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이 감독의 작품만큼 내용을 정리하기 어려운 것이 있을까, 세상에 이렇게 독창적인 스타일을 보여주는 감독이 있을까. 박찬욱 감독의 영화 <박쥐>를 다시 보며 들었던 생각이다. 거칠게 이 영화를 요약한다면 '성(聖)스러운 인물이 성(性)으로 타락해 추락하는 이야기'일테다. 종교와 성적 은유가 어지러이 흩뿌려져 있으며 동/서양의 모티브가 혼재되어 있는, <박쥐>는 그야말로 괴작이다.
유난히도 흰 문이 보이고 그 앞에 햇빛이 비친다. 이어 빛을 정면으로 맞은 채 주인공 상현이 모습을 드러낸다. "자살은 살인 중 가장 나쁘다"며 타협 없는 신앙을 보여주며 남을 위해 자신의 육체를 희생하기까지 한다. 실험에 의해 사망하게 되었지만 빛을 머금은 채 다시 살아난다. 영화의 초반, 상현이란 인물은 분명 예수의 모티브다.
프롤로그를 지나 주 무대가 되는 태주의 집은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이질적인 것들'이 모두 들어찬 공간이다. 일본식 2층 가옥 형태인 건물에 '행복한복'이란 가게를 걸었지만 매장 내 한복을 입은 마네킹은 노란머리 서양인이고, 2층의 주방에선 뽕짝을 틀어놓은 채 보드카를 마시며 마작을 즐긴다. 그곳에 사는 아름다운 외모의 태주는 집에서 하녀 수준의 대우를 받기에 그친다.
상현 역시 그렇다. 과거엔 나를 희생해 남을 살리려던 성인이었지만 이제는 남을 희생해 나를 살게 하려는 짐승이 되었다. 그가 입은 검은 수단은 더이상 성스럽게 비춰지지 않는다. 한 발짝 한 발짝 오르던 신앙의 고난은 추락하는 달콤한 쾌감이 모두 지워버렸다. 상현은 이제 빛을 두려워하는 자가 되었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김옥빈, 태주의 영화다. 귀신도 홀릴 듯한 매력과, 상현마저 초월한 광기가 아득히 공존하는 그녀는 상현이 쾌락을 품게 만드는 대상이자, 스스로 쾌락을 탐하는 주체이며, 스스로 타락의 전락을 탐미하는 주체이다. 상현이 박쥐가 '되었'다면, 태주는 시작부터 박쥐였다.
<박쥐>는 기묘한 영화다. 정적과 이를 깨는 'active'의 배치가 강력하게 충돌해 수없는 충격을 선사한다. 역할 정도로 낯설고 강렬한 표현들이 넘쳐나지만, 한켠 순수하고 로맨틱한 무드가 잔재하기까지 한다. 동시에 치밀한 영화다. 낙하의 쾌감을 극대화하는 수직의 연출이나, 변화와 대치를 드러내는 색감의 사용은 매 순간 절묘하게 짜여져 있다. 자살은 가장 큰 죄라 말하던 상현이 결국 자신을 죽임으로서 끝나는 이야기 역시 역설적인 흥미가 있다.
두 번이나 봤지만 나는 여전히 이 영화가 박찬욱의 최고작이라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또한 이 영화가 여전히 그의 작품 중에 가장 좋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신한 것은 이 영화는 세상에 박찬욱만이 만들 수 있는, One of a kind의 영화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