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와 인간. 서로에게 좌절을 드리우는 그 지독한 죄의 굴레
이 영화의 윤리적 아이러니는 한스를 마냥 정죄하지도, 마냥 동정하지도 못하게 된다는 것에 있다. 사람은 양면성이 있다는, 그 당연스럽지만 불편한 진실을 가지고 영화는 관객을 후벼파는 것 같다. 술고래에 가정폭력을 일삼는 모습의 인간말종 한스는 누구보다 비호감에 증오스러운 존재처럼 보이지만, 한편 그를 속이며 살아가는 아내 임가드의 모습이나, 친구인 해리의 존재로 인해 가장으로서의 존재감을 상실한 한스의 분노를 보고 있노라면 그에게 연민의 감정마저 든다.
사회는 돌아온 한스를 반기지 않는다. 그의 어머니도, 그의 다른 가족들도. 한스는 과거 경찰공무원 시절 한 여성과의 부적절한 관계로 인해 파면당한 전적이 있는 남성이다. 수레에 과일을 싣고 하루를 벌어먹는 그의 직업을 가족들은 부끄러워한다. 허나 그가 그 행상으로 경제적 성공을 거두자 가족들은 한스를 두고 자랑스러운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준다.
한스는 이미 죽어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미 그는 세상으로부터의 스위치가 꺼져 있는 상태였다. 어머니로부터 미래를 강요받은 한스, 아내에게 배신당한 한스, 아버지라는 지위를 빼앗긴 한스. 끝없는 소외감에 그는 죽음의 순간에서마저 (많은 이들과 과 함께 있었지만) 홀로 갈 수 밖에 없었다.
<사계절의 상인> 속 한스의 행적이 비극이긴 하나, 그렇다고 가시적인 사건들로만 그의 행보를 나열한다면 그가 그렇게까지 처절한 비극의 희생양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영화에 가슴 아파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영화에 산재한 (사회가 한스를 바라보는) 그 어떤 혐오와 소외의 뉘앙스이기 때문이다. 보여줄 수 없는 것으로 보여주려 하는, 파스빈더의 집념이 눈부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