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오프닝에선 우리가 기대하지 않았던 '머리 있는' '사복 입은' 남성의 모습이 보인다. 어딘가 위태로워 보이는 그의 얼굴. 금방이라도 눈앞을 달려가는 기차 앞으로 뛰어들을 것 같은 모습의 남성. 프레임 속 그는 분명 살아있지만 한편, 언뜻, 그는 죽어있는 모습이다.
<달마>의 세 주인공은 각기 다른 형태로 죽음을 감각한다. 죽음과 다름없었던 끔찍했던 속세에서 죽음의 코앞까지 다가갔었던 기봉, 육신의 생명이 꺼져가고 있음을 직감하는 노승 혜곡 화상, 소박한 유희가 불러온 살생으로 인해 아마도 살면서 처음으로 죽음에 대해 목격했을 동자승 혜진.
한반도의 강산을 이리도 아름답게 담은 영화가 있을까. 배용균이 본작에서 이뤄낸 성취는 타르코프스키의 성취에도 뒤지지 않는다. 타르코프스키가 자신의 영화에서 러시아의 드넓은 벌판을 그토록 아름답게 담았듯이, 배용균은 <달마>를 통해 가장 한국적인 미가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달마>의 감독, 각본, 촬영, 조명, 편집, 미술, 소품은 모두 배용균이라는 인물 한 사람이 도맡아 한 일이다.
감독 스스로의 표현인, "일요일의 리얼리즘"이란 말의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다. <달마>의 세계(혹은 공간)에는어떤 가장이나 과장이 담겨 있지 않다. 물론 노승 혜곡의 죽음을 전후로 한 이야기가 미약하나마 존재한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사라진다 해도 <달마>가 사라지지 않을 것만 같은 느낌이다. 본작의 이야기는 세계 안의 미약한 하나의 에피소드 남짓하게 다루어진다. <달마>는 세계가 이야기보다 공고하게 자리잡고 있다. 몇 번의 플래시백이 다소 기능적으로 소비되었다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어 아쉽지만, 그 플래시백이 '이야기'를 손바닥 뒤집듯 옮기기 위해 설치된 것이 아닌 인물 정서의 층을 축조하기 위해 새워진 것이라는 점에서 감안할 만 하겠다. <달마>는 '특정한 사건' 없이 그저 '흘러가는 시간'들을 포착하는 영화이며 그것들의 아름다움을 포착해 스크린 속에 수놓아 명상적인 이미지들의 공명함을 만들어낸 영화다.
<달마>의 이미지들은 쉽사리 잊혀지기 어려운 잔상을 만든다. 벚꽃이 사찰을 가득 덮은 장면을 기억하는가. 바위와 폭포의 압도적인 장관을 기억하는가. 고요하고 평온하던 산 속을 나와 총천연색의 떠들썩한 사바세계로 내려간 기봉의 모습을 기억하는가. 사바세계로 되돌아가고파 갈등하는 기봉을 역광으로 포착한 노을 지는 순간을 기억하는가. 더욱이 길 잃은 혜진이 소의 인도를 받아 집으로 돌아오는 순간은 판도라 행성의 장관 못지않으며, 사신(死神)이 불타는 혜곡 스님의 시신을 응시하는 기봉의 눈빛은 그 어떤 눈동자보다 강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