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 중인 영화의 시간적 배경. 영화의 오프닝은 프랑스의 상징인 개선문을 지나치는 나치 군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영화의 주된 이야기는 나치에 대항하는 레지스탕스의 이야기, 즉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이지만 감독인 멜빌은 영웅들의 뜨거운 서사가 아닌 평민들의 차가운 서사를 택했다. 사실 이들이 레지스탕스인 것을 잠시 잊는다면 이들의 행동은 음모와 계략을 가득 세우는 첩보원들의 그것처럼 느껴지니 말이다.
충무로의 많은 '일제강점기 영화'들은 독립운동가들을 영웅 그 이상의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 애쓴다. 이미 관객들이 영화 속 인물들이 성웅이란 사실을 충분히 자각하고 있음에도 영화의 일견 교조적이고 가르치려는 태도는 관객을 불편하게 만드는 지점들이 생긴다. 이 영화가 경계하는 부분은 바로 그 지점일 것이다. 은근한 쾌감을 전달하는, '비극을 가장한 희극'이 아니라 반복되어선 안될 비극이 분명함을 이 영화는 잊지 않는다.
이 영화는 '갭'의 영화다. 초반부 필립이 탈출을 시도할 땐 음악으로 애써 유도하지 않는데도 되려 긴장감이 폭발했으며, 이후 바로 이어지는 '면도 씬'에는 일순간 긴장을 놓음에서 오는 쾌감이 엄청나다. 차 안에선 서글서글한 중년의 남성으로만 보였지만 배신자를 처단할 땐 누구보다 냉혹한 리더로 변하는 필립의 모습도 그렇다.
첩보 느와르의 자장 아래 있는 영화답게 매 순간 서스펜스가 탁월하며, 차갑고 건조한 회색빛의 색감에서 느껴지는 무드도 인상적이다. 무엇보다 마지막까지 눈물조차 값싸게 만드는 비정함이 이 영화의 생명력을 영원하게 만드는 듯 하다. 느와르라는 장르와, 전쟁이라는 소재를 다루는 태도에 있어 이 영화는 완전하다.
.
.
.
.
+ 라이카시네마에서 4k 버전으로 상영해준다는 소식을 보고서 어쩌다 보니 한 번도 간 적 없었던 라이카시네마를 가 보기로 마음먹었다. 40석밖에 되지 않는 작은 상영관이었지만 사운드도 좋고, 스크린도 제법 훌륭했다. 무엇보다, 진정 오타쿠들을 위해 만들어진 듯한 공간의 아늑함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경제적 문제인 것인지 몇 군데 복원이 되어있지 않은 듯한 장면들이 있었지만 별 문제는 되지 않았다. 전반적으로 복원된 버전의 인상은 '날카롭다'는 느낌이 들었다. 복원을 정말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부 복원 버전의 경우 색감이 완전히 달라져 오히려 아쉬운 부분이 느껴지기도 했는데 (ex.<화양연화>) 본작의 복원은 영화 자체의 정서를 해치지 않고 그대로 보존하면서 더 나은 퀄리티를 이끌어내는데 성공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인물이 등장함에도 저마다 인상적이며 기교를 부리지 않고도 우아한 쇼트들은 정말 너무나도 모던하다. 60년대 영화임에도 90년대 정도의 영화를 보는 듯한 현대적인 느낌. 배신자를 처단한다는, 얼마든지 극적이고 드라마틱하게 보여줄 수 있는 씬들에서도 아주 사실적인 접근으로 리얼타임의 건조한 침묵을 제대로 살려낸다. 배경으로 들리는 서늘한 바람소리를 적극적으로 영화에 살린 것 또한 영화에 킥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뜬금없이 든 생각이었지만, <브루탈리스트>가 이 영화를 얼마나 참고했을지 궁금해졌다.
두 번째로 본 때문이었을지 영화의 마지막 대사가 너무나 절묘하고도 강렬하게 다가온다. 마치 『1984』의 마지막 대사를 연상케 하는 여운. 여전히 좋았고 사실 처음 본 때보다 더 좋게 느껴진 영화.