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한 글을 지면으로 옮겼습니다.

2019년 5월, 프랑스에서 놀라운 소식이 들려왔다. 제72회 칸 영화제에서 봉준호의 영화 <기생충>이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것이다. 한국영화계의 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칸 영화제에서의 ‘심사위원특별상’을 수상한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 베니스 영화제의 최고상 격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 등 21세기 들어 한국영화의 국제적인 분투가 이어졌던 흐름에 그야말로 방점을 찍는 사건이었다. 그 기세는 이듬해 2020년에도 멈출 줄 몰랐다. 황무지와 다름없었던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감독상을 포함한 4개의 상을 거머쥐며 명실상부한 그해 아카데미의 주인공이 되었다. 2021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세계 3대 영화제 중 하나인 베니스 국제영화제의 경쟁 부분 심사위원장으로 위촉되었다. 전인미답의 경지다. <플란다스의 개>로 데뷔한 이래 그는 늘 비범한 통찰력과 독창적인 비전을 보여주었으며 관객과 평단 모두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감독이 되었다. 현 충무로를 대표하는 단 한 명의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봉준호가 될 것이다.
보험의 개념으로 우선 밝혀야 할 것 같다. 나는 봉준호를 좋아한다. 적당히도 아니고 많이 좋아한다. 이름이 알려진 영화계의 감독들은 물론 대단한 천재들이지만, 그 중에서도 천재성이 말 그대로 흘러 넘치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들이 있다. 나는 코엔 형제, 라스 폰 트리에, 봉준호 등의 영화를 볼 때면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의 천재성을 음미하는 것은 매번 즐거운 일이다.
그럼에도 지극히 반대론적인 관점에서 이 불가침적인 거장을 비평해보는 것은 꽤나 흥미로운 과정이 될 것이다. 또 이러한 일은 그 사람의 진정한 팬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하는 나름의 명분도 스스로 가지고 싶다. 이러한 과정에서 나는 이 감독을 순수히 무엇 때문에 좋아하는지, 무엇을 보고 빠지게 되었는지 냉정히 회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언제나 그의 신작을 누구보다 기다리는 한 명의 팬으로서.
화면 캡처 2026-06-20 003729.png 우선 봉준호의 작품에서의 강점을 몇 개만 나열해보자면 첫째로 ‘쉽다는 것’이 될 것이다. 좋은 영화가 반드시 어려워야 할 필요는 없다. 쉽다는 것의 가장 강력한 장점은 절대 다수가 공감할 수 있다는 점이다. (비단 영화에서가 아니더라도) 전문적인 영역에서 어려운 것은 어려운 말로 쓰일 수밖에 없다는 말도 물론 공감하지만, 누구나 한데 모여 즐길 수 있다는 '장터 예술'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는 영화에서, 그것도 대중을 견인하는 감독인 봉준호와 같은 인물의 영화에서 쉬운 말로 대중을 납득시킬 수 있다는 것은 흔히 말하는 ‘보편성’의 측면에서 분명히 강력한 힘이 된다. 못 만든 예술 영화보다 못 만든 상업 영화가 낫다.

둘째, 강력한 메시지가 작동한다. 그는 자신의 영화에 사회 비판적인 주제를 블랙 코미디의 작법을 통해 담고 있다. 입봉작인 <플란다스의 개>에서는 인간과 사회의 위선을 폭로했고 <살인의 추억>에서는 암울하고 막막했던 시대상을 해학적이고도 날카롭게 담아냈다. <괴물>에서는 선동적인 사회를 풍자하는 요소를 오락영화의 틀 아래 기막히게 녹여냈고 <마더>에서는 존경받는 지위를 가진 이들의 위선과 소시민들의 선민의식을 비판했다. <설국열차>에서는 계급투쟁이라는 주제를 절묘한 야심으로 구현해냈고 <옥자>에서는 자본주의의 민낯을 동화적인 테마 아래 코믹하면서도 서늘하게 비판했다. <기생충>에서는 직관적인 이미지와 미묘한 뉘앙스를 통해 사회적 계급의 수직적 레이어를 그려냈다.
이 부분에 주목해봐야 하는 것은 다분히 뉘앙스적인 지점에 있다. 봉준호의 영화를 탐구하게 되면 그 주제의식이 굉장히 진한 수준으로 함유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괴물> 안에 반미의 정서가 매우 강하게 느껴진다는 것을 반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살인의 추억> 안에 시대의 무력감과 공권력을 향한 불신이 날카롭게 배어 있다는 것을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 그러나 봉준호는 그 ‘주제의식’을 영화의 최전선에 위치시키지 않는다. 봉준호는 예술이 선전을 위한 도구로 기능하는 것을 늘 경계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봉준호의 영화에서 전방에 위치하는 것은 지극히 영화적인 부분에서의 미학이나 예술성, 혹은 '엔터테이닝'이라고까지 칭할 수 있을 것 같은 현란한 연출력이다.
다시 말해 봉준호는 자신의 영화 속 컨텐츠들의 위계를 분명하고 치밀하게 설정하는 감독이다. 그는 단순히 눈요기만 즐거운 오락을 만들려 하지 않는다. 또한 과시적인 미장센으로 유아적인 자아도취에 빠지지도 않는다. 사회를 바라보는 날카로운 시선을 프레임 안에 신랄하고도 대담하게, 또 영리하고 교묘하게 담는다.

셋째, 독창적이다. 봉준호는 장르적 공식을 따르면서도 장르적 공식을 비틀어 안정성과 독창성을 모두 가져가는 능력이 탁월하다. 쉽게 말해 영화가 굉장히 ‘스무스’하다. 봉준호 스스로 팬을 자처하는 일본의 거장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그것처럼, 봉준호의 영화는 항상 프레임 안에 동력이 가득하고 에너지가 넘친다.예를 들자면 <괴물>. 극 초반 모두가 기대하던 괴물을 가감 없이 드러내 관객들이 ‘보고 싶어했던’ 것의 기대를 충족시켜준 뒤 이야기를 사회적인 의제로 확장시켜 예상할 수 없는 흐름으로 몰고 나간다. 또한 <기생충>에서 역시 모두가 예상할 흐름으로 유려하게 전개시키다 중반 이후부터 새로운 막을 열어 주제와 서사를 무한히 확장시킨다. 나 역시도 <기생충>에서 작중 번개가 친 이후 무드가 급격히 전환되는 순간부터는 정말 영화에 멱살 잡힌 채 끌려갔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봉준호의 ‘독창적임’은 그의 다재다능함과도 연관지어볼 수 있겠다. 흔히 말해 대중성과 예술성을 겸비한 감독이라는 표현이 적절한 봉준호는 자신의 작품에서 쉬이 잡기 어려운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아내는 감독이기도 하다. 모든 영화가 대중성과 예술성을 겸비할 필요는 없다. 물론 대중성과 예술성이 배치되는 개념도 아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겨냥한 블록버스터 오락 영화에도 그만의 예술성이 깃들어 있을 수 있고, 엘리트적인 유수의 영화제가 좋아할 만한 아트하우스 영화에도 ‘오락성’으로 부를 수도 있는 엔터테이닝이 깃들 수 있다. 봉준호의 그 다재다능한 능력은 분명 인정해야 할 부분이다. 천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한 영화가 프랑스의 저명한 영화 잡지 <카예 뒤 시네마>에서 선정한 ‘2000년대 베스트’에 들기까지 한다는 것이 흔한 장관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준호의 영화를 볼 때면 느끼게 되는 왠지 모를 아쉬움 혹은 의문점들이 늘 존재한다. 늘 완벽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있겠냐마는, 또한 누군가에겐 그가 매번 완벽한 영화를 만들어내는 감독으로 보일 수도 있을 만한 인물이라는 점에 백 번 동감하는 바이지만, 개인적인 감상에선 이 감독의 영화를 볼 때면 늘 마음에 걸리는 부분들이 있었기에 비판을 가장한 투정과 심술을 좀 부려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 의문점은, 공교롭게도 내가 상술했듯 봉준호의 첫 번째 '강점'이라고 꼽았던 '쉬움'에서 출발한다. 대중을 납득시키던 그 유려함이 어떤 임계를 넘어가는 순간, 유려함은 빈틈없음으로, 보편성은 도식성으로 변질되는 것은 아닐까. 봉준호의 영화를 보는 도중엔 이따금씩 지나치게 도식적이거나 공산품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사실 이는 봉준호가 영화를 지나치게 잘 만들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물론 봉준호도 스스로를 ‘장르영화 감독’이라고 소개한다. 그러나 영화의 매 순간 너무나 치밀한 그의 설계 탓에, 장르가 본디 가지고 있어야 할 헐거움과 우연과 날것의 활력마저 빈틈없이 통제되어버린다는 인상이다. 장르영화의 숨통은 그런 불완전함에서 트이는데, 봉준호의 장르는 너무 완벽해 도리어 숨이 막힌다.

이를테면 봉준호의 인장처럼 여겨지는 ‘앙상블’ 연출은 훌륭하지만 한편으론 지독히 기계적이고 계산적으로 느껴지는 지점들이 존재한다. 이를테면 <살인의 추억>에서의 식사 시퀀스나, <기생충>에서 기택네와 문광네가 서로 뒤엉켜 싸우는 시퀀스. 감독 특유의 리듬감과 유머는 인상적이었지만 보면서 이질적이고 기계적인 느낌을 받아 의아했었다.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직조된 씬들을 접하면서 역설적으로 장면 가득 뻣뻣하게 경직되었다는 느낌을 받은 것은 나뿐일까. 씬에서 기술적인 성찬이 가득하니 어떤 정서적인 감흥은 공(空)에 가까웠다.
‘결’을 위한 봉준호의 건축은 완벽에 가깝다. 하지만 한편으론 늘 그 완벽함으로 인해 그의 영화와 거리를 두게 된다. 나는 종합 예술인 영화에선 공란의 영역을 의도적으로 남겨 두어야 한다 생각한다. 완벽함은 때론 문제가 되기도 한다.
두 번째, 나무보다 숲을 바라보는 서사로 인해서인지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매력이 없다. 그의 영화 자체에 매력은 있을지언정, 후술할 <마더>의 김혜자를 제외하고선 그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봉준호라는 거대한 공장 안에 있는 기계 속의 톱니바퀴 같다. 그의 인물들은 서사가 달려가는 결말의 거대한 인력에 의해 맥없이 끌려가는 부속품처럼 느껴진다. 이 부분에선 마치 크리스토퍼 놀란을 보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물론 이는 감독의 특징이다, 비판점이라면 비판점이겠지만. 다수의 인물들이 등장하는 편인 봉준호의 영화이기에 이러한 “특징”은 언뜻 영화 전체를 거추장스러운 우화처럼 보이게 하는 것 같다.

비교가 비평의 적절한 방법론은 아닐지 모르겠지만, 박찬욱 감독의 예시를 들어보자. 그의 필모에서 어떤 인물들이 남았던가? <올드보이>의 오대수와 이우진, 미도는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복수는 나의 것>의 류와 영미, <친절한 금자씨>의 금자, <박쥐>의 태주, <아가씨>의 히데코, <헤어질 결심>의 서래까지. 박찬욱의 모든 작품에는 캐릭터들의 에너지가 들끓어 있었다. 박찬욱의 위대한 자취에는 늘 ‘사람’이 있었다. 혹자는 봉준호의 작품들 속 송강호가 분한 캐릭터들을 들며 반문할지도 모른다. <살인의 추억>의 박두만, <괴물>의 강두, <기생충>의 기택이 어찌 매력이 없는 인물이냐고. 그들을 거론한다면, 나는 그 매력의 출처를 의심해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봉준호라는 감독이 빚은 캐릭터의 힘인가, 아니면 송강호라는 대배우가 텅 비어있던 좌표 안에 자신의 살과 체온을 들이부어 메운 힘인가. 배우의 위대함과 캐릭터의 위대함은 구분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봉준호의 캐릭터 중 ‘혜자’를 제외한 어떤 인물에게도 애정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봉준호의 영화를 두고 그가 탁월한 기술자라는 감탄은 주저없이 하게 되지만 반대로 그가 훌륭한 예술가라는 감동은 망설이게 될 때가 있다. 봉준호는 ‘Architect’인가 ‘Artist’인가?
세 번째, 봉테일 봉테일 하지만 사실 나는 썩 와닿지는 않는다. (물론 그 역시 이러한 수식어가 갑갑하다고는 언급했다.) 분명 유독 그의 영화에선 디테일이 많으며, 이를 가지고 수많은 사람들의 ‘찬양 영상’이 양산된다. 이를테면 “<기생충> 속 인물들이 선을 넘었던 순간”이라는 제목의 영상으로 그가 심어놓은 ‘직관적 상징’들을 보여주는 영상 같은. 좋다, 좋은데 그런 것들이 그 영화의 비밀인가? 그런 상징들이 가득하면 그 감독이 거장으로 인정받는 것인가? 그러한 상징들을 모두 찾아내면 우리가 그 영화를 100% ‘이해’한 것인가? 가끔 봉준호는 이러한 상징들을 너무나도 많이 심어놓아 마치 우리로 하여금 이것들을 찾게 하는 ‘하이드 앤 식 게임’을 하게 만든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것마저 크리스토퍼 놀란과 비슷하다. 몇 년 전 <인터스텔라> 에서 등장하는 옥수수밭이 사실은 놀란이 실제로 수 년간 재배했다는 비하인드가 알려지자 많은 이들이 이를 갖고 놀란을 앞다투어 찬양하는 기현상이 벌어졌었다. 물론 이를 갖고 감독의 완벽주의를 인정하는 수준까지는 이해가 되지만 더 나아가 이를 가지고 감독의 능력을 심히 ‘올려치기’ 한다거나, 그 영화에 대한 평가가 올라간다거나 하는 현상은 썩 합당해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면에서 그의 4번째 장편 영화인 <마더>는 심히 이질적이고 독보적인 작품이다. 꽤나 비슷한 무드와 리듬을 가진 그의 다른 영화들과는 다르게, <마더>는 시종 차갑고 심각하며 서사보다 인물이 중요한 영화이다. 나는 이 영화를 봉준호의 최고작이라고 생각한다. 봉준호의 ‘인생영화 리스트’ 등에서 엿볼 수 있는 그의 영화 취향을 생각하자면 아마도 <마더>가 그가 궁극적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영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사실 이렇게 작가주의적이고 내내 어두운 영화를 만드는데 투자를 어떻게 얻은 것인지 의문스러울 정도이지만 그건 차치하고, 그저 이런 영화가 만들어진 것에 대해 박수를 보내고 싶을 따름이다.
우선 <마더>에서는 그의 이전 작품들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었던 노골적이고 구도적인 상징들이 다소 덜했던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한 면에서 마치 이스터에그를 찾아다니는 게임 같았던 <기생충>과는 사뭇 다르게, 이 영화는 상징과 은유를 감춰놓지 않는다. 이미지는 간결하고 메시지는 거대하다. 오프닝과 엔딩은 혹자의 말대로 소름 끼치도록 탁월하게 조응한다.
또한 <마더>는 그의 필모그래피 중 가장 깊은 영화이다. 어머니라는 한 명의 인간이, 모성애라는 숭고한 관념이 어디까지 엇나가고 폭주할 수 있는지 적나라하고 신랄하게 탐구한 작품인데, 누구나 다룰 수 있는 소재이지만 아무나 그 심연을 이처럼 깊게 건드릴 수는 없다는 측면에서 그 의의가 상당하다.
<마더>가 봉준호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해외에서 덜 언급되고 저평가받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들곤 하는데, '서양'의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마더>라는 영화 저변에 배어 있는 미묘한 에너지를 파악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든다. <마더>를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해선 한국, 더 나아가 동양의 문화에서 가지고 있는 어머니의 모성애라는 관념이 어떠한 위치와 뉘앙스를 지니고 있는지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아들과 함께 잠을 자는 마더, 아들의 소변을 빤히 바라보는 마더, 혹은 마더의 가슴을 만지는 아들. 특히나 마지막의 예시는 '서양'의 시선에선 명백한 근친의 암시겠지만 우리의 시선에선 문자로 설명하기 어려운 불편하고도 미묘한 무드를 감지할 수 있지 않던가.
봉준호가 이 영화에서 보여준 태도가 놀라웠던 지점은 지나치게 신성시되고 불가침되었던 모성애를 대담하게 비틀어내는 그 담력에 있었다. 여기에 더해, 앞서 짚은 것과 같은 궤도에서 '국민엄마'라는 수식어를 단 김혜자를 캐스팅한 효과는, 그가 대한민국에서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레퍼런스가 전제될 때 비로소 극대화된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그의 다른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지극히 한국적이다. 이런 영화를 오롯이 느낄 수 있음은 한국의 복이다.

말하자면 봉준호의 모든 영화는 항상 '붙는' 영화였다. 서사와 연기가 붙었고 상징과 주제가 붙어 있었다. <기생충>마저 그랬다. 봉준호의 모든 영화가 기계적으로 착착 돌아간다 느끼게 되는 것은 단연 이러한 점에서 기인했으리라. 그러나 유독 <마더>만이 봉준호의 내적 인장과도 같은 ‘접합’에서 멀어져 있는 영화였다. 이야기와 인물은 교묘하게 미끄러졌으며 매 순간 예상을 배반했다. 그 불안정함이 역설적이게도 봉준호의 최고작을 낳았다. 봉준호의 필모그래피에 있어 <마더>는 무인도와 같은 작품이다. 나는 그 무인도와도 같은 작품이 유독 마음에 든다.
<마더>가 봉준호의 가장 높은 봉우리였다면, 그 대척점에는 가장 깊은 해구가 있다. 2026년 기준 봉준호의 가장 최신작인 <미키 17>이 바로 그곳에 가라앉아 있다. <기생충>으로 한 예술가가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점에 닿은 그가 6년의 침묵 끝에 모두의 주목을 받으며 할리우드 자본의 도움을 받아 내놓은 이 영화는,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그의 필모그래피를 통틀어 <옥자>와 함께 최악에 위치한 작품이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먼저 짚어야 할 것은, 1인 2역과 도플갱어라는 설정이 2025년의 관객에게 그 자체로 참신할 리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관건은 주인공 캐릭터가 얼마만큼의 개성을 관객에게 각인시키느냐에 달려 있었을 텐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미키 17>은 캐릭터의 개성보다 로버트 패틴슨이라는 배우의 개성이 더 돋보이는 영화였다. 미키라는 캐릭터는 끝내 스스로를 관객에게 각인시키는 데 실패했다. 앞서 나는 봉준호의 인물들이 혜자를 제외하면 거대한 공장 속 톱니바퀴에 가깝다고 적었다. 미키는 그 혐의를, 가장 많은 자본과 가장 큰 주목 속에서, 가장 극적이고도 쓸쓸하게 입증하는 인물이다.
소재의 특징으로 인해 극중에선 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여러 물음들을 던진다. 죽는 것은 어떤 느낌인 것인지, 멀티플이란 현상의 발생으로 인격이 분리된 것인지, 내가 죽으면 '나'는 끝이고 '너'가 살아가는 것인지. 충분히 흥미로운 질문들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 물음들을 그저 한 번 입에 올리는 데서 그치며, 정작 확장시켰을 때 훨씬 깊어졌을 여러 사유들을 통속적인 로맨스 서사의 존재가 가려버린다.

보다 근본적으로, <미키 17>은 봉준호 특유의 국적성, 보다 정확히는 '김치식 유머'가 증발한 작품이었다. 봉준호의 유머는 늘 한국이란 나라의 문화적인 특색이 아주 진하게 우러난 유머들이었다. 공교롭게도 해외의 물이 들어간 <설국열차>와 <옥자>가 본작과 유사한 증상을 앓았다. 풍성한 자본의 냄새를 한껏 풍기며 오버스럽게 쇼를 벌이는 미국식 유머, 그 억지스런 유쾌함은 봉준호 월드의 정수와 미묘하게 어깃장을 놓았다. 봉준호의 '오두방정'은 스케일이 화려하지 않아야 잘 어울렸는데, 할리우드의 자본에선 너무 'Glamorous'해 보였다. <기생충>보다 장르적이었지만 정작 장르적인 매력은 떨어졌다. 코미디는 독창적이지 못했고 스릴러는 강렬하지 못했다. 인물들 간의 앙상블로 넘실거리던 그의 전작들과는 달리, <미키 17>의 인물들은 평면적인 선역과 악역(지크와 티모)이거나, 혹은 이미 예정된 듯한 결과를 서술하기 위해 그저 들러리 역할을 수행할 뿐인 (나샤) 매력적이지 못한 인물들이었다.
<미키 17>을 보면서 몇 해 전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브로커>를 보며 들었던 생각이 똑같이 들었다. 감독이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영화를 만들 때, 필연적인 번역의 과정을 거치게 되면서 감독이 본래 의도했던 말의 뉘앙스가, 그리고 감독과 같은 언어권의 문화적 배경을 공유하는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미묘한 감각이 어떻게 무너지는가. '외국인'의 시선에선 때려죽여도 이해가 안되는 지점이 있다는 임권택의 작품들처럼, 봉준호의 작품들에선 외피의 현란한 장르적 재미뿐만 아니라 그 저변에 존재하는 미묘한 뉘앙스와 아이러니를 탐구하는 재미가 있었던 것이다. <미키 17>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봉준호답지 않게 공허한 오락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공허에서 <미키 17>은 <마더>의 정확한 대척점이 된다. 두 영화는 봉준호가 자신의 인장에서 벗어났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그 이탈의 방향이 정반대다. <마더>가 봉준호 특유의 화려한 외피를 '스스로' 벗어던지고 그 아래 본질로 침잠한 것이라면, <미키 17>은 외피와 본질을 한꺼번에 '놓쳐버린' 것이다. 전자는 덜어냄으로써 예술의 심연에 닿았고, 후자는 잃어버림으로써 흩어져버렸다. 두 영화는 봉준호라는 한 사람의 최선과 최악을 마주 보게 한다.
봉준호는 <기생충>을 통해 아시아의 어떤 감독도 이루지 못한 전인미답의 커리어를 이뤄냈고, <미키 17>을 통해 거장에게도 휘청임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작금의 상황에서 그를 오즈 야스지로나 구로사와 아키라 같은 전설적인 거장과 평가를 나란히 하는 일은 아직 시기상조일 것이다. 그가 아시아의 감독들 중 얼마나 높은 위치를 차지하게 될 지는 좀 더 시간을 두고 가늠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안 될 것은 무엇인가?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미키 17>이라는 한 번의 휘청임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추세가 되는 일이다. <기생충>으로 가장 높은 고지에 오른 그가 앞으로 그저 그런 평작들을 양산하는 감독으로 주저앉을지, 아니면 지금까지 그가 늘 그래왔듯 또 한 번 우리의 예상을 배반하며 위대한 작품으로 되돌아올지. 다만 나는 <마더>를 기억한다. 봉준호는 자신의 완벽한 설계가 흔들릴 때 오히려 가장 깊은 곳에 닿았던 감독이다. 그러니 이 실족이 추락의 시작일지, 또 하나의 정상을 향한 도약일지는 아직 누구도 모른다. 봉준호는 여전히 전진한다. 비록 그 전진이 늘 상승인 것은 아닐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