 전도연의 그것을 넘어서지 않았다. 송강호의 모습을 볼 때면, 금방이라도 우리네 옆집에서 사람 좋은 웃음을 지은 채 살고 있을 것만 같은 평범함이 느껴진다. 그렇기에 여기에서 평범함은 편안함의 의미일 것이다. 또한 자연스러움의 의미일 것이다.

서두에서 나는 물었다. <화양연화>의 치파오를 입은 장만옥이라는 피사체 그 자체가 연기일 수 있는가, 평범함 그 자체로 프레임을 채우는 얼굴이 있을 수 있는가. 이제 나는 그 물음의 답을 송강호에게서 본다. 송강호의 그 '옆집 사람 같은 얼굴'은, 장만옥의 치파오와 정확히 같은 종류의 연기인 것이다. 한쪽은 아름다움이라는 image로, 다른 한쪽은 평범함이라는 image로, 두 배우는 프레임 안에 맺히는 존재 그 자체를 연기로 빚어낸다.

흔히 '생활연기'라는 키워드로 송강호의 연기를 설명하곤 한다. 송강호는 "나 연기한다!"라는 식으로 과하게 힘을 주어 연기하지 않는다. 사연이 많고 사건이 넘치는 캐릭터를 훌륭하게 연기하는 것이 물론 대단한 일이지만 우리네 평범한 사람들의 자연스러움을 포착하는 연기는 그보다도 어려운 일일 수도 있지 않을까. <밀양>과 <살인의 추억>과 <택시운전사>가 그랬듯이. 물론, 이 대목에서 나는 스스로를 한 번쯤 의심해 보아야 한다. 평범함을 포착하는 일이 더 어렵다는 말은, 어쩌면 '자연스러움'이라는 가치를 과도하게 신화화하는 우리 시대의 취향에 불과한 것일지도, 그리고 그것이 무의식적으로 나에게도 영향을 미쳤는지도 모른다. 통제를 완벽의 영역까지 끌어올린 이병헌의 연기가, 자연스러움을 빚어낸 송강호의 연기보다 열등할 까닭은 그 어디에도 없다. 어떤 상황에 놓인 인물이나, 어떤 서사를 지닌 인물은 오직 그 빈틈없는 통제로써만 비로소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달콤한 인생>의 선우가, <악마를 보았다>에서 복수에 서서히 잠식되어 가던 그 사내가 그러하지 않았던가.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어려운 '자연스러움'이라는 image를 송강호만큼 빚어낸 배우를 충무로에서 달리 떠올리기가 어려울 뿐이다.

<달콤한 인생>
<달콤한 인생>

두 배우는 다르다. 나는 송강호가 <달콤한 인생>의 선우를 맡는 모습을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 마찬가지로 이병헌이 <사도>의 영조를 맡게 되었을 때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다. 송강호는 이병헌이 연기한 <지 아이 조>에서의 샤프하고도 핏기가 서린 스톰 섀도우를 소화할 수 없을 것 같다. 이병헌은 송강호가 연기한 <살인의 추억>에서의, 시대의 더께가 내려앉은 박두만 형사의 모습을 보여줄 수 없을 것 같다.

두 배우의 우열은 끝내 정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이제 우리는 그 우열을 정할 수 없는 까닭만큼은 조금 더 또렷하게 안다. 두 사람은 같은 정점에 오른 skill을 정반대 방향의 image로 빚어내는, 애초에 같은 자 위에 나란히 놓을 수 없는 배우들이기 때문이다. 두 배우에 대해 호불호가 갈릴지언정, 두 배우의 우열에 관한 정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나에게 이병헌이라는 배우는 언제나 내가 생각하는 완벽함을 보여주기에 나는 그를 충무로의 배우 중 가장 좋아하며 나에게 송강호라는 배우는 어떤 영화에서건 대체 불가한 존재감을 보여주기에 나는 그를 충무로에서 가장 위대한 배우라고 생각할 뿐이다. 두 배우가 이리도 다르기에 관객의 입장에서 너무나 감사하며, 이런 두 대배우가 충무로에 있기에 그들의 연기를 마주할 때 매번 행복하다. 앞으로도 많은 시간 동안 나는 그들이 선보이는 황홀한 연기에 감탄과 감동을 받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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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 The Movie Databa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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